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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78화 칸영화제 개막 리포트
김소미 2025-05-16

개막식 직전, 뤼미에르 대극장 앞 계단을 오른 경쟁부문 심사위원들.

제78회 칸영화제는 화려함보다는 불편함을 택했다. 장기화된 전쟁, ‘뉴 스트롱맨’ 시대가 만들어낸 세계적 불안 속에서 열린 올해 칸은 영화제가 동시대 정치와 예술의 접점을 성찰하는 공간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자 한다. 심사위원장 쥘리에트 비노슈를 필두로 한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단은 인도 감독 파얄 카파디아, 이탈리아 배우 알바 로르바케르, 미국 배우 핼리 베리와 제러미 스트롱, 모로코계 프랑스인 작가이자 활동가인 레일라 슬리마니, 멕시코 감독 카를로스 리에가다스, 차드 다큐멘터리스트 디외도 아마디, 그리고 홍상수 감독으로 구성됐다. 이들의 첫 공식 석상인 개막 기자회견 직전 벌어진 두개의 사건이 질문 공세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먼저 개막 전야에 가자 지구 출신 예술가 파티마 하수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할리우드 및 유럽 영화계 인사 350여명이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을 통해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공습으로 일가족 10명과 함께 목숨을 잃은 하수미는 올해 칸 사이드 섹션인 ACID에서 공개될 세피데 파르시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조명하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한 <알자지라> 기자는 쥘리에트 비노슈가 이 서한에 서명하지 않은 이유를 집요하게 물었고 비노슈는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같은 날 프랑스 법원은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에 제기된 2021년 영화 촬영 현장에서의 성추행 혐의에 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하비 와인스틴과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주요 인사였던 칸의 역사를 의식한 비노슈는 이렇게 답변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제는 이제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학대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이해한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기다.” 구성원 절반이 여성인 2025년의 심사위원 성비를 비롯해 마이웬, 다이앤 커리스, 에마뉘엘 베르코 이후 네 번째로 여성감독을 개막작으로 초청했고, 경쟁부문에는 역대 최다 기록인 7명의 여성감독이 포함된 점 또한 비노슈가 언급한 변화의 연장선상이다.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한 배우 로버트 드니로.

개막식에서 관객의 감정을 움직인 것은 반세기 가까이 예술영화를 움직여온 두 배우의 영화적 유산이었다. 심사위원장 소개 전 상영된 푸티지에는 레오스 카락스, 클레르 드니, 미하엘 하네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등과 작업한 비노슈의 업적이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색: 블루> O.S.T와 함께 펼쳐졌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만 15살의 자신을 처음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추천한 로버트 드니로를 향해 감동적인 헌사를 전했다. 명예황금종려상 수상자 드니로의 소감은 개막 기자회견에서부터 시작된 예술의 정치성에 관한 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성명과 같았다. “우리의 무지한 대통령은 자의적으로 주요 문화 기관의 수장을 임명했고 예술·인문·교육 분야의 예산을 삭감했으며, 이제는 미국 외의 국가에서 제작된 영화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 우리는 단순히 관람석에 앉아 있을 수 없다. 행동해야 한다. 지금 당장. 폭력이 아닌 강한 열정과 결단력으로.”

경쟁부문 심사위원 기자회견. 디웨도 아마디, 쥘리에트 비노슈, 홍상수, 핼리 베리, 카를로스 리에가다스(왼쪽부터).

올해 칸 개막작은 1980년대 프랑스 팝이 간간이 끼어드는 달콤한 주크박스 뮤지컬 코미디였지만 경쟁부문 상영작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을 응시하고 있다. 개막 이튿날 경쟁작 중 첫 순서로 프리미어를 마친 마샤 실린슈키 감독의 <사운드 오브 폴링>은 MK2와 칸이 일찌감치 선택한 작품으로 소문나면서 마켓과 평단의 고른 주목을 받았다. 어느 독일 농가를 배경으로 세 개의 시간대를 오가는 쉴린스키의 첫 칸 경쟁부문 데뷔작은 전쟁과 폭력의 상흔이 시공간을 관통해 여성의 원초적 체험으로 대물림되는 순간을 정신적 체험으로 치환해낸 실험적 드라마다. 우크라이나 감독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두 검사>는 1937년 스탈린 공포정치하의 소련을 그린다. 비밀경찰(NKVD)의 만행을 고발하는 이의 혈서 한통을 받고 진실을 추적하는 신임 검사 코르니예프의 여정을 풍자적으로 조명하는 사법극이자 관료주의 블랙코미디다. 공교롭게도 모든 일반 관객에게 열린 해변 상영작으로 개막식 밤을 수놓은 테런스 맬릭의 <히든 라이프>(2019)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나치 체제하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던 양심적 병역거부자 프란츠 예거슈테터의 실화를 그린 영화다. 올해 칸의 시작은 이토록 선명하게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로버트 드니로의 수상 소감의 마지막 한마디)로 향했다.

올해 한국에서 주목할 만한 이름들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사이드 섹션에서는 앞서 단편 <먼지아이>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진출했던 정유미 감독이 이번엔 신작 <안경>으로 비평가주간(프랑스 비평가협회 주관) 단편 경쟁부문에 진출해 역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전작 <연애놀이>에 이어 이번에도 절제된 연필 드로잉으로 자기 이해로 향하는 여성의 내면적 여정을 따라간다. 학생영화 부문인 라 시네프 섹션엔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허가영 감독이 올해 열린 졸업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보이기도 했던 단편 <첫여름>이 초청됐다. 손녀의 결혼식 날 남자 친구 학수(정인기)의 49재에 가고 싶어 하는 노인 영순(허진)의 이야기다. Apple TV+ <마지막 해녀들>을 촬영한 조은수 감독은 세계 영화산업에 공헌한 촬영감독에게 헌정상을 수여하는 피에르 앙제뉴 트리뷰트에서 차세대 촬영감독을 조명하는 스페셜 인커리지먼트 수상자로 선정됐다. 줌 렌즈의 명성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광학기기 제조사 앙제뉴가 주관하는 시상식이다. 조은수 촬영감독은 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 후 USC를 거쳐 한국, 미국에서 활동해왔다.

<사운드 오브 폴링> 프리미어 상영.

미국 독립 배급사 네온의 5년 연속 황금종려상 수상 기록이 올해에 경신될지 전망하는 예측 또한 열띠다. 2019년 <기생충>부터 2024년 <아노라>까지 매해 수상작을 배출한 네온은, 올해도 쥘리아 뒤쿠르노의 <알파>와 요아킴 트리에르의 <센티멘털 밸류>로 다시 경쟁에 나섰다. 각본 단계에서 작품을 확보하고, 칸을 오스카 전략의 출발점으로 삼는 치밀한 운영 방식이 많은 유럽 영화사에 자극을 주고 있다. 이에 올해는 칸영화제 기간 중 처음으로 미국영화 행사인 ‘캘리포니아 데이’도 열린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웨스 앤더슨을 포함해 비경쟁 부문의 스칼릿 조핸슨, 크리스틴 스튜어트, 해리스 디킨슨 등 쟁쟁한 할리우드 배우들이 감독으로 데뷔하는 올해, 미국영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확대하고자 하는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의 야심도 덩달아 선명해진 셈이다. 전쟁과 억압을 둘러싼 질문 앞에 선 2025 칸영화제는 영화가 다시금 세계와 대화할 준비가 된 최신의 매체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할리우드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상영작의 경향과 분석은 2025 칸영화제 2주차 기획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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