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의 중력>의 마지막, 오랜 기다림 끝에 영화 <화장>의 고사가 진행되고 “이따금 바람이 불고 맑음”이란 자막과 함께 <희망가>가 울려퍼진다. 그리하여 드디어 <백두 번째 구름>에 당도했다.
=임권택 감독의 백두 번째 영화니까 <백두 번째 구름>이다. 그런데 왜 구름인가. 임권택 감독님이 언젠가 그런 말을 하신 적 있다. 영화를 찍으러 돌아다니다가 언젠가는 객사할 것 같다고. 상징적 의미의 객사겠지만 그 말씀을 하시며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계신 모습이 내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산과 같은 이 사람에게 구름들이 백두번 지나갔구나, 이분에게 영화란 그런 의미구나 하고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언젠가 내가 만들게 될 이 영화의 운명도 함께 결정됐다.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혹은 촬영 현장의 메이킹 다큐멘터리지만 이제껏 본 적 없는 형식이다.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들이 있는지.
=영화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적지 않게 찾아보긴 했다. 다만 이 영화를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들에 대한 관심으로, 그러니까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관심으로 <도쿄가>(감독 빔 벤더스, 1985)를 봤고 구로사와 아키라가 궁금해서 <A.K.: 구로사와 아키라의 초상>(감독 크리스 마커, 1985)을 봤다. 하지만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는 이상할 정도로 다른 영화를 떠올리지 않았다. <녹차의 중력>을 먼저 찍고 <천당의 밤과 안개>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는 결국 대상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그외 다른 어떤 것도 참고가 안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천당의 밤과 안개>를 통해 몸으로 깨달은 거다. 의식적으로 외면한 게 아니라 어떤 레퍼런스도 쓸 수가 없었다. 이 영화의 방법을 이끌어준 건 오직 임권택 감독님 한분뿐이었다.
-<녹차의 중력>과 <백두 번째 구름>은 같은 대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은 영화지만 사실상 전혀 다른 영화이기도 하다.
=<녹차의 중력>은 오로지 임권택이라는 사람을 향한 영화지만 <백두번째 구름>은 영화 현장에 대한 영화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한국영화 현장에서 헌신하는 스탭들에 대한 나의 헌사다. 그게 이 영화의 절반이라고 해도 좋겠다. 가령 <화장>의 마지막 촬영 현장에서 나는 그것이 어떤 장면인지에 대한 일체의 설명 없이 분주히 오가는 스탭들의 모습만 담았다. 사실 그 장면은 그다지 중요한 신도 아니었고 실제 영화에선 쓰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촬영이라는 게 중요했고, 43회차 촬영을 함께해온 스탭들에 대한 존경을 담아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훈이 쓴 원작 소설의 몇 대목이 문자 이미지로 화면에 그려진다. 거기에 시나리오의 문자가 더해지고, 현장에서의 감독의 표정, 카메라, 배우의 움직임이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다.
=불규칙이라기보다는 현장에서 규칙을 배워갔다. 영화 <화장>은 소설 <화장>에 대한 임권택의 독후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화장>은 영화화하기 매우 힘든 소설이라고 생각하는데 임권택 감독님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표현했는지가 궁금했다. <녹차의 중력>과 마찬가지로 그런 느낌을 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다. 소설을 영화로 옮긴다는 건 각색 과정에서 본래의 문장들을 ‘건드리는’ 거다. 긴 내용 중 어떤 문장을 뽑아냈는가, 어떻게 시나리오로 옮겨졌는가, 시나리오가 현장에서 임권택이라는 메소드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가. 철저하게 그 프로세스를 따라간다는 게 <백두번째 구름>의 첫 번째 구성원리였다. 때문에 김훈 소설의 문장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녹차의 중력>이 오직 임권택에 초점을 맞춘 응시였다면, <백두 번째 구름>은 일종의 대화처럼 다가온다. 소설과 촬영 현장, 카메라로 찍힌 장면과 그걸 바라보는 임권택 감독이 숏과 리버스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권택 감독님은 <취화선>(2002)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모니터를 잘 안 쓰셨다. <달빛 길어올리기>(2010) 때부터 모니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셨는데 모니터를 바라보는 감독님의 얼굴을 보면 오케이컷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다. 내가 어떤 순간들을 골라서 찍은 게 아니라 카메라 스스로 모든 장면을 담아내는 자동성.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아니라 카메라가, 다시 말해 영화가 임권택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의 문제. 이걸 하려면 <화장>팀이 구현하고 있는 영화의 장면들과 그걸 보는 임권택 감독님의 얼굴이 필요했는데 어떤 장면들은 완성된 영화에선 빠진 것들도 있고, 완성된 영화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민감한 문제인데 기꺼이 <화장>의 장면들을 쓸 수 있게 허락해준 김형구 촬영감독과 스탭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임권택 감독에 대한 입문서 격의 영화는 아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를 보고 임권택 감독이 궁금해지진 않는다. 대신 임권택이 어떤 영화를 만든 분인지 잘 아는 관객에겐 새로운 시선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백두 번째 구름>은 한편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임권택 감독님의 연출 비밀을 훔쳐가고 싶은 이들에게 도구 상자처럼 쓰였으면 하는 희망도 있다. 임권택 감독님은 인간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안타깝게도 전승이 되지 않는다. 내가 현장에서 늘 배우고 싶었던 것, 많은 이들이 배울 수 없다고 탄식했던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수정해나가면서 타이밍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화장>의 오 상무 부하직원이 빈소를 찾아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은 스쳐 지나갈 사소한 장면 중 하나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님은 거기서 계속 동선 수정을 요구하며 오케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동선의 앙상블이 임권택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여실히 드러낸 순간, 그야말로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동선을 조각해나가는 그 과정에 임권택 영화의 영혼이 담겨 있다.
-<백두 번째 구름>의 마지막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화장>의 마지막 촬영 현장에서 끝나지 않고 <태백산맥>의 촬영 장소까지 찾아가서 임권택의 말을 듣는다.
=<화장> 촬영 마지막날, 눈이 왔다. 프로듀서는 당연히 여기가 끝일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엔딩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 촬영으로부터 1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기다렸다. 그러다 감독님이 고향 장성에 내려가서 <화장> 시사회를 한다고 하셔서 무작정 따라갔다. 그 때 감독님이 인터뷰를 했는데 “감독님 영화에서 무엇을 배우면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영화는 살아온 만큼 찍는 거요”라고 답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영화의 엔딩이 결정됐다. 그게 실은 <씨네21> 인터뷰였다. <씨네21>엔 여러 차례 감사하다. (웃음)
-결국 본인은 이번 작업을 통해 임권택 영화의 비밀을 훔친 것 같은가.
=다음 영화를 기대해달라. (웃음) 우선 극영화를 메인으로 준비 중이다. 이번 영화처럼 내가 반한, 내게 영감을 준 감독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병행할 예정이다. 물론 영화가 나를 허락해주어야 가능할 테지만. 차기작이 어떻게 될지 나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