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말, 대만 영화는 이란 영화와 함께 눈부신 미학적 신세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 허우샤오시엔이 있었다. 민족의 상처를 성장의 통증에 실어보냈던 초창기를 지나 엄격한 형식미로 시간과 존재의 문제를 탐구해온 그의 필모그래피는 20세기 영화미학의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성취다.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한국을 첫방문한 이 쉰살의 거장은 신작 <밀레니엄 맘보>에서 이제 동시대 대만 젊은이들의 생활에 카메라를 갖다대고 있다. “이건 10년동안 만들어질 3부작의 미완성 서장”이라고 그는 말했다.
<밀레니엄 맘보>는 대만 젊은이들을 그린 3부작 중의 첫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3부작 구상의 동기가 궁금하다.
타이페이에 살고 있으면서도 타이페이를 잘 모르고 살았다. 나를 먼저 자극한 건 스트레스가 많기로 이름난 일본인들이었다. 내가 아는 30대 일본인 한사람이 투신자살을 했다. 성실하고 착한 전형적인 일본 직장인이었는데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럴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타이페이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타이페이는 정치적 혼란이란 짐이 한가지 더 있어 훨씬 복잡하다. 그게 가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생활상의 타이페이를 긴 시간을 두고 그려보고 싶었다. 그걸 10년 동안 3부작으로 만들 생각이다.
<밀레니엄 맘보>에서 스타일이 바뀌었다. 예컨대, 카메라가 대상에 이만큼 가깝게 다가간 적이 없었다.
대상이 변하면 스타일도 변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싫증을 잘낸다. 같은 소재를 두번 찍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지겹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지겨워진다. 이전까지 내가 다룬 소재는 대만이 변화해온 과정이었다. <남국재견, 남국>의 무대가 현대이긴 했지만, 그건 내가 거쳐온 현대였다. <밀레니엄 맘보>는 바로 오늘의 타이페이다. 이게 내 작품의 스타일을 바꿔놓은 건 확실하다. 오늘의 타이페이 젊은이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 스타일이 바뀌는 건 당연하다.
약물 복용이나, 테크노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찍기전에 실제로 얼마나 취재를 했나.
<남국재견, 남국>에서도 디스코장을 묘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실제로 음악하는 사람을 캐스팅했다. 그때 테크노바를 구경한 적이 있는데, 난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강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젊은이들은 모두 마약을 한 상태였다. 좌절감을 이기기 위해 마약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더 나도 한번 마약을 해봤다. 그랬더니 젊은이들하고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웃음)
<밀레니엄 맘보>는 어쩐지 별다른 준비 없이 찍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촬영 1년전에 음악하는 친구들을 캐스팅해서 한번 찍어봤다. 그런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배우를 쓰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고쳤다. 양조위, 장만옥을 쓸 생각이었는데, 두 사람이 <화양연화>에 먼저 출연해버렸다. 할 수 없이 서기를 캐스팅했는데, 그러다보니 시나리오를 또 고쳐야했다. 영화 촬영하면서 시나리오 수정을 병행했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거다(웃음). 하지만 시나리오대로 찍지 못한 건 사실이다.
오히려 미완성의 느낌을 노린 것 아닌가.
어차피 완성되긴 힘든 영화였다. 너무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이 영화는 계속 찍어나갈 영화 중의 서막이 될 것이다. 사실은 이전에도 그랬다. <남국재견, 남국>은 9개월 동안 3번 고쳐서 찍었다. 하기야 이 방면의 대가는 왕가위지(웃음). 그 사람은 한 영화를 15개월 동안 계속 고쳐가면서 찍으니까.
비키(서기)의 내레이션이 2011년의 시점에서 흘러나온다. 그렇게 시점을 잡은 동기는? 또 비키의 목소리인데도 자신을 ‘그녀’라고 부르는 이유는?
관점의 문제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다양한 각도에서 내다보기 힘들다. 2011년이라는 시점은 나이를 먹은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위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1년은 3부작이 완성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키가 자신을 그녀라고 부르는 건 그 자체로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호칭 자체가 이 영화의 객관적인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타이페이의 젊은이들과 함께 그들의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를 통해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면?
(손을 절래절래 흔들며)없다. 말을 해도 워낙 안들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웃음)
글 허문영 ·사진 손홍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