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작가의 세계에 진입하기 전에는 헤맬 준비를 해야 한다. 그는 특별한 애정도 적의도 없이 늘 경계하는 마음으로 인물을 만들고 완결되지 않은 문장과 반점으로 열린 결말을 내놓는다. 그래서 독자는 묻고 또 묻게 된다. 이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이 다음은 어떻게 흘러갈까.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인물에 대한 이해는 물론 작품의 주제까지 확장되는 놀라운 독서의 경험을 하게 된다.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시선이 머무르게 하는 힘을 가진 소설가. 동시대 독자가 성해나를 ‘2024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예스24) 1위에 뽑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소설집 <혼모노> 펴낸 성해나 소설가를 봄이 끝나기 전 만났다. 이번 소설집은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발표한 단편 7편을 엮은 것으로, 성해나가 “때론 벽돌을 올려주고 또 잘 지어지고 있는지” 걱정해 주는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지은 두 번째 집이다. 집주인의 또렷한 안내를 받으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 표제작 <혼모노>는 모시던 장수할멈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 30년차 무당 ‘나’를 주인공으로 한다.
= 토속신앙이나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 언젠가 이를 다룬 소설을 꼭 쓰고 싶다고 다짐했다. 취재차 점집도 가고, 전화 사주도 봤다. 점사는 엉성했으나 그것도 나름대로 도움이 됐다. 직업인으로서의 무당, 무당간 이권 다툼을 고려하여 초안을 구상했으나 후에는 확증편향과 진짜/가짜의 담론으로까지 나아가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게 되었다.
- ‘나’가 막판에 보여주는 굿판의 속도가 엄청난데 일필휘지로 써지던가.
= 금방 쓰긴 했다. 보통 한 장면 한 장면 힘겹게 쓰는데 이때가 예외적이었다. 림 킴의 <민족요>, 사도 OST <아모리-만조상해원경>를 틀어두고 결말을 썼다. 음악이 소설과 잘 붙어서 그랬나. 특히 <만조상해원경>은 망자의 넋을 달래는 경이라 소설과도 접점이 있다. 이 음악이 쓰인 <사도> 한 장면을 돌려 보며 큰 도움을 받았다.
- 마지막 굿판에서 무아지경을 경험한 ‘나’는 결국 어떤 상태에 이른 걸까.
= 30년 박수 인생 동안 주인공 문수는 장수할멈이라는 신에게 의존하거나 휘둘리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중요치 않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다. 비로소 ‘진짜 가짜’가 돼 자유로워지는 인물이다.
-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어린이 배우 학대 논란이 있는 영화감독 김곤을 경애하는 ‘길티 클럽’ 팬들의 이야기이자, 그 팬 모임에 속한 ‘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이 2024년 제15회 젊은작가상을 받으면서 쓴 소감에 쳇 베이커와 우디 앨런을 좋아하는 복잡한 심경에 대해 고백했다. 거기서부터 출발한 이야기일까.
= 이 소설을 구상할 당시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성추문이었다. <악마의 씨> <피아니스트> 같은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당시엔 그의 작품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이 소설은 윤리와 애정 사이 경계에서 비롯되었다. 이 문제와 접해있지는 않지만, 소설 속 ‘길티 클럽’의 모티브가 된 건 <불한당>과 <아수라>의 팬덤이었다. 이 팬덤이 현상적으로 커지는 걸 기억해두었다가 상상과 현실을 접목해 길티 클럽을 구체화했다.
- 신작 <안타고니스트> 관객과의 대화에서 김곤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거듭하며 허리 숙여 사과할 순간 ‘나’는 자기 안의 무언가가 ‘펑’ 터졌다고 느낀다. 이때 ‘나’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 믿음이 깨졌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이 장면은 나의 철학이나 사상과는 상충되는 면이 있어 쓸 때 굉장히 힘들었다. 나였다면 감독이 보여준 일말의 도덕성에 조금은 안도했을 것 같다. 그와 반대로 소설 속 ‘나’는 김곤이 그렇게 죄를 인정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공고히 쌓아 올렸던 애정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낀다. 그 점이 아이러니하다.
- 여기서 ‘나’는 다양한 영화 용어와 수사적 표현을 구사하며 영화에 대해 말하는 팬들에게 위축된다. 평소 미문이나 멋진 문장을 써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는 않나.
= 한때는 문장에 대한 고민이 컸으나 요즘엔 그렇지 않다. 미문보다는 정문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엔 ‘포에틱 딕션’이라는 게 있다. 일상에서는 잘 쓰지 않는, 우아하고 우회적인 시적 어휘를 그렇게 부른다. 그런 문장을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작가도 있지만,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욕심을 부리며 미문을 쓰다 보면 서사의 힘이 약해지기도 한다. 되도록 정확한 문장을 쓰자는 주의다.
- 초고를 다 쓴 뒤 퇴고를 꼼꼼히 하는 편인가, 아니면 쓰면서도 계속 다듬는 편인가.
= 둘 다. 특히 다 쓴 후에는 온점이 제대로 찍혔는지, 부사의 위치가 적절한지 계속 바꿔보며 정리한다.
- 성해나의 인물들은 자신의 취향을 명확히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공통점이 보인다. 작가를 닮은 걸까.
= 오히려 나는 내 취향을 꽤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편이다. 취향을 고백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소설가 이청준과 스콧 피츠제럴드를 좋아한다. 누가 나를 제2의 이청준, 피츠제럴드라고 불러준다면 그저 감사하지 않을까. 취향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외 부분에서는 자기성찰이나 반성을 자주 하는 편이다.
- <스무드>는 서울에 처음 방문한 한국계 3세대 이민자이자 유명 미술작가의 매니저인 ‘듀이’가 얼결에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게 되는 하루를 그린다. 여기서 종로는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정의된다.
= 태극기 집회든 KKK 집회든 이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타자의 눈에는 축제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태초의 아이디어였다. 크로스체크를 위해 지난해에는 광복절 집회를 찾았다. 특정 당의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고 서로 친밀해 보였다. 가기 전까지 혹 큰일이 나지는 않을까, 어디로 끌려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 누구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듀이가 집회에서 느끼는 친절은 오롯이 상상에서 비롯됐다. 정치와 계급을 한데 엮고 싶기도 했다. 예전에 취재 겸 하이엔드 아파트를 구경한 적이 있다. 임장을 마치고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 갔는데 그곳에 수많은 노숙인과 노인이 자리하고 있더라. 누군가가 향유하는 공간은 티끌 한 점 없이 안락하고 매끈하나, 누군가가 위치한 공간은 울퉁불퉁하고 거칠 뿐이다. 그런 격차를 소설로 구현하고 싶었다.
-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다루는 ‘경동수련원’이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걸 쉬이 짐작할 수 있다.
= 건축과 문학은 상당히 닿아 있다. ‘짓는다’를 말을 공유하는 것부터 닮아 있고, 소설을 쓸 때도 집 짓듯 차근차근 골조를 쌓고 허점을 메운다. 소쇄원이나 포도 호텔, 웰콤 시티로 답사를 갈 만큼 건축물 역시 좋아한다. 이 소설을 쓰면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답사를 몇 차례 다녀왔다. 건물은 부식되지만, 그 건물에 얽힌 악행이나 부당한 역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용산 대통령실, 전쟁기념관의 이어짐이 내게는 굉장히 기묘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참담한 역사에서 기인되었다.
- 젊은 시절 경동수련원을 설계한 건축가 구보승이 노인이 돼 다시 그곳을 찾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좋은 꿈을 꾸었으니 복권이나 사야겠다고 마음먹는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 그 반대가 아닐까. 결말에서 구보승은 잠시 ‘구의 집’을 짓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 회상으로 인해 분명 죄의식을 느끼지만 자존심 때문에 끝내 속내를 숨긴다. 구의 집을 여전히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 단언하며 말이다. 나는 우리가 경계할 이들은 극단에서 흑백논리를 펼치는 이들보다 중립을 지키는 이들, 회색지대에 선 이들이라 생각한다. 그런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부정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구보승은 소신 없이 주어진 걸 성실히 행하는 캐릭터다. 학생 운동을 무용하다고 여길 만큼 중립적이고,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선’이나 ‘악’으로 대변되기보다 ‘회색 인간’에 가깝다. ‘중립은 때로 악보다 더하다’는 엘리위젤의 말처럼 구보승 역시 주관이나 헤아림 없이 그저 맡은 바를 다 할 뿐이지만, 그것은 끝내 해악이 되어버린다.
- 작품을 읽다 보면 인물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쉽게 판단하거나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려는 태도가 느껴졌는데, 작가로서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편인가. 애정을 갖더라도 그 선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려고 하는지.
= 그렇다. 황희 정승 같은 태도로 쓴다. (웃음)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지 않나. 그 불완전을 긍정하며, 어느 한 편에만 서기보다는 이 편의 말도 들어보고 저 편의 말도 들어보려 한다. 그러한 조절이 소설 쓰기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물에게 너무 밀착하다보면 시혜적인 시선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멀어지면 인물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게 된다. 캐릭터도 신경 써서 직조하지만, 인물을 둘러싼 현상이나 담론, 본질, 사회적 문제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려 한다.
- <잉태기>는 엄마인 ‘나’가 시부와 딸 서진을 “겨루듯 치열히” 키우는데. 여기서 상대가 시모가 아닌 시부라는 데에서는 오는 독특함이 있었다.
= 육아에 있어 과연 고부갈등만 있을까. 판을 흔드는 건 재력을 쥔 가부장적 시부일 수도 있겠다는 물음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공항 장면을 쓰면서 ‘우리가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목소리는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했다. 그건 서진의 목소리라고 여긴다.
- 서진이 미국으로 원정 출산을 떠나는 공항 장면에서 ‘나’와 시부가 맞부딪히는데 둘이 악다구니를 쓰는 동안 정작 서진은 소외된다.
= 힘겹게 쓴 장면일수록 독자들이 더 흥미롭게 읽어주는 것 같다. 자극적인 감각만 가져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 마음이 독자에게 잘 가닿을지 걱정이 컸다. 전술했듯 이 장면을 쓰면서 내가 치중했던 건 ‘우리가 묵인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서진은 주관이 부족한 인물이다. 타고난 기질 탓도 있겠으나 자란 환경의 영향이 크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내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안쓰럽고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 <우호적 감정>은 나이도 성격도 다른 세 직원이 마을 재생 프로젝트 TF팀에 들어가 겪는 연대와 갈등을 다룬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서 지방문화에 관심을 보여왔던 작가의 관심이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 다양한 세대가 한데 뭉쳐 있는 공간 중 하나가 회사인 것 같다. 장년도, 중년도, 청년도 장시간 모여 있는 공간 아닌가. 세대 간의 갈등과 연대를 그리기에 회사가 적합하다고 보았다. 이 작품은 세대 간 균열을 담고 있으나 전작인 『빛을 걷으면 빛』에서 적시했듯 나는 여전히 세대 간 연대가 가능하다고 본다. 지방 소멸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고등학생 때 공동체 마을에서 살았고, 지방에 정주하며 체감한 것들도 많다 보니 지방소멸이 남일 같진 않다. 어쩌면 그러한 경험이 <우호적 감정>의 근원이 되지 않았나 싶다.
- 1994년생 어촌 출신 우림, 조현, 시우. 세 소년의 청춘을 그린 <메탈>은 소라 네오 감독의 <해피엔드>와 같이 보면 좋을 작품이다. 이들의 우정은 찬란하지만 깨질 것 같은 불안감을 안고 이어진다.
= <메탈>은 MBTI 테마소설집 『저는 MBTI 잘 몰라서…』에 실린 소설이다. 소설 속 세 친구는 모두 ESTP다. 나와는 완전히 반대의 MBTI를 지닌 인물들이다. 성향이 비슷하면 부딪힐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나와 닮아 있고 내가 가진 결핍이 친구에게도 있다면 결국은 멀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와 상충되는 인물을 그렸다. 이 소설 속 우림은 청춘의 한 시기를 그리워하지만, 나는 다르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나는 늘 지금이 좋고, 내 관심은 작금의 문제에 있다.
- 이야기는 세 친구의 군 입대와 결혼까지 이어진다. 이들의 관계를 다룰 때 왜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 금세 깨지는 관계도 있지만, 어떤 관계는 오랜 시간을 거쳐 쌓이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마치 젠가처럼. 누구 하나가 빠지면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 채워야 하는데 이 친구들은 오직 셋이 전부고, 그 빈자리를 다른 누가 채울 수 없는 거다. 그러한 축적과 균열의 과정을 담기 위해선 긴 시간이 꼭 필요했다.
- 인터뷰와 같은 이벤트가 없는 보통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하다. 아침형 인간으로 알고 있는데.
= 아침까지 깨어 있는 인간도 아침형 인간이라면 그러하다. (웃음) 그래도 요즘은 새벽 2시 정도엔 잠자리에 들려 한다. 보통 그날그날 작업량을 정해 두고 집필한다. 하루에 원고지 몇 매 이런 식으로. 밥 먹고 구상하고, 운동하고 집필하고, 챙겨 볼 것들 좀 보고 다시 쓰고의 반복이다. 작업 공간은 주로 집이다. 카페는 사람 구경하느라 집중이 잘 안 되더라. 원래 서재에서 주로 썼는데 요새는 소파에 앉아서도 쓰고, 식탁에 앉아서도 쓴다.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하곤 하는데, 음악이 집필에 방해가 되면 백색소음도 곧잘 듣는다. 서울대학교 도서관 백색소음이 꽤 괜찮다.
- 현재 쓰고 있는 차기작이 있나. 혹은 요즘 화두로 삼고 있는 주제에 대해 귀띔해 준다면.
= 참 어려운 질문이다. 나만의 징크스가 있다. 쓰고 있는 이야기를 입 밖에 내면 잘 안 되더라. 그래서 차기작 이야기를 할 땐 늘 조심스럽다. 간략히 말하자면 3대에 걸친 소설을 쓰고 있다. 근래 관심 있는 소재는 중년 은둔이다. 경기도에만 중년 은둔자가 만 명 정도 있다고 한다. 이제는 청년뿐 아니라 중년조차 은둔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들을 돌보는 건 7·80대의 부모다. 이런 우울한 시대상을 나의 방식으로 그리고 싶다.
소설가와 영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독자 모델로 <씨네21>에 실린 적 있다. 정확히 999호다. 꼭 실어 달라. (웃음) 어릴 때부터 <씨네21>을 구독해 읽었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 2000년대 초반엔 정기구독자에게 DVD를 보내주곤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도 그렇게 보게 되었다. 가족들과 숨죽이며 본 기억이 있다. 책을 읽거나 소설을 쓰는 일만큼이나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는 것 역시 좋아한다. 내 작가 인생의 초석은 영화로 다져져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영화를 통해 늘 인생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