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첫 주말 영화의 거리는 여우비로 자주 젖었다. 축제 중 전주에는 이리도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그래서 극장이 더 아늑했는지 모른다. 올해의 프로그래머 이정현과의 만남도 그 반작용의 한 예다. 벚꽃에 물 든 듯한 연분홍 슈트 차림으로 레드카펫을 밟았던 그는 비슷한 빛깔의 원피스를 입고 인터뷰 장소에 나타나 창밖 공기와 대비되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아이들이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로 오고 있다면서. 기다린 가족과의 재회, 마지막 관객과의 대화를 앞두고 만난 이정현에게서는 충만한 기쁨이 엿보였다. 영화제를 통과하며 동료들, 관객들과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재확인한 긍지가 그 안에 스며 있었다. 외풍이 파고드는 자리 한편에 난로를 두고 그가 큐레이션한 영화들에 관한 대화를 시작했다.
<꽃잎>을 끝낸 다음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됐고
이정현 프로그래머가 선정한 작품은 여섯편이다. 그중 출연작은 세편으로, 모두 그의 연기 인생에서 이정표처럼 서 있는 영화들이다. 그는 <꽃잎>(1996), <파란만장>(2011),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를 고른 까닭을 커리어라는 실로 꿰어 설명했다.
“어린 시절 경기도 광명에서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종로3가의 극장가를 쏘다니며 티켓을 모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 <꽃잎> 은 그런 나를 배우로 있게 해준 소중한 작품이다. <꽃잎>을 끝낸 다음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됐고, 더 많이 찍고 싶어졌다. 그런데 당시 미성년자여서 그랬는지 누군가의 딸이나 동생 역할밖에 들어오지 않더라. 속상해하다 테크노음악에 빠져 가수 활동을 했는데, 가수 이미지가 강해져 시나리오가 더는 안 들어왔다. 물론 가수로서 무대를 꾸미는 것도 재밌었다. 직접 컨셉을 잡고, 의상을 고르고, 프로듀서로서 역량을 키울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2011년 사석에서 박찬욱 감독을 우연히 만났다. 그가 왜 연기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시나리오가 하나도 안 들어온다고! 내 말에 놀란 그가 나를 다시 영화로 불러준 작품이 바로 <파란만장>이다. 그 작품이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단편 황금곰상을 받으면서 국내 감독들이 다 찾아봤고, <명량>을 비롯한 시나리오들이 들어왔다. 나를 배우로서 대중에게 다시 각인시켜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도 그렇게 하게 된 거다. 저예산으로 찍었고, 개봉할 줄도 몰랐다. 그런데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도 받고, 많은 분들에게 인정받았다. 이 작품 덕분에 큰 상업영화 현장으로도 나아갈 수가 있었다.”
연기자로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절실히 기다려왔다는 그는 “20대 때부터 얘기해온 실제 꿈”도 되새겼다. “오래전부터 감독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서도 연출을 전공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시야도 좁았고,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하지만 40대가 되고, 출산을 하고 나니 세상이 또 다르게 보이더라. 공감 능력이 커지는 것 같았달까. 글도 더 잘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굳이 대학원까지 진학한 이유? 친한 감독들이 많지만 다 바쁜 분들이다. 내가 시나리오 피드백을 하나하나 부탁한다면 얼마나 실례이겠나. 백번이고 피드백을 부탁할 수 있는 교수님들이 계시고, 촬영 장비도 공짜로 쓸 수 있는 대학원에 가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어린 동기들 틈에서 출석 1등도 하고, 연출부 막내가 되어 슬레이트까지 쳐봤다. 출산으로 잠시 휴학했다가 복학해 이제 4학차에 접어들었다.”
그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을 다니며 완성한 첫 단편이자 올해 전주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섹션에서 상영한 <꽃놀이 간다>와 연결되는 이야기였다. 주연까지 도맡은 이정현이 분한 여자 수미는 말기암 환자인 엄마와 살고 있다. 치료비가 없어 작정하고 과장된 행동을 펼치면서 병원에서 쫓겨나기를 반복해온 수미는 신에게 기댈 뿐이다. 틈만 나면 성수를 뿌리고, 성당 고해소에서만 울음을 터뜨린다. 2022년 벌어진 창신동 모자 고독사 사건이 이 영화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정말 큰 뉴스였는데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잊었다. 이런 이 야기는 항상 시간이 흐르면서 묻히고 만다. 영화로 만들어서 한두명이라도 이 사건을 알고,느끼고,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실화 속 모자를 모녀로 각색한 배경에는 3년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낙이 꽃놀이 관광 다니시는 거였는데, 항암 치료를 해야 했던 시기에도 그렇게 꽃을 보러가고 싶어 하셨다. 마지막에는 그걸 말린다고 크게 싸우고,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그게 너무 후회가 됐다. 그냥 가고 싶어 하시는 관광 보내드릴걸, 왜 그렇게 엄마를 힘들게 했을까. 영화를 찍으면서 그 생각을 많이 했다.” 수미가 꽃놀이 관광 포스터를 보고 힘을 내는 것에 더해 시장에서 묵을 사와 어머니에게 먹이는 것도 감독의 경험을 반영한 설정이다. 다섯 자매의 막내딸로서 겪은 일을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모녀의 사연에 엮어내면서, 이정현은 대학병원을 취재했다. 언젠가 남대문시장에서 수미와 닮은 여자들을 본 기억을 떠올리며 의상을 마련했다. 오랜 인연을 자랑하는 작곡가 윤일상에게 영화음악과 제작사 ‘와 필름’의 시그니처 사운드를 만들어달라고 청했다. 라스트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특수효과팀 데몰리션을 찾아가기도 했다. 데몰리션에서 연상호 감독의 <지옥>에 쓰인 더미를 내어줘 무사히 크랭크업했지만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다. “내가 구체적으로 원했던 더미를 구할 수 없었던 건 저예산영화의 아픔이다. 3회차에 모든 걸 끝내야 했고, 테이크도 한번씩밖에 못 갔다. 집에 돌아와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한탄했는데, 이렇게 영화제에 오고 관객들을 만나니 보람이 있다.”
내가 아끼는 영화들
6월에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연출 차기작도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취향’을 엊그저께 깨달았다고 한다. <꽃잎>으로 데뷔하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트로피를 안았으며, <범죄소년>(2012)과 <군함도>(2017)에서도 인상적인 배역을 소화한 배우임에도 말이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한 관객이 질문했다. 올해의 프로그래머로서 고른 <아무도 모른다> (2004), <더 차일드>(2005)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2002)의 면면을 보면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아차렸다. <로제타>(1999)를 비롯해 다르덴 형제의 많은 작품을 좋아하지만 <더 차일드>를 보고 난 후 펑펑 울었고, <아무도 모른다>도 마찬가지였다. <복수는 나의 것>은 볼 때마다 새롭다. 다들 <올드보이>(2003), 최근에는 <헤어질 결심>(2022)을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으로 거론하는데 내게는 <복수는 나의 것>이 제일이다. 내가 <헤어질 결심>에 출연하긴 했지만.”
편수의 제약으로 인해 아깝게 상영작에서 멀어진 후보도 있을까.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영화 <블랙 스완>(2011). 인물이 여러 인격과 환상을 겪으며 자기 내면의 혼동을 드러내는 재밌는 작품이다. 내털리 포트먼의 연기도 훌륭했다. 내가 대런 애러노프스키를 워낙 좋아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더 레슬러>(2008)도 후보로 고민했지만, 다르덴 형제를 조금 더 좋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관객으로서 개구지게 선정의 변을 밝힌 이정현은 창작자의 입장으로 돌아와 결연히 고백했다. “이제 나는 작은 영화를, 재밌게 만들고 싶다. 지금도 앞으로 찍을 단편 생각에 빠져 있다. 그러면서 많은 분들이 단편영화를 응원해주기를 바라게 됐다. 언젠가 장편도 찍는 감독이 될 수 있도록, 나 또한 응원해주기를 바란다.”
감독들이 기억하는 이정현의 순간
안국진, 장선우, 박찬욱과 박찬경 감독이 차례로 전주를 찾았다. 올해의 프로그래머 이정현의 초대에 응했기 때문이다. ‘J 스페셜클래스’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관객과의 대화 중 나온, 배우 이정현을 향한 감독들의 찬사를 여기 모았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감독“3회차 촬영부터는 따로 디렉팅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이정현 배우가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스태프들에게 제발 엔지를 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죽을 때까지 코앞에서 다시 못 볼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꽃잎> 장선우 감독“30년 만에 극장에서 <꽃잎>을 다시 보니 당시 이정현 배우에게 못할 짓을 많이 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기차 유리창에 머리를 찧는 장면이 있는데, 유리가 깨지는 것을 CG로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배우가 얼마나 연기에 집중했는지 유리가 현장에서 깨졌다.”
<파란만장> 박찬욱 감독“무당과 남자가 진흙탕에서 뒹구는 장면 촬영을 몇 시간 앞두고 당초 무당 역이었던 문소리 배우가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연기와 노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다시 찾아야 했고, 얼마 전 만난 이정현 배우가 떠올랐다. 진흙탕에서 다칠 뻔하고, 감기까지 걸렸는데도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다. 하늘이 점지해준 배우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