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된다. 나름의 첨단으로 세계를 드러내는 예술 역시 마찬가지. 재현과 표현이라는 대립항을 끊임없이 반복해온 미술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100여년 전 탄생한 뒤 진화를 거듭한 ‘영화’는 어떤가. 산업과의 연계가 그 어떤 문화 영역보다도 확실했던 영화는 언뜻 무서운 속도로 자신만의 언어를 안정화시킨 것처럼 보였다.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오늘날의 영화문법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어내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이지만 그 당시의 영화가 모두 확고부동하게 하나의 길로 달려가고 있었던 건 아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봐도 소련에서는 몽타주 기법이 등장했고,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독일에서는 표현주의 영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영화와 내러티브가 조우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오늘날만큼 확고하지 않았던 당시는 사실 새로운 매체의 활용방법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페르낭 레제, 마르셀 뒤샹, 한스 리히터, 라즐로 모흘리-나기 등 사진과 조각 등의 현대 미술의 목록에서 익숙한 이들은 그 경쟁의 한복판에서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일군의 작가들이었다. 이 세계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한 좀더 적절한 방법을 고민하던 이들에게 ‘영화’는, 새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 일종의 돌파구였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멀티미디어의 각종 실험에서 그러한 움직임과의 공통점들을 제법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영화가,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뉴미디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올해 세네프는 백투더 오리진을 통해 1920년대 유럽영화의 새로운 시도 중에서도 첨단에 속하는, <기계적 발레> 외 6편의 영화를 묶어서 상영한다. 페르낭 레제는 입체파의 일원답게 <기계적 발레>에서 그네를 타는 여인의 단절된 신체를 통해 다양한 추운동의 리듬감을 살리는 편집의 묘미를 선보인다.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설치작품이었던 <회전 유리판>에 착안하여, 착시효과와 언어적 유희를 이용해 <빈혈증 영화>를 완성했다. 초기 사진사에서 “무엇을 보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임을 역설했던 라즐로 모흘리-나기는 <마르세이유의 오래된 항구>에서 여러 종류의 극단적인 앵글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고, 운동이미지를 담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한편 극영화와 아방가르드, 다큐멘터리 등 폭넓은 장르에서 영화를 실험했던 여성감독 제르맹 뒬락은, 극영화에서도 이러한 실험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 <여행으로의 초대>는 동명의 술집을 찾은 한 부부의 동상이몽을 심리적 리얼리즘 방식으로 좇아가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영화언어가 얼마나 단선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춤추는 무용수의 운동을 추상화해 기계의 다양한 움직임에 대비시킨 그의 또 다른 작품, <테마와 변주>는 앵글과 편집뿐 아니라 카메라의 무빙에 의해서도 또 다른 표현이 가능함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