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를 고를 때 반드시 참고하는 리스트가 있다. 종합출판사 다카라지마사가 매해 발표하는 ‘이 만화가 대단하다!’다. 그해 가장 사랑받은 작품들의 랭킹으로 여성편과 남성편으로 나누어 선정한다. 2005년부터 시작해 일본 만화의 트렌드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자리매김했다. 2024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성편 1위작인 <해변의 스토브>가 지난 2월26일 국내에서 출간됐다. <해변의 스토브>는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상실(<해변의 스토브> <눈 내린 마을>)과 공허(<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박탈감(<눈을 껴안다>)과 소외감(<설녀의 여름>)을 함께 나눠줄 누군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 살고 싶어지는 몰입(<바다 밑바닥에서>)과 발견(<소중한 일>)의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걸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읽다 보면 용기가 저절로 부푸는 이야기를 데뷔작으로 펴낸 만화가 오시로 고가니는 어떤 작가일까. 호기심에 못 이겨 출판사(문학동네)를 통해 그에게 서면 인터뷰를 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답변이 도착했다.
- <해변의 스토브>에는 연인과의 이별로 눈물이 마를 날 없는 인간 스미오에게 말을 거는 난로가 등장한다. 영혼이 있는 난로는 어떻게 구상했나.
스미오의 난로와 같은 형태의 난로를 애용하고 있는데 그가 항상 가까이에서 내 생활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난로는 내 삶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관점에서 깊이 생각하는 과정에서 캐릭터가 탄생했다. 다카노 후미코의 단편 만화 <오쿠무라 씨의 가지>(奥村さんのお茄子)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 시니컬한 난로는 스미오와 같이 본 영화에 ‘68점’을 준다. 점수를 훌쩍 높여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이 90점 이상을 준 영화는 무엇인가.
하나를 고르기는 어렵다. <엔딩 노트> <이터널 선샤인> <결혼이야기> <바튼 아카데미> <천국은 아직 멀어> <벌새>. 이 작품들은 여러 번 다시 볼 만큼 좋아한다.
-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는 불의의 사고로 투명인간이 된 남편 모리조와 그의 아내의 이야기다. 아내가 욕실의 쏟아지는 물줄기를 통해 모리조의 몸을 실감하는 컷이 압도적이다.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할 때 처음 떠오른 이미지다. 언젠가 가족이 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드러난 몸의 선이 아름답다고 느꼈고 이 느낌을 그림에 담아보고 싶었다. 이 아름다움을 독자에게 어떻게 고스란히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는데 결국 독자 각자가 자신만의 감상을 가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눈을 껴안다>에는 인상적인 목욕탕 장면이 있다. 여기서 여성들의 나체는 마른 몸으로 통일되지 않으며 어떠한 간섭도 없이 유유히 움직인다. 거기서 오는 편안함이 있다.
여성의 몸을 성적인 기호로 그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캐릭터를 한명의 사람으로 여기면 그녀들을 성적으로 묘사하는 게 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보통 목욕탕에 가면 다양한 몸을 가진 여성들이 사바나의 동물들처럼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걸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고 기쁘다. 목욕탕의 그러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 <바다 밑바닥에서>의 후카야는 글쓰기에 열망이 있는 여성이다. 평소처럼 “평범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책을 읽던 도중 글이 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쥔다. 당신도 후카야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궁금하다.
집에서 만화를 그리는 일이 많다. 예열을 위해 설거지를 하거나 커피를 내리거나 빨래를 널거나 하는 일이 루틴이다. 작품 하나를 끝내고 나면 내 안의 재료들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 들어 책과 영화를 보면서 창작을 위한 연료를 채운다. 이런 행위를 반복할 때 겨우 조금씩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만들고 읽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하나의 기관처럼 죽을 때까지 계속 그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 이젠 없는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눈 내린 마을>은 애도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스즈키를 떠나보낸 마치다와 모리타. 남겨진 두 친구에겐 당신의 어떤 생각이 반영됐나.
이 작품을 그릴 당시만 해도 아직 어렸고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없는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기릴지, 반대로 죽은 나를 친구들이 어떤 방식으로 기억해주면 좋을지를 고민하면서 그렸다. 그리고 좀더 어른이 된 지금, 장례는 남겨진 사람에게 필요한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 <소중한 일>에서 무언가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던 시미즈는 ‘석양이 비치지 않는 사무실에 빛을 닿게 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빌딩에 반사되는 빛을 보며 “이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런 감격을 느껴본 적 있나.
친한 친구나 가족과 대화할 때나 취재할 때, 그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우주 같은 걸 느끼며 감동의 순간을 종종 맞이한다. 그 순간들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지 않을까. 때때로 독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맛있 는 음식을 먹을 때, ‘이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 유독 눈 내리는 겨울이 배경인 작품이 많은데 눈과 겨울은 당신에게 어떤 인상인가.
눈에 대한 동경이 크다. 눈이 내리지 않는 오키나와 출신이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날을 떠올려보자. 소리가 흡수되어 조용하다. 쌓인 눈으로 인해 시각적 정보는 줄어들고 여백은 많아진다. 그 와중에 바람의 움직임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데 거기서 오는 감동이 있다.
- <바다 밑바닥에서>의 난로와 <눈 내린 마을>의 눈사람이 <해변의 스토브>의 난로처럼 영혼이 있는 존재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눈사람에겐 영혼이 있을지도. 나중에 만화가 야마모토 미키 선생님이 “두 친구가 눈사람을 만든다는 건 여기 없는 스짱(스즈키)을 존재하게 하려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신 적 있다. 눈이 내리니 으레 눈사람을 만드는 걸로 한 거라 놀랐다. <바다 밑바닥에서>의 난로는 단순히 배경으로 그린 거지만 후카야가 그를 계속 소중하게 사용한다면 영혼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오시로 고가니의 요즘 빠져 있는 것들 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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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 초 ‘나무 찜통(세이로)’을 사서 여러 가지를 쪄먹고 있다.
2. TBS 라디오 <모리모토 다케로 스탠바이>로 뉴스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주 꼭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생활은 춤춘다>의 상담 코너, <아즈미 신이치로의 일요일 천국> 등, 최근 좋아하는 팟캐스트는 <모모야마 상사>, 도미나가 교코의 <일과 일 사이> 등이 있다.
3. 유튜브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스케치북 영상 보는 걸 좋아한다.
4. 오리사카 유타의 앨범 《주문》을 2024년에 가장 많이 들었다.
5. 집안일할 때는 넷플릭스 시리즈 리얼리티쇼 <연애 실험: 블라인드 러브>를 자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