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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아시아 여성 영화인의 힘
2001-11-14

여성의 속삭임, 세상을 향해 포효하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아시아에서 여성 영화인력의 숫자는 가파른 상승세에 있다. 한국의 경우 제작자는 이미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았고, 감독은 특히 올해의 활약이 눈부시다. 여타 아시아 국가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성 영화인들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며 각 분야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타이의 경우 여성 영화인력은 그동안 편집등과 같은 일부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었지만, 듀앙카몬 림차로엔처럼 타이영화산업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여성제작자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로저 코먼 문하에서, 그리고 홍콩영화인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제작자의 역할을 배웠고, 지금은 ‘시네마시아’라는 독립영화사를 차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녀는 타이에서 본격적인 독립영화제작 시대를 열어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제작자와 감독의 역할마저도 혼재되어 있던 영화제작 시스템을 근대화시키는데에 앞장서고 있다. 논지 니미부트르나 펜엑 라타나루앙, 옥사이드 팡 등과 같은 타이 뉴웨이브의 리더들의 등장에는 듀앙카몬의 역할이 큰 힘이 되었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그녀가 제작하고 논지 니미부트르가 연출한 화제작 <잔다라>를 만날수 있다.

타이영화에 이어 필자가 조심스럽게 주목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영화를 보자. 인도네시아영화의 미래는 전적으로 여성영화인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영화 흥행 1위였던 작품은 리리 리자의 <셰리나의 모험>(제 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자는 여성인 미라 레스마나이다.

그녀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영화의 기둥인 가린 누그로호의 제자이며, 동료 리리 리자, 리잘 만토바니, 난 아크나스와 함께 장편 극영화 <쿨데삭>을 공동연출한 바도 있다. <셰리나의 모험>을 성공시킨 그녀는 지금 ‘아이 시네마’라는 디지털영화 시리즈를 제작중에 있다. 인도네시아영화의 새로운 인력을 계속 발굴해내고 있는 것이다.

미라 레스마나의 동료이면서 이번에 자신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모래의 속삭임>을 발표한 난 아크나스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여성감독이다. 그녀의 영화경력은 다큐멘터리로 시작된다. 90년대 중반부터 스승인 가린 누그로호와 함께 ‘천개의 섬의 아이들’ 시리즈를 만들면서 그녀는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에 만든 그녀의 작품중 <어린 가수>가 제 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그녀가 발표한 <모래의 속삭임>은 그녀가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프로젝트로, 베리안역의 크리스틴 하킴과 의기투합하면서 완성시킬수 있었다.

크리스틴 하킴 역시 주목할만한 하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최고의 스타이면서 국제적인 지명도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도네시아 영화계에서의 그녀의 역할때문이다. 90년대 중반, 경제위기로 인해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이 거의 몰락하였을 때 그녀는 제작자로 나서기 시작하여, 직접 뛰어 다니면서 제작비를 끌어 모아 젊은 감독들의 작업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가린 누그로호의 걸작 <베개위의 잎새>(1998)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질수 있었다(<베개위의 잎새>는 제 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그런 크리스틴 하킴이 이번에는 난 아크나스의 데뷔작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모래의 속삭임>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영화이다. <모래의 속삭임>은 남편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한 모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0대 후반의 처녀 다야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늘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오는 꿈을 꾼다. 그런 딸을 엄마인 베린다는 우려속에 감싸고 돈다. 그리고, 어느날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나타나고 베린다는 이제 딸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모래의 속삭임>은 모녀간의 애증의 관계를 매우 서정적으로 풀어낸다. 그리고, 바람에 따라 쓸려다니는 모래를 그들 모녀관계의 상징처럼 담아내고 있다. 다야가 모래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근자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장면이다. 난 아크나스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살려 <모래의 속삭임>을 한편의 아름다운 시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아시아에는 부드러운 여성감독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의 마리로 디아즈 아바야나 이란의 타흐미네 밀라니, 락샨 바니 에테마드처럼 사회의 편견이나 부패한 권력에 대해 과감한 발언을 하는 힘있는 여성감독도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베이징 락>의 마블 청이나 <아이 러브 베이징>의 닝잉처럼 동시대의 사회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여성감독도 있다. 반면에 부드러움과 강렬한 에너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여성감독도 있다. 일본의 나오미 카와세가 바로 그러한 감독이다.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다큐멘터리 <포옹>이나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수자쿠>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함과 부드러움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다큐멘터리 <캬카라바아>에 이르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포옹>에서 그녀가 추적하였던 아버지의 정체(지금은 돌아가신)가 이번에는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야쿠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는 방법은 아버지처럼 자신의 등에 문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작품속에 담아내고 있다. 자신의 피학적 정서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일본에는 여성감독이 드문 편이다. 때문에 나오미 카와세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이러한 아시아의 여성 영화인들의 다양하고 강렬한 힘을 직접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