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은 바야흐로 이준영의 봄날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에 공개된 <멜로무비>를 시작으로 <폭싹 속았수다>와 <약한영웅 Class 2>가 연달아 큰 호응을 얻었고, 각 작품 속 이준영의 호연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준영의 얼굴과 이름을 재확인하게 만들었다. 그는 <부암동 복수자들>의 수겸 학생이자 <D.P.>의 탈영병이었고, <마스크걸>의 데이트 폭력범인 동시에 <모럴센스>의 순박한 마조히스트였다. 새삼스럽지만 이준영은 보이 그룹 유키스로 데뷔했고, 배우 활동 중에도 얼마간 아이돌 생활을 병행했다. 그렇게 이준영이 지난 9년간 축적한 필모그래피는 배역에 완전히 동화돼 자신의 개성을 지울 줄 아는, 카메라 밖 자아를 작품 안으로 틈입시키지 않는 20대 남성배우의 탄생을 입증했다. 현재 KBS2 수목드라마 <24시 헬스클럽>을 통해 코미디 근육까지 과시 중인 이준영이 <씨네21>을 찾았다. 여름의 초입, 이준영이 회상하는 지난봄과 채비 중인 한여름의 계획을 전한다.
- 지난 4개월간 연달아 네 작품이 공개됐고 각 작품이 흥행한 것은 물론 배우 이준영의 연기가 모두 화제를 모았다.
교만해지지 말자고 끊임없이 되뇐다. 이런 반응이 올 줄 예상치 못했고, 이런 반응을 경험해본 적도 드물다. 작품들이 공개되기 이전 이준영의 초심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 금성제, 박영범 등 캐릭터의 이름을 시청자에게 각인했다는 점도 주요한 변화다.
내 얼굴을 다방면으로 활용해 사람들에게 혼란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직업의 장점 아닐까. “이 배우가 얘였어?”라는 반응을 어느 때보다 많이 접하고 있어 배우로서 뿌듯하다.
- <폭싹 속았수다>와 <약한영웅 Class 2>, <나는 대놓고 신데렐라를 꿈꾼다>를 동시에 촬영했다고. 주변에서 만류했을 법한 업무 강도인데 각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가 분명했나 보다.
“준영씨만 괜찮다면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말씀해준 제작진의 양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스케줄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내가 그들의 세상에서 쓰임이 확실하다면 몸이 고단한 건 나중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 당시에 연기도, 제안받은 작품들의 대본도 하나같이 재밌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하는 흥미와 도전정신, 약간의 걱정을 안고 촬영을 마쳤다.
- 복잡한 스케줄을 오가는 동안 혼란은 없었나.
캐릭터들이 시대도, 계급도, 나이도 전부 다르다 보니 이동할 때마다 상기하는 과정이 필수였다. 한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이동할 때 보통 서너 시간 정도 소요됐다. 차에 타자마자 대본을 점검하고 이전에 찍어둔 촬영본을 모니터링하며 감정선을 복기했다. 30분 정도 쪽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한 후 근처 사우나에서 급히 씻고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 기회에 스태프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맛집도 많이 다녔다. 힘들지만 전국을 여행하니 재충전이 되더라.
- 이전에는 연기 모니터링을 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배우 생활 초창기에 모니터링을 하던 중 연기가 아닌 카메라에 비친 얼굴을 신경 쓰는 나를 발견했다. 배역에 대한 존중이 없어지는 것 같아 이후엔 모니터링을 잘 하지 않는다.
액션과 컷 사이에선 무얼 해도 합법이다
- <폭싹 속았수다> 속 금명(아이유)과 영범의 이별 신이 명장면으로 널리 회자됐다. 7년을 사랑했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품 내에서 두 사람이 연애하는 장면은 적다. 묘사되는 순간이 적을수록 장면마다 감정을 켜켜이 쌓아올리는 일이 배우에게 요구되는 몫일 터. 이별 신에 이르기까지 영범의 감정선을 어떻게 세분화하고 구체화했나.
서로 툴툴대거나, 떠나려는 금명을 영범이 붙잡는 식의 장면이 많다 보니 둘의 사랑을 상상으로 채워야 했다. 그래서 아이유 배우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자주 시간을 보내며 둘의 관계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가까운 사이만이 보일 수 있는 말투, 표정, 몸짓 등을 함께 연구했다. 영범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감정의 강도를 수치화하는 작업도 많은 도움이 됐다. 이를테면 이 신에선 10만큼, 다음 신에선 30만큼 영범이 감정을 표출하는 식으로 감정에 점수를 매기고 나니 나아갈 길이 보다 명확해졌다. 이별 신을 찍을 때 어쩐지 영범의 눈이 슬픔으로 퉁퉁 부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분장으로 만들 수 없는 눈이라 차 안에서 미리 10분쯤 엉엉 울고 카메라 앞에 섰다.
- 완전한 선인도 악인도 없는 것이 임상춘 월드의 특징 아닌가. 이 점을 임상춘 작가가 주지하던가.
별다른 코멘트는 없었다. 다만 작가님이 “준영 씨가 잘해줄 거라 믿어요”라고 말씀해준 적은 있다. 작가님의 작품을 전부 재밌게 본 입장에서 이 응원이 약간 부담으로 다가왔다. 촬영 전엔 내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촬영 후엔 내가 만족할 만한 연기를 못한 것 같아 후회한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만큼은 그 부담이 사라진다.
- 오히려 연기하는 순간에는 상념이 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액션’과 ‘컷’ 사이에선 정해진 약속만 지키면 무얼 해도 합법이지 않나. 그래서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기려는 마음이다. 캐릭터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찰나의 자유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 영범을 연민하게도 되던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여자가 첫사랑이고, 그 여자와 자신의 생일날 헤어진다. 어쩌면 가장 비참한 결말에 놓인 인물이다.
늘 금명을 그리워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날을 반복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흘러 50대가 된 영범이 어머니에게 만족스럽냐며 원망을 퍼붓는 장면을 찍을 땐 실제로 몸 한구석이 얼마간 아팠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영범을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동정할 만한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새로웠다. (웃음)
- <약한영웅 Class 2> 속 ‘연금대전’이라 불리는 연시은(박지훈)과 금성제의 액션 시퀀스가 큰 화제였다.
5일 정도 나누어 촬영했다. 첫 사흘은 연속해 찍고, 마지막 이틀은 얼마간 간격을 두고 촬영했다. 오래 싸우다 보면 성제도 지칠 테니 기진한 듯한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대기시간마다 뜀뛰기를 하는 등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특히 시은과 싸울 때 성제가 느낄 법한 희열에 집중했다. 성제가 현탁(이민재)과 싸울 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현탁이 전투 불능 상태에 놓이자 최소한의 관심마저 거둔다. 그런데 시은과 싸울 땐 내내 웃는다. 성제 또한 이렇게까지 사력을 다해 싸울 기회를 고대했다는 태 도로 임했다.
- 한준희 감독은 언제나 이준영의 댄서 경력이 액션에 도움을 준다고 평가하더라.
인터뷰마다 감독님이 그 말씀을 하시는데, 동의할 수 없다. (웃음) 실제 춤처럼 액션을 하면 오케이 안 하실 거다. 순서를 외우거나 리듬감을 요하는 동작이 비슷할 순 있겠다. 춤과 달리 액션은 실제로 주먹이 오고 간다는 타격감이 있어야 하지 않나. <D.P.>를 찍을 당시 내 주먹이 가짜처럼 보이는 게 아쉬워 이종격투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 “낭만 합격”은 어땠나. 대사만 봤을 땐 막막했을 것 같다.
쉽지 않았지만 그 대사를 누가 받는지를 생각하니 어렵지 않았다. “낭만 합격”은 준태(최민영)의 투지에 감화된 성제의 감정이다. 그래서 준태에게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 “낭만 합격”의 촬영도 준태의 혈투 시퀀스 이후에 이루어졌다. 현장에 머물며 앞 촬영을 함께 지켜봤다. 준태와 최민영 배우에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 배역으로서 인물을 응시할 때 어떤 점을 유의하나. 금성제를 예로 들면 나백진(배나라)을 바라볼 땐 눈에 초점이 없는 반면 연시은을 바라볼 땐 눈에 살기가 형형하다.
백진은 언제든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백진이 아무리 군림하려 들어도 성제는 백진 밑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연기하니 눈에 초점이 자연스레 없어졌다. 반면 시은은 성제에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차지하고 쟁취하고 싶은 상대다. 그런데 시은을 가질 수 없으니 성제가 얼마나 애가 탔겠나. (웃음) 눈이 돌 수밖에 없다.
- <멜로무비>의 오충환 감독이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네 캐릭터의 감정 진척 속도가 전부 다른데, 그중 시준의 속도가 가장 느려 연출자로서 걱정했다고 한다. 배우 본인도 유사한 고민을 했을까.
이미 관계가 일단락된 상황에서 시작하는 멜로는 처음이라 쉽지 않았다. 시준이 쉽게 내보이지 않는 무뚝뚝한 감정이 작품 후반부에 해소되기 위해 내 연기가 어떤 설득력을 지녀야 할지 감독님은 물론 전소니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히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준을 바라보는 게 한결 편해졌다.
- 시준과 주아(전소니)의 사랑에 집중한다면 <멜로무비>는 두 연인의 이별 방도에 관한 연애담이다.
시준과 영범은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헤어진 연인은 지난 사랑을 털어내고 자기 삶을 살고 있는데, 이 남자는 과거에 매몰돼 현재의 삶마저 제대로 살지 못한다. 그 감각 때문에 또 한번 아팠다. 지금껏 연기한 배역 중에 시준이 가장 세심한 남자였다. 그 세심함을 사람들이 잘 몰라준다. 대사 중 “남들이 그만두라 하기 전에 내가 내 주제를 알고 그만둬야지”는 보자마자 과거의 내 맘 같아 대본을 읽을 때부터 눈물이 났다. 자존감이 바닥이라 그렇지 우리 시준이, 예쁜 구석이 있는 놈이다.
- 현재 방영 중인 <24시 헬스클럽> 속 도현중을 통해 작심하고 코미디 연기를 보이는 중이다. 웅장한 저음과 잔뜩 기합이 들어간 말투를 구현했다.
실제 헬스트레이너인 친구의 특성을 역이용해 만든 캐릭터다. 가늘고 높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친구인데 그 목소리로 운동을 가르칠 때 재밌길래 이 모습을 반대로 가져가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친구에게 저음으로도 말해보라고 한 후 그 톤으로부터 현중의 목소리를 만들어갔다. 현중이 워낙 개성이 넘치기 때문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잡아야 이 캐릭터를 우주로 날려보내지 않고 땅에 묶어둘 수 있었다.
- <모럴센스> 때도 한 차례 증량한 바 있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몸을 한껏 키웠다.
나를 포함해 정은지, 이미도, 이승우 배우 모두 촬영 내내 운동 스케줄과 식단을 철저히 준수하는 훈련의 시간을 보냈다. 보통 촬영 중엔 맛집을 가거나 맛있는 음식을 싸오기도 하는데, 이번 촬영 땐 모두가 식단을 관리하는 바람에 다들 도시락에 닭가슴살밖에 없더라. 대기 중에도 실제 세트가 헬스장처럼 만들어졌으니 내내 운동만 하고. (웃음)
춤추고 그림 그리며 삶을 즐긴다
- 댄서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한창 쓰다가 중단한 것으로 안다.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이야기가 아쉽진 않나.
전혀.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아직 글 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야기를 만들기엔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기도 하고. 기회가 된다면 시나리오 작법을 제대로 배워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다.
- 댄스 중에도 프리스타일을 특히 선호한다고 들었다. 연기를 할 땐 대본과 디렉션 등 정해진 규칙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춤을 출 때만큼은 제약이 덜한 프리스타일을 선호하는 건가.
처음 듣는 노래에 맞춰 프리스타일 추기를 즐긴다. 아이돌 활동 시절엔 짜인 군무를 추다 보니 내 만족과 내 멋에 따라 움직이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프리스타일이 좋다. 4분여의 시간을 온전히 내 몫으로 누릴 수 있으니까. 올해 초에도 프리스타일 힙합 배틀에 출전했다. 많이들 배틀이 댄서간 결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춤꾼 사이의 소통이자 교류라 보는 편이 정확하다. 상대가 선호하는 무브먼트, 동작에 따라 선호하는 음악을 어떻게든 눈에 담고 이를 연습실에서 내 방식대로 소화하는 과정이 즐겁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탈출구다.
- 입대 전 앨범 발매를 준비 중이라고. 모처럼 가수 이준영도 볼 수 있는 건가.
회사 A&R팀과 함께 열심히 회의 중이다. 곡도 많이 받았다. 이준영의 라스트 댄스랄까, 이 앨범으로 마지막 불꽃을 불태워 후회 없이, 미련 없이 20대를 보내주려 한다.
- 그렇다면 이번 여름엔 앨범 준비로 보낼 예정인가.
사실 곧 차기작을 확정할 예정이다. 열심히 작품을 촬영하며 나다운 날들을 보낼 계획이다.
- 이준영다운 게 뭘까.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불편하지 않아요?”다. 정말 달라진 건 그 점 하나다. 내 얼굴을 알아보는 분들이 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나의 일상을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지는 못한다. 여전히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춤추고 그림 그리며 삶을 즐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