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 인물의 부피감이 돋보이는 영화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마주한 지수와 선아는 어땠나.
정지인 처음에는 선아가 모호한 사람처럼 다가왔다. 분명 성격은 확고한데 어딘가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감독님과도 너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게 그리자고 이야기했다. 선아는 사회의 벽에 부딪히면서 자신이 중심을 잃어가는지조차 모르는 인물이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주변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그런 선아의 위기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오우리 언니가 선아를 모호하게 여긴 것과 달리 내게 지수는 선명한 인물이었다. 학창 시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보이기보다 숨기를 선택한 지수에게는 자기 내면의 문제가 중요했다. 사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정작 큰 걱정거리는 지수의 부산 사투리였다. 충청도 출신인 내게 사투리 연기가 큰 도전이었다.
정지인 정말 잘했는데. 우리가 대본의 글자마다 악보처럼 빼곡하게 (억양을) 그려서 열심히 준비했다.
오우리 아닌데. (웃음) 언니와 감독님도 부산 사투리를 쓰시고, 촬영지도 부산이라 스태프 분들도 부산 출신이 많았다. 문장마다 직접 녹음도 해주시고 현장에서 바로 피드백을 주신 덕에 큰 힘이 되었다.
- 한창 영화를 찍던 당시 두 배우의 실제 나이가 극 중 인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기 호흡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오우리 지수가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한 것처럼, 나도 이른 나이에 서울로 향했다. 지수가 올라오는 동안에 겪었을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두려움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정지인 우리가 정말 사촌 동생처럼 느껴졌다. 촬영 전부터 감독님이 배우들끼리 자주 만나 가까워질 수 있도록 힘썼는데 그 덕에 둘 다 낯을 가리는 성격임에도 친밀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오우리 실제로 언니한테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든든함이 느껴졌다. 같이 촬영하면서 양푼에 비빔밥도 같이 비벼먹을 정도로 가족 같았다.
- 선아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이지만 지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있다. 상처의 시차는 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정지인 상처를 안고 치열하게 견뎌낸 경험을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위로가 있다. 상처를 이미 겪은 지수였기에 선아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고, 선아도 지금 위기를 겪고 있기에 더 확실하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오우리 지수에게 상처를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극복의 경험이라 생각한다. 지수가 모텔 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는 장면은 고민을 나누는 게 아니라 선언에 가깝다. 직접 자신을 드러내면서 확신을 얻고 스스로에 대해 정리하는 기회였다.
- 선아 부모님에 대한 언급을 통해 두 사람이 과거에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근데 정작 지수는 오랜만에 본 선아에게 낯설다고 말한다.
정지인 지수가 모텔에서 그 말을 폭탄 던지듯 내뱉을 때 선아는 무너지고 만다. 머리를 한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자신을 항상 멋진 언니라며 롤모델로 꼽던 동생의 폭탄선언에 선아는 자신의 중심을 되짚게 된다. 지수가 선아를 살리게 된 셈이다.
오우리 지수 입장에서 선아가 낯설어진 이유는 결국 생각이 달라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선아가 지나치게 현실에 목을 매고, 매사에 예민하게 구니 더욱 낯설게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지수의 생일을 맞아 모인 자리에서 선아는 지갑에서 대충 돈 몇푼을 꺼내 선물이라고 건네지 않나. 그 부분이 정말 싫었다.
정지인 그건 내가 겪었어도 되게 서운했을 거야.
오우리 한순간에 언니가 대문자 T가 됐다. 그런 돈은 정말 받기 싫다.
- 로드무비의 매력은 출발할 때와 도착할 때 서로가 달리 보인다는 점이다. 예상 밖의 하루를 보내면서 선아는 지수가, 지수는 선아가 어떻게 보였을까.
정지인 동생이고 친구인 줄만 알았던 지수가 큰 힘을 준 것에 대한 감정이 가장 크지 않을까. 선아 입장에서도 지수가 성숙해가는 중이란 사실이 참 다행이라고 느꼈을 것 같다.
오우리 마침내 자신이 알던 선아가 돌아왔다는 안도감 아닐까. 영화는 일련의 사건을 겪고 결국 다시 해맑게 웃는 선아의 얼굴을 보여주며 끝난다. 어릴 적 사진작가를 꿈꾸며 다정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선아의 시선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 영화가 허락한 위로와 치유는 편히 잠드는 시간이다. 평소에 위안을 얻기 위해 따로 보내는 시간이 있나.
정지인 예전에는 취미 생활을 통해 해소할 창구를 찾았다.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도피처가 되었다. 요즘은 일상을 무난하고 흔들림 없이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위안이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또 일상이 어떻게 하면 평온한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감정적으로 흔들려도 내일은 오늘과 똑같이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또 하루를 버티게 한다.
오우리 나도 똑같다. 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 보니 애먼 일을 하면서 소진되는 느낌이 들더라. 최근에 뒤늦게 대학교로 돌아간 후로 규칙적으로 수업을 듣고 주어진 일을 차근히 수행하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하루하루 작은 성취감을 얻는 삶에서 안정감과 힘을 얻게 되는 것 같다.
- 영화는 선아, 지수, 보미(박보람)의 해맑은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특히 1년 전에 작고한 박보람의 미소가 첫 장편 데뷔작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더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정지인 보람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사람들이 오래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얼마 전 우리랑 감독님과 함께 보람이를 보고 왔다. 웃는 모습이 예쁜 줄 알았지만 새삼 더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다. 보람이는 무심한 듯 따뜻하게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합숙할 때 일이었는데, 잘 준비를 하던 중에 보람이가 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양배추즙을 한 아름 가져와서 먹으라고 건네주더라. 그러곤 잘 자란 인사만 남기고 쏙 들어가던, 그런 예쁘고 따스한 친구였다.
오우리 나도 언니랑 같은 기억이 있는데. (웃음) 지인 언니는 촬영 막바지에 받았다는데 나는 촬영 초반 부산에 내려온 날 받았다. 갑자기 자기 방으로 오라는 연락이 와서 가보니 언니가 받았던 그 양배추즙을 건넸다.
정지인 잠깐만. 너도 받았어? (웃음)
오우리 어색하게 ‘어어’ 하면서 받았다. (웃음) 피부가 건조한 것 같다고 하니 보습 크림을 무심하게 툭 던져주던 기억도 난다. 따뜻한데 털털한 사람이었다. 영화 속 보미를 보면서 보람 언니 안에도 그런 모습이 있는 것 같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보고 싶다.
- 두 배우의 올해 계획이 궁금하다.
정지인 6월부터 신촌극장에서 올릴 연극을 연습 중이다. 중심을 계속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최근에는 애니메이션 모션 캡처에 도전해봤다. 처음 경험하는 분야임에도 너무 재밌게 촬영에 임했다. 어떻게 완성될지 기대가 된다.
오우리 올해 가장 큰 소식은 학교에 돌아가서 졸업 작품을 찍는다는 것이다. 올해는 꼭 졸업하는 게 목표다. 지금은 한창 프리프로덕션 단계다. 두려우면서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