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바우테르 살리스 감독의 <아임 스틸 히어>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개인적인 기억에서 출발해 가장 보편적인 독재의 기억에 가닿는다. <중앙역>(1998)과 <모터싸이클 다이어리>(2004)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과작의 감독이 선택한 신작은 자신의 청소년기를 관통했던 실제 비극, 그리고 그 비극을 딛고 일어선 한 여성의 길고 긴 저항기다. <아임 스틸 히어>가 2024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 2025년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고 이후 세계 각지에서 고루 호평받은 이유는 그들의 싸움이 브라질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 폭력, 가족 해체, 트라우마의 전승과 치유- 이 모든 주제들은 20세기 후반의 민주화 역사를 거친 많은 나라들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특히 한국 관객들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인간의 존엄성과 회복력에 대한 보편적 찬가 <아임 스틸 히어>와 바우테르 살리스의 창작 여정을 아홉 가지 질문을 통해 돌아본다.
Q1. <아임 스틸 히어>의 1971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영화는 1971년 브라질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70년대 초,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은 군사독재 정권의 통제가 날로 강성해지고 있다. 전 국회의원 출신인 실존 인물 루벤스 파이바(세우통 멜루)와 그의 아내 유니스(페르난다 토히스)는 다섯 자녀들과 함께 단란한 중산층의 행복을 누린다. 해변가에 위치한 가족의 집은 그들의 친구들을 위해 언제나 문을 열어둔 상태다. 애정과 유머, 교류로 가득 찬 한 가족의 문화는 어느 날 군부가 루벤스를 납치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맞이한다. 혼자 남은 여성, 다섯 아이들의 어머니 유니스 파이바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절망으로부터 자기 자신부터 재창조해야 한다.
Q2. 바우테르 살리스는 왜 파이바 가족의 실제 이야기에 이끌렸을까
루벤스와 유니스의 아들, 마르셀루 후벵스 파이바는 2015년에 자신이 6살 때 경험한 가족의 비극을 쓴 회고록 <아임 스틸 히어>(Ainda Estou Aqui)를 발표했다. 여기에 파이바가(家) 아이들과 한 동네에 살면서 친구로 지냈던 살리스 감독의 실제 경험이 더해져 영화의 도화선이 됐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파이바 가족이 머물렀던 해변가 집을 선명히 묘사한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문에는 열쇠가 없었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드문 일이었다.” 살리스는 그곳에서 다양한 그룹과 정치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금지된 음악을 들으면서 유년을 보냈다. 한마디로 파이바 가족은 미래의 영화감독에게 영화관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그러나 <아임 스틸 히어>는 결정적으로 제3의 시선이 아닌 어느 강인한 여성 가장의 시점에 충실하다. “유니스 파이바라는 한 여성의 경험 속에는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과 한 국가가 짊어진 상처의 거울이 담겨 있다”는 것이 감독의 관점이다.
Q3. 유니스 관점으로 바라본 이야기가 비로소 드러내는 것은
‘미망인’으로서의 슬프고 무력한 자세를 거부하고 인권변호사로 거듭난 유니스 파이바의 사례는 국가 폭력으로부터 삶을 재건하는 인물의 강인함뿐 아니라 가부장적 유대 밖에서 가족을 건사한 여성의 새 역사를 쓴다. 영화 속에서 유니스는 시종 절제된 모습인 동시에 내내 저항한다. 이는 매우 희귀한 형태다. 한 여성이 해체된 가족의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의 서사는 곧 브라질이라는 국가의 기억을 재구성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살리스 감독은 바로 이런 “개인과 집단의 적확한 중첩”이야말로 <아임 스틸 히어>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라고 말한다.
Q4. 브라질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재구성하는 바우테르 살리스의 미학은
바우테르 살리스를 현대 브라질영화의 결정적인 작가 중 한명으로 만든 세 작품으로 <중앙역>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그리고 이번 <아임 스틸 히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지를 대필해주는 냉소적인 전직 교사가 아버지를 찾는 문맹 소년과 브라질 내륙을 여행하며 서로에게 구원받는 이야기(<중앙역>), 젊은 의대생 체 게바라가 친구와 남미 대륙을 오토바이로 여행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목격하고 혁명가로 각성하는 과정(<모터싸이클 다이어리>), 1970년대 브라질 군사독재 시절 남편이 실종된 후 홀로 다섯 자녀를 키우며 인권변호사로 거듭나는 유니스 파이바의 삶(<아임 스틸 히어>)은 모두 브라질/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개별 인물의 물리적, 정신적 여정으로 치환한 작품들이다. 살리스 영화의 미학은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과 시적 감성의 독창적 결합으로 정의된다. 롱테이크, 자연광, 부분적인 비전문 배우의 활용을 통해 날것의 현실감을 구현하면서도, 역사적 상실과 폭력이 드리운 누추한 현실을 따뜻함과 존엄성으로 승화시키는 품격을 보여준다. 브라질 시네마 노보의 급진적 정치성과는 달리 개인적 구원과 화해에 중점을 두는데, 이는 선정주의를 배제하고 관객을 성숙한 윤리적 성찰로 이끄는 살리스의 방식이다.
Q5. 왜 긴 시간이 필요한가
영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파이바 가족의 행복했던 일상, 루벤스의 실종 이후 혼란과 적응의 시기가 전개되는 1970년대. 그리고 25년 후 루벤스의 죽음을 국가가 인정하면서 진실이 공공연해지는 시점인 1996년이다. 브라질 정부가 루벤스 파이바의 공식 사망증명서를 발급하자 유니스는 언론 앞에서 군사독재 범죄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요구한다. 서사의 종결을 예감하게 될 이 무렵에 영화는 2014년으로 이동해 초로의 유니스와 어느덧 중년이 된 자녀들의 가족 모임 장면을 보여준다. 특기할 만한 첫 번째 건너뜀- 25년의 이동- 은 유니스의 가족이 스스로를 재건하기까지 걸린 수십년의 느린 분투를 감각하게 한다. 그리고 두 번째 건너뜀- 18년의 이동- 은 알츠하이머 환자가 된 유니스를 돌보는 자녀들이 중심에 나오면서 <아임 스틸 히어>를 전승에 관한 영화로 발돋움시킨다. 영화 도입부와 결말부의 가족 식사가 대구를 이루면서 역사적 기억이 순환하는 구조 또한 완성된다.
교롭게도 살리스 이후 브라질 영화사의 가장 중요한 이름일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가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발표한 신작 <시크릿 에이전트> 역시 당대의 국가 폭력이 긴 시간을 건너뛰어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재해석되는 풍경을 서술한다. 3부로 구성된 <시크릿 에이전트>는 1977년을 배경으로 하며, 주인공의 숨겨진 과거를 재구성하기 위해 플래시백과 현재의 성찰, 미래 세대와의 연결을 오간다. 두 거장은 장르적으로는 상이한 접근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 자체를 기억장치 삼아 공식 아카이브가 무시하거나 나아가 지우려 한 세계를 재건하면서 권위주의의 유산을 심문한다. 두 영화는 기어코 긴 시간을 도움닫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인물들을 살아 있는 아카이브로 만든다.
Q6. 필름은 어떻게 쓰였나
딸의 관심을 사로잡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여지는 슈퍼 8mm 화면은 1970년대 중산층 가정의 따뜻한 일상을 향수 어린 시선으로 포착한다. 거리에서 아이들이 달리고 부부가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소소한 일상은 직후에 모두 박탈당한 무엇이 된다. 영화의 중반부로 갈수록 화면은 점점 탈색되고 어두워진다. 35mm 필름 질감이 무게감을 더하며 취조실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가족의 내면을 대변한다.
Q7. 유니스와 그 가족은 왜, 웃는가
남편의 죽음을 안 이후에도 유니스는 아이들을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려간다. 가장이 강제 실종되고 남은 어머니와 자녀들의 슬픔을 주문하는 신문기자의 카메라 앞에서는 보란 듯이 웃고 또 웃는다. 그들의 웃음은 단순한 자존심이나 체면을 지키려는 의지적 행위가 아니며 상실과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꺾이지 않는 가족애,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표현이다. 유니스의 이 특징적인 미소는, 긴 세월이 지난 뒤 남편의 사망진단서를 공식적으로 발급받은 직후에도 스며나와 역설의 슬픔을 더한다. 46살에 법학을 공부해 원주민 인권변호사가 된 유니스 파이바의 일생은 아이들을 키우고, 공부하고, 일하면서 삶을 계속해나가는 것이 독재에 대한 가장 강력한 거부임을 들려준다.
Q8. <아임 스틸 히어>가 오늘의 브라질에 건네는 말은
2019년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은 군부독재 시절 약 45명의 죽음 및 실종에 관여한 군사정보 부서를 이끈 수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브릴랸치 우스트라를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했고, 바우테르 살리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보우소나루가 2021년에 군부독재 시절의 고문관들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한 사실을 짚은 바 있다. <아임 스틸 히어>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권위주의를 향해 경고한다.
Q9. 어떤 장면이 한국 관객을 찌를까
1970년대 브라질 군사독재와 1980년대 한국의 군부독재는 시대적 배경만이 아니라 국가 폭력의 본질이 닮아 있음을 말한다. 유니스의 투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실종된 가족을 찾아 헤맸던 수많은 어머니들의 모습과 겹친다. 영화의 말미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유니스가 내내 무감동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TV에서 군부독재 시절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가 나오자 소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한국 사회 역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기억과 망각의 투쟁을 가리킨다. 화면에 루벤스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를 알아본 유니스의 얼굴에 파도가 치는 순간에 우리는 알게 된다. 유니스와 그녀가 남긴 유산은 아직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루벤스 파이바의 사망진단서는 도착했으나 그의 죽음은 영영 종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