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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연기로 마음을 송두리째 헤집는 날까지 - <애마> 배우 방효린
정재현 사진 백종헌 2025-08-28

배우 방효린의 행보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다. 노래하듯 맑고 새된 목소리로 에로영화로 데뷔하려는 신인배우(<애마>), 수학여행 당일 자살을 기도하는 학교폭력 피해자(<지옥만세>)로 분했고, 1980년대 서울 충무로(<애마>), 사이비종교 교단(<지옥만세>), 인간 사냥터(<저 ㄴ을 어떻게 죽이지?>)를 누볐다. 한곳을 골똘히 바라보는 얼굴은 방효린의 전매특허다. 그때마다 방효린은 대기 상태다. 지구에 남아 화성으로 떠난 연인을 기다리고(<로웰에게>), 오피스텔 로비에서 시간을 보내며 여자가 집으로 자신을 들이길 기다리고(<렛미인>), 세 친구 사이에서 관계의 진척을 기다린다(<구름이 다소 끼겠습니다>). <로웰에게>를 제외한다면 나열한 작품이 이성간 연애가 아닌 이하늬, 오우리, 하윤경, 김보라 등 여성배우들과의 짙은 케미스트리로 기억된다는 점 또한 이 배우의 특질을 돋보이게 한다. 이번엔 방효린이 <애마>의 공동 주연으로 나선다. 봉쇄와 검열, 학살로 기억되는 1980년대. 엄혹한 시대에 권력의 눈치를 보는 영화판은 여성들에게 특히 잔인하다. 방효린이 연기하는 <애마> 속 주애는 그 속에서 분투한다. 미친 세상에서 미치도록 하고 싶은 연기로 살아남기 위해서, 기꺼이 미친 여자가 되고자 한다.

- <애마>는 베테랑 여성배우(희란)와 배우 지망생인 젊은 여성(주애)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일부 연상케 한다. 공교롭게 대학생 때 <갈매기>의 니나를 연기한 적 있더라.

<갈매기>와 니나를 향한 애정이 크다. 당시 정말 열심히 역할을 준비했다. 아직도 니나의 대사를 전부 외우니까. 얼마 전 대학 동기들과 여행을 갔는데, 내가 밤새 잠꼬대로 니나의 4막 대사를 중얼거렸다고 하더라. (웃음) <애마>를 촬영하는 동안에도 종종 옛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과거 경험을 투영하면서까지 주애를 연기하진 않았다. 배역 자체에 몰입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데 집중했다. 평소엔 배역에 관해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감독님에게 이것저것 제안하는 편인데, <애마>는 대본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 내가 뭘 더할 필요가 없었다. 주애가 책 속에 이미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첫 오디션 때 이해영 감독을 울렸다고. 감독으로부터 어떤 피드백을 받았나.

이해영 감독님이 “내가 쓴 캐릭터를 이렇게까지 연기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셨다. 당락과 관계없이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 행복했다. 감독님 말씀에 큰 힘을 얻어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믿음을 주는 분이 있다면 나 역시 잘해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 <애마>가 여성의 신체를 다루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에서 몸을 쓸 일이 꽤 많았다. 승마를 한다든가 탭댄스를 춘다든가.

오디션에 합격하자마자 승마와 탭댄스를 배웠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승마, 탭댄스를 배우고 헬스장에 다니며 체중을 증량했다. 탭댄스는 손발을 따로 운용해야 하는 동작이 많아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승마는 말과의 교감이 가장 중요하다. 말의 기분을 살펴야 해서 각설탕도 주고 쌀과자도 사 먹인 뒤 “내가 이거 줬으니까 꼭 기억해 줘”라고 달래며 연습했다. 말에게 말도 못 붙이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주애가 천둥이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마음을 줬던 것 같다. 촬영하기 전 이하늬 배우와 함께 외승을 나간 적 있다. 선배와 함께 말을 타며 승마 연기 시 주의할 점은 물론 배우로서의 마음가짐, 촬영이 없는 동안 배우가 자신을 가꾸는 법 등을 들었다. 이하늬 배우는 정말 따뜻한 선배다. 스태프 한명의 작은 변화도 기민하게 알아챌 만큼 현장의 모두를 살뜰히 살피신다.

- 주애가 공식 석상에서 선보이는 소위 서울 사투리는 어떻게 만들어갔나. 특히 공식 석상에서 발화할 때 악센트가 두드러지던데.

딱히 레퍼런스가 있지는 않았다. 이전부터 80년대에 나온 한국영화를 즐겨봤다. 영화를 보며 경험한 말씨가 있어서 그런지 낯설지 않더라. 아버지가 영화를 엄청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많은 영화를 보며 자랐다. 아버지가 유년기에 영화관 근처에 사셨다고 하더라. 그래서 아버지에게 <애마>에 나오는 80년대 극장 개봉 풍경을 묻기도 했다. 아버지와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고교얄개>(1976)다. 영화를 보고 아버지랑 영화의 주연인 이승현 배우가 운영 중인 조치원의 카페에도 다녀왔다.

- 프로덕션디자인이나 분장, 의상도 시대적 특성을 명시한다.

세트가 궁금해서 촬영장 가는 길이 설렜다. 하도 세트장에서 입을 벌리고 다녀서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주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해영 감독님의 손을 안 거친 곳이 없다. 감독님이 아이섀도와 립스틱 컬러를 하나하나 직접 골라주셨다. 의상도 말해 뭐하겠나. 분장팀도 긴 머리로 해볼 수 있는 모든 스타일은 <애마>를 통해 다 만들어본 것 같다는 후기를 들려줬다.

- 주애에게 숱한 시험의 순간과 위기가 찾아온다. 잃을 게 많은 쪽일수록 숙이고 들어가기 마련인데, 주애는 무례한 언행엔 똑같이 무례하게 대응하고 위협 앞에 침착하고 논리적이다. 주애가 6화 대종상 레드카펫에 서는 장면이 그 정점이지 않을까.

행동의 당위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 자체로 주애답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대종상 레드카펫 장면을 촬영했다. 아무에게도 이런 촬영이 있다고 이야길 안 했는데 공교롭게 현장을 지나가던 친구들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효린아, 너랑 닮은 뽀글머리한 여자가 광화문에서 말을 타고 있어”라고. 바로 나라고 답했다. (웃음) 이 장면을 찍기 위해 그동안 승마 훈련을 하지 않았나 싶더라. 무섭기도 했고, 일정도 촉박했는데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다.

- 배우로서 배우를 연기했다. 어떻던가.

주애가 신인배우다 보니 지금의 나를 비출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주애의 대사가 전부 내게 하는 말 같아서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갈매기> 때처럼 주애의 모든 대사를 기억하는데, 이를테면 (한 호흡으로) “맷집으로 버티고 악으로도 깡으로도 버티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언젠가 케이오되는 날이 오겠죠. 그런데 그냥 하루씩 버티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라는 생각을 하면 막상 두려울 건 없어요”라는 대사는 정말 주애가 나를 위해 들려주는 위로 같다. 연기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는 1화의 대사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 학생 시절 배우 지망생들에게 연기 교습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점에서 희란에게 이입할 여지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이들을 좋아해서 시작한 일인데 오래 교습을 했다. 희란처럼 가르치진 않았고. (웃음)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아이들과 연기인데 이 둘을 동시에 할 수 있으니 즐거웠다. <애마>의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응원해주는 가장 큰 지원군이 당시 가르쳤던 학생들이다.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이번 작품에 학생들이 힘을 얻을 만한 대사가 많아서 꼭 봐주었으면 한다.

- 지금 주애를 연기하며 ‘행복했다’, ‘소중했다’라는 감상을 답변마다 보탠 걸 알고 있나. 그렇게 사랑했던 주애와 어떻게 헤어졌나.

<애마>를 촬영하는 내내 작품에만 100% 몰두하며 살았다. 휴차가 있어도 외출도 삼가고 사람과 대화도 안 할 정도로 작품에 빠져 살았다. 나가봤자 승마, 탭댄스 강습을 받거나 헬스장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조용한 성격인테 <애마> 를 찍고 나서 더 심해졌다. (웃음) 그렇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그런 캐릭터가 신주애라서 좋았다. 지금도 주애의 말을 생각하며 힘을 얻는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촬영이 끝나면 캐릭터를 보내줘야 하는데, 주애는 지워지는 게 아깝고 싫어서 많이 울었다.

- 주애는 자신이 배우를 꿈꾸게 된 순간을 구체적으로 기억한다. 주애처럼 배우가 되고 싶었던 단일한 계기가 있나.

주애만큼 명확한 순간은 없다. 친구들은 내가 중학생 때 선생님들 성대모사를 너무 잘해서 연기자가 될 걸 알았다던데, 정작 나는 중3 때까지 장래희망이 무조건 시인이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저 학교 공부만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대학에 가서 연기 전공을 하면서 비로소 연기를 꿈꾸는 동기들을 처음 만났다. 잊을 수가 없는 게 1학년 수업 때 모두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스펙트럼도 다양했다. 눈으로 말하는 배우, 천만 배우, 대체 불가능한 배우…. 모두와 구체적인 꿈을 갖고 있다는 게, 이들과 같은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때 연기에 애정을 많이 느꼈다.

-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달리 보게 된 영화 연기가 있나.

배우를 꿈꾸게 한 두편의 작품이 있다. <파이란>과 <웰컴 투 동막골>이다. 정확히는 각 작품의 장백지, 강혜정 배우에게 충격을 받았다. 두 영화 속 선배들을 보며 연기 이상의 순수한 경지를 목격한 것 같다. 배우가 연기로 한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헤집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원체험이라 기억이 생생하다.

- 세종대학교 재학 당시 교내 연기대상을 두번이나 받았다고. 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몇편의 단편영화를 찍는 동시에 무대에도 올랐다. 무대연기와 매체연기 중 어디에 마음이 기울었나.

둘의 매력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매체연기가 조금 더 재밌는 것 같다. 아무래도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카메라가 섬세하게 잡아주니까. 하지만 연극은 꼭 다시 하고 싶다. 몇 개월 동안 사람들과 붙어 지내면서 조명 아래서 짜인 동선으로 연기하는 즐거움이 크다. 같은 회사의 이주영 배우가 지금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하고 있는데 재밌어 보이더라.

- 주애는 5화에서 ‘애마부인’을 보고 실망한 듯한 친구들에게 “단지 내가 애쓴 것. 이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라고 고백한다. 주애처럼 <애마>의 주연배우로서 작품 공개 이후 시청자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나.

그저 재미있게, 느껴지는 대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아도 보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마> 안에 녹아 있는 수많은 감정들, 좋은 대사들, 볼거리들을 온전히 즐겨달라. 바라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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