2009년 4월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개최됐던 이벤트(상영, 전시, 콘퍼런스, 퍼포먼스 혼합) <확장영화: 수용의 공간을 활성화하기>(Expanded Cinema: Activiating the Space of Perception)에서 앤서니 매콜을 처음 만났다. 매콜을 포함하여 맬컴 르그라이스, 윌리엄 레이번 등 영국 구조-유물론 영화의 전설들, 실험영화 및 비디오의 연구와 큐레이팅에 큰 족적을 남긴 전문가들이 모인 행사에 나는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은 발표자로서 참석했다.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매콜은 물론 당시 잔뜩 긴장하고 경험도 일천했던 나도 기억하기 힘들다. 영화관을 넘어서는 대안적 형태와 관람성을 모색한 확장영화의 선구적 사례를 개척한 매콜의 첫 전시는 국내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에 중요한 행사이자 15년 동안 관련 연구를 축적해온 나에게도 의미 있는 기회였다. 개인적인 존경의 분위기를 애써 일소하지 않으면서도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의 독자에게 매콜의 역사적 궤적과 현재의 예술적, 지적 관심을 영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개인전 준비 마무리에 한창이었던 매콜과 인터뷰를 진행했다(5월1일부터 9월7일까지 푸투라 서울에선 미디어아트, 복합예술의 거장 앤서니 매콜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 이 진행 중이다).
- 당신은 그래픽디자인과 사진을 공부했던 1970년대 초 영화작업을 시작했다. 관습적 의미와는 다른 영화제작을 실험하게 된 두 가지 영향을 생각할 수 있다. 런던영화인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구조-유물론적 실험영화와 북미의 구조영화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지속과 과정, 퍼포먼스를 통해 매체, 예술작품, 작가, 관객, 미술관 공간의 전통적 정의와 경계를 근본적으로 질의한 미니멀리즘, 포스트-미니멀리즘 해프닝, 장소-특정적 미술 등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이 있었다. 1970년대 초 <불의 풍경>(1972), <불의 풍경 II>(1972) 등 ‘화재 작업’(fire work)이라 불릴 만한 일련의 장소-특정적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그 과정을 사진이나 영화로 기록했다. 이 작업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나.
당신의 말처럼 나는 작가로 작업을 시작했다. 1972년부터 2년에 걸쳐 5개 또는 6개의 불을 풍경에 일정한 도식에 따라 지르는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했다. 퍼포먼스는 끝나고 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기록(documentation)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제기했다. 그래서 화재 작업을 다루는 방안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불의 풍경>의 영화 버전은 내가 배운 방식으로 제작했다. 편집을 배우면서 7분 길이의 영화를 완성했고 친구와 동료들에게 이를 보여줬다.
그 무렵까지 나는 미국 전위영화, 특히 앤디 워홀과 마이클 스노의 영화에 흥미를 가졌고 영국의 구조-유물론 영화에도 익숙했다. <불의 풍경>의 영화 버전이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내게 우선 중요한 것은 퍼포먼스였고, 영화제작이 일차적 사건에 대한 이차적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면서 퍼포먼스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퍼포먼스로서의 영화’(film as performance)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가장 널리 알려진 <원뿔을 그리는 선>(1973)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2004년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 작품을 비롯한 일련의 ‘원뿔 영화’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술계에서 작업을 분류할 때 매체를 통해 분류하는 것보다는 조각, 회화, 영화라는 세 가지 큰 담론의 묶음과 관련하여 분류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1970년대와 21세기의 ‘솔리드 라이트’ 영사 작업, 그리고 이와 관련된 드로잉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약이라고 생각한다. 솔리드 라이트 작업과 이와 같은 공식에 대해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한다.
앞서 말한 퍼포먼스로서의 영화는 영화를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연장되었다. 나의 대답은 관객이 스크린에서 등을 돌려 영사기를 바라보고 영사기 광선의 부피감에 관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화에 관한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영화적인 질문은 한 줄기 광선과 같은 답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두개의 영역으로 이어졌다. 하나는 퍼포먼스였는데, 관객이 스스로 보는 행위 속에서 퍼포머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뿔 영화가 3차원적 대상이었기에 조각의 영역 또한 가져오게 됐다. 조각의 대상을 이해하려면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이런 요소들을 원뿔 영화를 구상하면서 꼼꼼하게 계획해나갔는데, 보통 종이에 악보를 그리는 방식으로 계획하여 리허설 없이 구현했다. 미술계를 보면 회화와 조각 이외에도 영화적인 것이 있다. 영화적인 것은 회화와 조각 사이에 있으며, 이 두 영역이 완전히 소홀히 다루었던 시간과 관련된 모든 것, 이를테면 운동, 춤, 소리, 시, 언어 등을 다룬다.
- 많은 관객은 솔리드 라이트 필름의 실제 작업 과정, 그리고 완성된 영화에서 드로잉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궁금해할 수 있다. 솔리드 라이트 필름은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스크린 이미지이기도 한 선의 드로잉이 있고, 드로잉을 영사기로 공간에 영사하면 부피감 있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새로운 솔리드 라이트 작업을 구상할 때마다 결국 선 드로잉의 형상으로 돌아가서 그 드로잉의 움직임을 이루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 70년대에는 애니메이션 스탠드에서 아날로그 16mm 필름으로 작업했고, 요즘은 알고리듬을 생성하는 컴퓨터프로그램으로 작업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은 같다. 즉 애니메이션은 내 작업의 핵심적인 기술적 프로세스다. 선으로 그린 그림을 영사하고 안개나 먼지를 추가하면 3차원 물체로 보이게 된다. 따라서 안개와 먼지가 공기 중에 있고 영사가 실행되기 전까지는 2차원적인 애니메이션이 있을 뿐이다.
- <원뿔을 그리는 선> 이후 <네대의 영사기를 위한 긴 영화>(1974), <네개의 영사된 악장>(1975), 그리고 영사기와 필름 없이 24시간 동안 조명과 흰 종이로 덮인 창문, 두 페이지의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로 이루어진 <앰비언트 라이트를 위한 긴 영화>(1975)를 완성했다. 이 세 작품이 솔리드 라이트 필름과 구별되는 점과 연결되는 점은 무엇인가.
앞의 두 작품은 4개의 영사기가 사용된 솔리드 라이트 필름이다. 영사기 네대가 정사각형을 이루며 배치되고 광선이 서로 교차한다. 이 두 작품의 아이디어는 무엇보다도 방을 떠나지 않고는 빠져나올 수 없는 영화라는 점이다. 관객이 방 안에 있으면 영화 속에 있는 것인 셈이다. 또한 관객이 어디에 서 있고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인지에 대해 절대적인 재량권을 가지게 된다. <네대의 영사기를 위한 긴 영화>에 적용된 6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관객은 그 작품을 내내 볼 수도 있고 어느 시점에서든 관람을 시작하고 떠날 수 있다. 관객(audience) 대신 방문자(visitor)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네개의 영사기를 위한 긴 영화> 이후 1년 만에 만든 <네대의 영사된 악장>은 15분 길이의 필름이 들어간 4개의 영사기를 영사가 끝난 후 되감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다시 영사하여 네개의 악장을 변주했다.
<앰비언트 라이트를 위한 긴 영화>의 경우 12명 정도의 작가가 참여한 행사에 초대받았는데, 각 작가가 24시간 동안 뉴욕의 한 거대한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고 그 공간의 꼭대기 층에는 경사진 지붕이 있고 창문이 줄지어 있었다. 창문은 필름스트립을 떠올리게 했고 전구는 영사기를 떠올리게 하는 등의 몇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하다가 영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공간 한가운데 전구가 매달려 있고 밤에는 전구의 조명이 투영되었다. 창문이 스크린이 되고 낮에는 햇빛이 들어와 영사기가 되었다. 은유적으로, 여러 방식의 영화가 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을 구상할 당시 화가 친구들과 논쟁이 있었는데 그들은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열등한 것이며 진지한 예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이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를 썼고 벽면에 게시했다. 영사기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솔리드 필름과는 다르지만 나는 그 작품도 솔리드 라이트 필름 중 하나로 꼽았다.
- 약 20년 동안 영화계와 예술계에서 멀어지고 생계를 위해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다가 21세기 초 다시 솔리드 라이트 작업으로 돌아왔다. 이에 관해 당신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조각 효과”를 만드는 연무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외에도 고화질 디지털 프로젝터와 프로그래밍 알고리듬의 발명이 확장영화로 복귀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된 것 같다. 이외에도 영화와 조각,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21세기 들어 재개할 수 있었던 다른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작업을 그만뒀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든 갤러리에서 서서히 영상 작품에 관심을 갖고 상영하고 전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요한 제도적 변화다. 기술적 변화도 작용했다. 1970년대 솔리드 라이트 작품을 구현했던 낡은 다락방, 공장 등의 공간은 먼지가 가득해서 3차원의 광선을 보여주기 쉽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먼지를 충분히 저어서 빛이 비칠 수 있는 작은 입자를 만들어야 했고, 10명 이상의 관객이 항상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1976년 스웨덴 룬드의 매우 깨끗한 새로운 미술관에서 초대받아 이 작품을 구현했을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광선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나가서 담배를 산 뒤 연기를 피웠고 향을 피워보기도 하고 드라이아이스도 써봤으나 효과가 없었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깨달았는데 당시엔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1990년대에 알게 된 연무기는 안개처럼 얇은 증기를 활용하여 영사된 빛을 관객이 손으로 포착하기에 딱 알맞은 양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장비의 가장 큰 장점은 작고 휴대가 간편하며 거대한 방을 가득 채울 수 있고, 10m 높이의 거대한 방에서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연무기는 자주 언급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요소다.
- 21세기의 솔리드 라이트 작업과 더불어 당신이 어떤 새로운 형식적, 미학적 탐구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예를 들어 <회귀>(2003), <대면>(2013), <찰나의 거울>(2018)에서는 거울을 사용하여 빛의 평면을 재배치했다.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2006)와 <5분의 순수 조각>(2012)에서 당신은 프로젝터를 관객의 머리 위에 수직으로 배치하여 전시 공간 바닥에 빛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선을 영사하기도 했다. 2004년 인터뷰에서 당신은 <회귀>가 “원과 직선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파형에 대한 새로운 탐구에서 시작됐다고 언급했다.
작업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1970년대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이전의 솔리드 라이트 필름, 특히 <가변 부피의 원뿔>(1974)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10분 길이의 이 작품에서는 원이 네 가지 방식으로 수축하고 팽창하며 애니메이션 효과를 만든다. 때로는 매우 빠르게, 때로는 매우 느리게 변화하면서 말이다. 1990년대 후반 이 작품을 다시 생각하면서 1970년대에는 몰랐던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형태가 숨을 쉬고 있다는 호흡의 개념, 그리고 추상적, 기하학적 형태가 신체를 설명하거나 암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2004년에 제작한 <숨> 연작이 그런 아이디어를 반영했다.
1970년대에는 직선과 원으로만 작업했지만 <회귀>와 더불어 전통적인 관심을 새로운 데이터 기술과 컴퓨터그래픽으로 효과적으로 이전하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시뮬레이션으로 파도 형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전통적인 컴퓨터그래픽에 속하며, 여기서는 파도를 계속 형태를 바꾸는 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원이 파도를 형성하고 그 원 위로 왔다가 갑자기 형태를 바꿔 다른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컴퓨터로 완전히 새로운 곡선을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아이디어로 사용하고 있다. <대면>에서는 두대의 프로젝터를 가져와 이들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설치했다. 그래서 한쪽 프로젝터에서 다른 쪽 프로젝터로의 부피감 있는 형태를 들여다보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선의 드로잉을 함께 볼 수 있다. 2차원의 선과 3차원의 부피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변화는 수직성으로의 확장이다. 나는 21세기에 들어 가로형 영사 작품과 세로형 작품을 모두 만들고 있는데 세로형 작품이 새로운 느낌을 준다. 수직적 형태는 수평 형태와 높이와 길이가 거의 같기에 스케일의 차이가 없지만, 투영된 모습을 보면 절대적으로 거대해 보이고 조각적인 관념을 제안한다. 수평적인 작품을 조각 용어로 와상이라고 한다면 수직적인 세계는 입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서 있는 몸을 암시한다. 수직적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참조는 건축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광선에는 종종 틈새가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출입구처럼 여기며 단단한 부분을 통과하기보다는 틈새를 통과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다.
- 1990년대 중반 이후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전시되거나 상영되는 많은 영화적 작품이 ‘아티스트 필름’, ‘아티스트 시네마’, ‘무빙 이미지’라는 명칭으로 분류되었고, 이는 솔리드 라이트 작업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 2003년에 당신은 영화계와 미술계가 “DNA의 모양과 같은 이중나선처럼 서로 밀접하게 돌지만 만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언급했다. 지금은 이 두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또한 1970년대 솔리드 라이트 필름의 관객인 실험영화 작가들과 미술작가들과는 매우 다른 지금의 관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새로운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해졌고, 더이상 영화 제작자와 미술작가가 서로를 중심으로 선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지속적으로 이용 가능한 탈중심화된 미디어의 바다가 있고, 예술계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닌다. 설명하기는 매우 복잡하지만 우리는 이제 내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며 외부에서 이를 볼 수조차 없다. 1970년대에는 다른 예술가와 영화 제작자만 수십명이 모여서 서로에게 서로의 작품이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늘날 내 전시를 보러 오는 다양한 많은 관객의 존재는 놀랍다. 이제 예술은 과거에 상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대중화되었다. 아트페어가 생겨났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모든 종류의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 그와 같은 배경 속에서 오늘날의 관객은 어린아이부터 성인, 지식인, 힙스터 할 것 없이 긴 관람 시간을 갖는다. 관객은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30분까지 작품에 머무르기도 한다.
- 당신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한국의 관객을 위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시를 안내할 도슨트에게 적어준 메모로 대신하고자 한다. “전시장을 찾는 개별 방문객이 일시적(ephemeral)인 3차원의 작품 각각을 선뜻 받아들이기를,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주변을 돌면서 스스로 느리게 이동하고 변화하는 형태들을 통해 그 작품을 탐구할 만큼 충분히 편안함을 느끼기를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