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줘>는 마이크 리 감독이 14년 만에 현대 영국 가정의 부엌 안으로 돌아온 작품이다. 2010년 <세상의 모든 계절>이 공개된 이후 그는 18세기 말 영국의 화가 J. M. W. 터너의 예술혼을 탐구하거나(<미스터 터너>) 19세기 초 피털루 학살의 한복판을 누볐다(<피털루>). 마이크 리는 언제나 자신을 환대해온 칸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지어 텔룰라이드영화제까지 <내 말 좀 들어줘>를 경쟁부문에 초청하지 않자 “망작을 만든 건 아닐까” 하며 속앓이를 했다. 마침 <내 말 좀 들어줘>는 50년이 넘는 연출 인생 처음으로 자신의 노화를 체감한 작품이기도 한 터라 고민은 끊이질 않았다고. 하지만 토론토국제영화제가 <내 말 좀 들어줘>를 호명했고, 이후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져 수많은 영화 전문지가 2024년의 영화로 <내 말 좀 들어줘>를 선정했다. 영화제의 영광은 아쉽게도 조금씩 마이크 리를 비껴가지만 거장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해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할 것을 다짐한다. “<피털루>도 칸이 무시했다. 어쨌든 계속 싸워야지.” <내 말 좀 들어줘>를 둘러싼 열광을 뒤로한 채 차기작 구상에 한창이라는 마이크 리 감독과 <씨네21>이 나눈 대화를 전한다.
- 팬지(메리앤 장밥티스트)는 무균상태에 가까운 깨끗한 집에서 살며 매일 깊은 잠에 들지 못한 채 고성을 지르며 깬다.
우리는 팬지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다. 이러한 경향이 팬지가 거듭 반복해온 습관이며 그가 겪는 편집성 불안을 드러내는 만성적 징후다.
- 팬지의 공간을 만들어갈 때 스태프들과 어떤 논의를 거쳤나.
지금껏 만든 모든 작품이 반드시 거치는 표준 절차가 있다. 등장인물의 취향과 그들이 소유할 법한 물건을 포함해, 모든 아이디어와 캐릭터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뿐만 아니라 배우들, 미술감독, 의상 및 분장 디자이너, 촬영감독이 참여한다. <내 말 좀 들어줘>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고민한 과정이 영화 속에 충분히 드러난다고 본다. 팬지의 동생인 샨텔(미셸 오스틴)과 그의 딸들이 사는 집에 대해서도 유사한 논의를 병행했다. 두집의 분위기 대비는 영화의 미학을 구현하는 데 있어 의식적인 요소였다.
- 팬지는 모든 걸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 반면, 그의 남편 커틀리(데이비드 웨버)는 말보다 침묵을 택하는 사람이다.
팬지의 변덕스러운 성격과 커틀리의 과묵한 성향 사이의 대비에서 비롯된 긴장이 이야기를 끌고나간다. 커틀리는 오랜 세월 팬지와 부대끼며 터득한 자기만의 대응책이 있지 않을까. 아내가 수차례 내리치는 호통에 어느 정도 인이 박였을 테니 말이다. 커틀리와 팬지 사이의 관계도 그런 복잡한 감정의 결과다.
- 커틀리의 조수 버질(조너선 리빙스턴)은 등장 분량은 짧지만 허투루 쓰인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늘 시간과 시계에 관해 다양한 대화 거리를 제공한다. 버질은 왜 시간에 골몰한 사람이어야 했나.
당신도 버질 같은 사람을 만난 적 있을 것이다. 특정 주제에 유독 몰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나. 버질이 몰두하는 주제가 마침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가 몰입한 주제는 얼마든지 다양해질 공산이 크다. 다만 팬지와 커틀리의 삶이 끝없이 늘어지는 무료함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시간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 당신은 인물들을 마냥 연민하진 않지만 그들을 냉소에 자빠뜨리지도 않는다. 살아 있는 인물을 그릴 때 당신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나.
나는 언제나 인간사를 진실하게 묘사하고 싶다. 냉소만은 내 천성에 없기를 바란다. 감독으로서 인물을 창조할 때의 태도는 고민의 정도로 표현할 수 없다. 내가 내리는 선택을 충동적이라거나 신중하다고 칭할 수 없다. 이야기가 그저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과 이해로부터 비롯하길 희망한다.
- <내 말 좀 들어줘>의 팬지, <세상의 모든 계절>의 메리(레슬리 맨빌), <비밀과 거짓말>의 신시아(브렌다 블레신), <인생은 향기로워>의 니콜라(제인 호록스) 등 당신은 언제나 고독에 몸부림치는 여성들을 응시해왔다. 인간 내면의 적막을 다루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갖나. 근원적 고독 속에서 자맥질하는 인물이 주로 여성인 점은 우연인가.
내 목표는 언제나 같다. 삶과 존재에 관한 일체를 이야기하고 싶다. 고독은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다. 나는 고독한 남성들도 많이 그려왔다. 이번 작품의 모지스(투웨인 배럿)를 포함해 <네이키드>의 브라이언(피터 와이트), <세상의 모든 계절>의 로니(데이비드 브래들리)와 켄(피터 와이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반면 <해피 고 럭키>의 포피(샐리 호킨스)를 위시해 러스 신이 연기한 <드높은 기대>의 셜리, <세상의 모든 계절>의 제리까지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외로울 새 없는 여성들도 자주 조형했다.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품어왔다. 인간이라면 살아 있기 때문에 삶이 제공하는 기쁨과 고통을 경험한다. 이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공평하다. 여성에게 초점을 맞춘 선택은 일면 무작위에 불과하다. 한데 다른 차원에서 답할 수는 있다. 주류 영화에서 여성배우들은 남성배우들만큼 자신이 가진 모든 기량을 펼칠 기회가 적다. 그래서 배우들과 협력해 풍부하고 사실적인 여성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평생 헌신해왔다.
- 배우들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인물의 전사를 만들다보면 캐릭터에 관해 여러 정보가 생길 터다. 이를 영화로 재구성하려면 무얼 뺄지 결정하는 일이 어렵겠다. 편집 단계의 판단 준거가 궁금하다.
무얼 보존하고 무얼 제외하는지를 논하자고 한다면 모든 예술은 즉흥성과 질서, 탐구와 정제, 그리고 창의적인 선택의 과정을 포함한다고 답하겠다. 내가 영화에 이르는 과정은 당신이 언급한 ‘충분한 대화’만으로 요약할 수 없다. 훨씬 더 복잡하며 깊이를 요하는, 정교한 절차다. 배우들은 캐릭터에 몰입한 상태로 인물의 행동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즉흥연기를 통해 유기적 작업과 창의적 논쟁을 거치는 동시에 풍부한 현장 탐구를 동반한다. 각 장면에서 발생하는 인물의 결정적 행동이 촬영 장소에서 창조되기도 한다. 고로 캐릭터와 장소는 필수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후반작업에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나의 작품은 수많은 영화와 비교해봐도 촬영 분량의 대부분이 최종 개봉판에 반영된다. 하지만 편집 과정은 여전히 정제의 과정이다. 결국 영화의 보존과 제외를 위해선 모든 요소가 필연적으로 개입한다.
- 그레타 거윅 감독과 대담 중 필름 메이킹의 정수가 ‘증류’라고 말한 적 있는데.
증류는 무엇으로부터 본질적이거나 유용한 요소를 추출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증류는 바로 내가 직전 질문에 대해 답한 그 과정과 다르지 않다.
- <인생은 향기로워>부터 당신과 함께한 촬영감독 딕 포프가 지난해 타계했다. <내 말 좀 들어줘>가 그의 유작이다.
딕 포프는 뛰어난 장인이며 진정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와 나는 영화 스타일에 대한 엄격한 취향뿐 아니라 인생 철학과 세계관을 공유했던 사이다. 그의 상실이 지금도 사무치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