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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에 걸음을 멈추지 않는 법, <달팽이의 회고록> 애덤 엘리엇 감독 인터뷰
이자연 2025-05-01

애덤 엘리엇 감독의 스톱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정제된 귀여움이나 정갈한 어여쁨보다는 기괴하고 괴랄한, 섬뜩하고 현실적인 분위기를 따른다.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어머니, 알코올중독인 아버지와 가난, 뿔뿔이 흩어진 쌍둥이 형제와 오랫동안 곪아온 외로움. <달팽이의 회고록>은 사뭇 불행으로만 채색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작은 틈새로도 빛이 새어든다는 오랜 진실을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어쩌면 달팽이는 껍질 속에 갇힌 게 아니라, 아늑하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헤어진 쌍둥이 남매의 생애와 삶의 통찰을 다룬다. <달팽이의 회고록> 스토리는 처음 어디서 시작됐나.

개인적으로 쌍둥이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내 주변에 쌍둥이 친구들이 많기도 하고. 이들이 생물학적으로, 정서적으로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 문득 궁금해졌다. 무엇이 그들을 같게 하고, 다르게 할까. 쌍둥이 중 한명이 다른 곳에 살게 되거나 죽게 된다면 남은 한명은 어떻게 될까. 이 이야기의 초고만 16번을 썼다. 초고를 쓸 때마다 스토리라인이 계속 바뀌었다. 모든 영화는 잘 짜여진 이야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모든 과정 중 글쓰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 쌍둥이 남매가 헤어진 뒤 영화는 주로 그레이스의 시선을 따라간다. 개성이 뚜렷한 그레이스의 성향은 실존 인물을 더하고 뺀 결과처럼 보인다.

내 모든 영화는 나의 가족, 친구, 삶에서 만난 모든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들은 소설도 다큐멘터리도 아니기 때문에 진실의 정도를 조금씩 조절해간다. 이를테면 그레이스는 어릴 적 구순구개열을 지녔던 내 친구의 이야기에서 비롯했다. 타인과 다른 외형으로 오랫동안 놀림의 대상이 되었던. 그래서 여러 차례 수술대에 올라야 했던 씩씩한 소녀를 원형으로 두고 있다. 지금 그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 넘치는 멋진 어른이다. 그렇게 작고 내향적이었던 아이가 세상을 향한 적응을 마치고 당당해졌다니. 나는 그가 스스로 뚫고 나온 트라우마와 고통, 고군분투와 생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레이스는 그 용기를 이어받은 인물이다. 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같은 면도 있다. 아버지는 수집중독자였다. 호더라 볼 수 있겠다. 그의 모습을 보며 어느 날 궁금했다. 왜 인간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집을 채울까. 어떤 물건들이 정서적 가치를 부여받을까. 그런 부분을 그레이스에 반영했다.

- 그 친구도 <달팽이의 회고록>을 보았나.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내 친구는 런던국제영화제에서 작품을 처음 봤다. 엄청나게 긴장하더라. (웃음) 영화가 끝났을 때에는 <달팽이의 회고록>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었다. 실제 인물을 극화할 땐 나만의 규칙이 있다.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차용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논평을 불어넣어 명확한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사람을 기점으로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이 내 영화가 할 일이다.

- 내레이션이나 대사가 무척 문학적이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말하기 방식을 선호하는 편인가. 대사를 다듬는 방식이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철학적이고 시적인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둔다. 단어 놀이와 시 쓰기는 귀와 눈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후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오감을 잘 활용할 때 모든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고 빠져들 수 있다. 영화 제작자로서 관객이 지루해하거나 이탈하지 않도록 관심을 이끌어내는 건 중요한 미션이다. 그리고 그 몰입은 감각으로 연결된다. 나는 관객이 웃고 즐기는 데 그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감각과 감정으로 연결되는 것. 캐릭터의 비극을 자신의 일처럼 동화하는 것. 결과적으로 영화 끝자락에 모든 관객이 조금 지쳐 있는 게 좋다. (웃음)

- 아마도 가장 공들인 캐릭터는 그레이스의 첫 친구인 핑키 할머니일 것 같다. 화려한 역사를 지닌 나이 든 여자는 오로라도 보고, 사해에서 수영도 하고, 슈니첼 바에서 스트립 댄서로 활동도 했다. 존 덴버와 무려 헬리콥터 안에서 잠자리를 갖고 피델 카스트로와 탁구를 치기도 했다. 묘하게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핑키가 지닌 모티브를 궁금하게 한다.

핑키는 세 사람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먼저 벨기에에 사는 내 친구 낸시 펠프스. 애니메이션 저널리스트이자 미국에서 ‘버닝맨 페스티벌’을 만든 사람 중 한명이다. 그가 이전에 피델 카스트로와 탁구를 친 적 있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이더라. (웃음) 핑키는 이런 이야기들이 어울렸다. 남들은 믿지 못할 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이지만 당사자에겐 진실이고 당연한 일들. 그외에도 내가 아는 아주 괴상하고 기발한 노년기 여성들을 합쳐서 만든 캐릭터다. 정말 사랑한다.

- 슬픔이나 고난을 다룰 때 애덤 엘리엇 감독만의 도덕적 선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들은 위험을 감지하게 하지만 정작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다. 알코올중독에 걸린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성적인 문제로 법정에서 쫓겨난 판사도 그레이스를 예뻐할 뿐이다. 그레이스를 입양한 부모도 다소 기묘한 성적 취향을 지녔지만 그것을 어린이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을 걱정하게 만드는 게 왜 이렇게 좋을까. (웃음) 모두 경악할 만한 비밀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레이스에게 필요한 어른들이다. 그를 먹이고 키워주고 돌봐줄 사람들. 나는 입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좋아한다. 그게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의 연인 켄 또한 숨겨놓은 진실이 드러나지만 지독하게 악마화하지 않은 이유는 그 또한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레이스가 집을 떠나지 못하게 함정에 빠트리고, 또 가학적인 동기를 지니고 있지만 켄을 향한 그레이스의 사랑은 진실이었을 거라는 여백을 남겨두고 싶었다. 관객에게 무수한 추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간과 같다.

- 올해 개최 예정인 제27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BIAF) 포스터를 작업했다.

사실 이런 포스터 작업 문의가 많이 들어오긴 하지만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BIAF는 창작자에게 완전한 자유와 통제권을 주었다. 캐릭터가 자신의 엉덩이를 들여다보는 그림이 있는데, 그로테스크하고 유머러스한 측면 속에 진지한 메시지도 들어 있다. 많은 창작자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거품이 걷히고 진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면 사람들이 싫어할지 모른다는 사기꾼 증후군에 갇히기도 하고. 그 자기 의심과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포스터에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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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해피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