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리의 <비밀과 거짓말>에서 검안사 호텐스로 분한 메리앤 장밥티스트는 영화 말미 다음과 같은 대사를 말한다. “진실을 말하는 편이 가장 좋아. 그러면 아무도 상처 입지 않으니까.” 그로부터 28년 후, 메리앤 장밥티스트는 마이크 리 감독과 ‘불편한 진실’(Hard Truths)을 원제로 한 <내 말 좀 들어줘>로 재회한다. 장밥티스트가 연기한 팬지는 내 말 좀 들어달라며 자기 딴의 진실을 말하는 독설가다. 28년 전 호텐스의 바람과 달리 팬지가 쏟아내는 진실은 그저 불편하다. 팬지 또한 타인이, 특히 가족이 불편하다. 건강염려증에 사로잡혀 집 안 위생에 집착하지만 아들 모지스(투웨인 배럿)와 남편 커틀리(데이비드 웨버)는 협조할 생각이 없다. 동생 샨텔(미셸 오스틴)은 어머니의 날에 함께 성묘를 간 후 가족 동반 식사를 하자며 성화다. 팬지가 침묵할 때는 또 어떤가. 수차례 신랄한 악담이 지나간 후, 고단해진 팬지는 가족 식사 자리에서 입을 꾹 닫고 모든 소통을 차단해 자리를 가시방석으로 만든다. 그러니 팬지는 입을 열어도, 입을 닫아도 문제다.
극적인 실화만이 영화가 될까? 영화화되는 주인공은 정해져 있을까? 이를테면 <내 말 좀 들어줘>의 팬지는 편의점에서 “봉투 드릴까요?”라고 묻는 점원에게 “그럼 이걸 들고 가리?”라며 쏘아붙일 작자다. 누구든 이런 광경을 보고 ‘영화 같다’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어디서나 볼 법한 사람의 알 법한 하루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점원 말고는 굳이 기분 나쁠 사람이 없고 이렇다 할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과민한 손님도 실상 곁에 한명쯤은 있을 것 같은 꼬인 사람이다.
그 점이 마이크 리에게 중요하다. 켄 로치와 더불어 영국의 키친 싱크 리얼리즘의 태두인 마이크 리는 ‘부엌 싱크대 사실주의’라는 사조의 명칭 그대로 한끼 식사가 하루의 중요한 과제인 노동 계층의 일상을 담아왔다. 이들의 오늘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 말 좀 들어줘>의 팬지가 갑자기 장기를 살려 힙합 배틀에 나간다든가, <해피 고 럭키>의 긍정의 화신 포피(샐리 호킨스)가 큰 시련을 겪어 행복의 의미를 회의하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팬지는 시종일관 고통을 호소하고 포피는 영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마이크 리가 별날 것 없는 인물에게 영화주인공이 될 자격을 부여한다면 그건 인물에게 놀라리만치 섬세한 양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이크 리는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와 함께 지난 50년간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심층 탐구해왔다. ‘배우와 함께’에 주목하자. 마이크 리와 배우들은 인물의 창조에 호혜적으로 기여한다.
마이크 리라는 유일무이한 작가
<내 말 좀 들어줘>는 마이크 리가 메리앤 장밥티스트가 주연인 이야기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출발한 프로젝트다. 마이크 리는 배우에게 캐스팅 제안을 건네되 시나리오를 건네진 않는다. 아니, 시나리오를 건넬 수가 없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기 때문이다. 마이크 리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모든 배우에게 동일한 프러포즈를 한다. “이 영화에 출연해주세요. 어떤 영화가 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캐릭터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출연을 결정한 다음 협력해서 캐릭터를 만들어갈 테니까요.” 이때 마이크 리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덧붙인다. “당신은 이 작업이 끝날 때까지 절대 영화 속 배역이 아는 것 이상으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마이크 리의 현장에서 배우는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에 한해선 감독만큼 정통하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캐릭터에 대해서는 관객만큼 무지하다.
마이크 리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약 18주의 프리프로덕션이 필요하다. 배우는 감독과의 첫 미팅에 지인 5명의 신상 정보를 챙겨 나간다. 메리앤 장밥티스트도 신원 불명의 프로젝트를 위해 지인 5명의 목록을 적어갔다. 마이크 리는 충분한 대화 끝에 엔트리에 남길 사람과 제외할 사람을 선정한다. 장밥티스트는 이 과정에서 <내 말 좀 들어줘>가 쉽지 않은 프로젝트가 될 것을 직감했다. 다정한 이들은 모두 지워지고 고약한 사람들만 명단에 남았기 때문이다. 마이크 리는 목록에서 남겨둔 인물을 종합해 새 캐릭터의 기초를 만든다. 이후 감독과 배우는 긴 시간을 할애해 캐릭터를 공동으로 짓는다. 가정환경, 구직 과정, 음악 취향, 올여름 휴가지 등을 삶의 경험에 기초해 설정한다. 공동 작가로서 배우를 작품 창작에 동참시키는 방식은 배우에게 자연스럽게 몰입의 가능성을 높인다. 배우들은 자기가 연기할 배역의 전사를 써나가며 인물 내부로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을 훈련한다.
여전히 시나리오는 나오지 않았다. 배우들은 캐릭터의 설정을 인지한 채 즉흥극에 돌입한다. 이 즉흥극에도 마이크 리의 대원칙이 적용된다. <비밀과 거짓말> 즉흥극 당시 신시아 역의 브렌다 블레신은 호텐스로 분한 메리앤 장밥티스트가 말을 걸자 낯선 이가 쫓아온다며 당황해했다. 젊은 날 아이를 낳긴 했지만 그 아이가 흑인인지도, 신시아를 찾아올지도 모르는 채 현장에 갔기 때문이다. <베라 드레이크>의 즉흥극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베라(이멜다 스탠턴)와 그의 가족이 송년회를 보내는 동안 경찰이 들이닥친다. 베라가 가족들 모르게 불법 임신 중단 시술자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멜다 스탠턴은 이 상황에서 경찰이 닥칠 줄 몰랐다. 가족 역의 배우들은 그때까지도 베라의 다른 직업을 몰랐다. 그리고 경찰 역의 배우들은 즉흥극 전까지 누가 베라를 연기하는지조차 몰랐다. 마이크 리는 배우들이 즉흥극을 통해 인물로서 받은 충격과 감정을 체화해 그대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도록 유도한다. 즉흥극을 마친 후에 비로소 시나리오가 나오면, 배우들은 전체 대본 중 자신이 등장하는 부분만 읽을 수 있다. 마이크 리는 별도의 지시가 없는 한 인물 내부에 들어간 상태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이는 흔히 통칭되는 ‘메소드연기’와 반대 개념이다. 마이크 리는 배우들에게 객관화를 주지한다. 배우들은 절대 자신의 배역을 1인칭으로 칭할 수 없다. <내 말 좀 들어줘>의 현장의 경우 장밥티스트는 팬지를 ‘나’(I)가 아닌 ‘그’(She/Her)라고 3인칭화해 말해야 한다. 배역 안에 몰입하되 배역의 감정과 배우의 감정을 철저히 분리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다시 <내 말 좀 들어줘>로 돌아오자. 메리앤 장밥티스트는 이 작품으로 미국 3대 비평가협회상의 여우주연상을 모두 거머쥐었다. 이 기록은 <베라 드레이크>의 이멜다 스탠턴, <해피 고 럭키>의 샐리 호킨스도 동일하게 보유 중이다. 마이크 리 고유의 필름 메이킹은 배우에게 일생일대의 명연을 펼치도록 한다. 그는 한결같이 자기 방식을 관철했다. 캐릭터 스터디의 유일무이한 영토를 개척하며 스크린 위에서 서민의 복잡한 심리가 재현될 기회를 제공했고, 개인의 미묘한 감정이 표출될 권리를 보장했다. 배우가 연기 외의 배역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작가적 지위 한층을 개발했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감독과 배우가 함께 만든 인물형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통찰케 했다. 마이크 리가 영화의 투자자들에게 내거는 3무(無) 조건이 있다. ‘대본 없음, 캐스팅 논의 없음, 간섭 없음.’ 위 타협 불가한 조항은 수익 위주의 시장에서 점점 그의 신작 제작이 뜸해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내 말 좀 들어줘>는 전작으로부터 제작 시차가 가장 큰 작품이고, 인플레이션을 반영하면 가장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만약 마이크 리의 방식이 더이상 시네마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화가 인간을 응시하는 시선과 배우가 배역에 다가가는 연기론 전체를 통째로 잃는 셈이다. 가능한 한 오래 더 자주, 마이크 리의 세계가 영화와 인간이 모두 잘 살 수 있는 길을 비추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