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향한 배우 윤경호의 부지런한 사랑은 역할의 비중, 크기, 자리를 막론하고 종횡무진하는 모습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름이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몇번 불리지 못하는 역할들은 윤경호를 만나 어떻게 생명력을 얻을까. 농담적이고 능글맞다가도 묵직하고 강렬하게 쏘아오르는 다채로운 얼굴은 어떤 자리에도 쉽게 안착하는 그의 변화무쌍한 자산을 잘 보여준다.
<청춘시대2> 문효진 남자 친구 역
밝고 명랑하기만 했던 극의 분위기가 심도 깊고 무게 있게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이름 모를 낯선 남성이 벨에포크를 침입했던 그 장면부터다. 그의 정체는 송지원(박은빈)의 잊혀진 친구 문효진(최유화)의 전 애인. 이름도 없다. 광분에 가까운 남자의 발악은 이야기를 계획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기 충분하다. 편지의 주인 X를 찾아나섰던 드라마가 복수와 애도로 목적지를 재정비한 것도 윤경호가 이끌어낸 공포심 덕분. 효진의 죽음을 제대로 복수하라는 윤경호의 묵중한 목소리는 사실 망자가 생전 지원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지막 호소이기도 하다.
<도깨비> 김우식 역
<도깨비>는 윤경호의 터닝 포인트이자 대중에게 배우 윤경호를 각인시켰던 작품이다. 기억상실증에 빠진 저승사자는 희미한 기억들을 더듬는다. 윤경호는 그중 한때 김신(공유)의 충신이었던 김우식 역을 맡았다. 전장에서 죽음을 나눠 가진 둘은 900년 만에 현실 세계에서 다시 만난다. 전생을 알 리 없는 우식은 자신에게 많은 선물을 안겨준 김신을 아리송하게 바라보는데 이때 기쁜 듯 슬픈 듯 도무지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을 윤경호는 명확하게 그려냈다. 짤막하고도 강렬한 신.
<오 나의 귀신님> 방송 PD 역
소형(박정아)의 부탁으로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방송 촬영을 하게 된 셰프 선우(조정석)는 분주하게 공간을 마련한다. 정신없는 상황 속에도 그가 진득한 눈빛을 보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봉선(박보영). 메인 셰프와 주방 막내의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방송 PD는 봉선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무례하게 심부름까지 시킨다. 윤경호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 거들먹거리는 배짱, 속을 긁는 듯한 눈빛에 자극받은 선우는 그만 모두에게 (간질거리게) 고백하고 만다. “네. 저 얘랑 사귀어요. 그러니까 함부로 하지 마세요, 이 친구한테.”
<마녀의 법정> 구석찬 역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전담부 구석찬 계장은 진짜 공무직을 보는 것처럼 단정하고 꼼꼼하지만 의도치 않게 능글맞은 모습으로 실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특히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두 여성 마이듬(정려원)과 민지숙(김여진)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눈동자를 굴리는 것만 봐도 직장인의 애환이 느껴질 정도다. 사건을 해결하고 회식을 가려 할 때 마이듬과 민지숙이 자리를 떠나버리자, 남은 직원들을 붙잡고 “소주가 좋으세요, 맥주가 좋으세요?” 하고 묻는 연약한 모습이 자꾸만 눈길을 이끈다. 순하고 무해하게 힘없는 아저씨 역할의 정석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