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씨네21>을 애독 중인 독자라면 개봉작 프리뷰 코너의 작품별 크레딧에서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의 이름을 심심찮게 목격했을 것이다. 2020년 문을 연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 <추락의 해부> 등 해외 예술영화의 배급은 물론 <거래완료> <최소한의 선의>와 같은 한국 독립영화의 배급에 힘써왔다. 올해 초 <애니멀 킹덤> <끝, 새로운 시작>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등을 수입, 개봉시키며 수입사로서의 행보를 본격화 중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은 소위 한국 수입사들에 붙는 ‘OOO 영화’의 수식처럼 ‘디에이치엘 영화’의 일군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은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강령: 귀신놀이> <데인저러스 애니멀스> 등의 프리미어 상영을 앞두고 있다. 부천으로 넘어가기 전, 한여름 극장가에 충격을 선사할 <사스콰치 선셋>이 미리 관객을 맞을 계획이다. <사스콰치 선셋>의 개봉 준비에 여념이 없는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의 이성우 대표를 만났다. <사스콰치 선셋>과 제7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상 수상작 <사운드 오브 폴링> 의 수입 비화는 물론 이성우 대표가 20년 넘게 영화계에 종사하며 느낀 아트하우스 시장의 동향을 정리해 전한다.
- <사스콰치 선셋>이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입소문을 낳은 후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스콰치 선셋>은 지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관객 반응이 정확히 반반으로 갈렸다. 궁금해서 시사에 참석했고 작품을 절반밖에 보지 못했는데도 영화제 내내 이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후반부는 어떨까, 엔딩이 어떨까 궁금해서 결국 한 차례 더 영화를 봤다. 아무도 안 살 것이 확실한 영화였다. 직원들의 우려도 있었고 가격도 높아 우선 구매를 건너뛰었다. 이후 칸영화제에서 아직 이 작품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번 더 구매 의사가 일었다. 칸영화제 이후 마침내 <사스콰치 선셋>을 갖게 된 이후로는 작품의 셀링포인트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리 애스터 제작에 선댄스 초청작이면 시네필들에겐 호응이 분명할 것 같았다. 먼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작품을 틀고 관객들의 1차적 반응을 보았다. 영화제 이후 관객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자주 보내주더라. ‘이런 작품’을 수입해줘서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웃음) 관객들을 위해 개봉한 작품이니 많이들 영화관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 올해 칸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상을 받은 마샤 실린슈키의 <사운드 오브 폴링>을 포함해 <엔조> <데인저러스 애니멀스>를 수입했다.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이 처음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을 구매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겠다.
올해 칸영화제는 특히 작정하고 출국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수상 촉이 좀 좋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의 <시크릿 에이전트>를 보자마자 와그너 모라가 남우주연상을 받을 것 같았다. 마샤 실린슈키의 <사운드 오브 폴링>도 상을 받겠다 싶었는데 심사위원상을 받아 다행이다. <사운드 오브 폴링>은 스틸과 포스터를 보자마자 여성 관객들을 위한 영화가 될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서로 다른 세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인 데다가 작품도 좋아 소구될 바가 크다고 보인다. 정작 영화를 나보다 먼저 본 직원은 상당히 난해하다고 했는데, 그럴수록 시네필과 평론가들이 할 말이 많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 칸영화제 감독주간의 개막작이었던 <엔조>는 어떤가. <120 BPM>으로 큰 호평을 받은 로뱅 캉피요의 신작이자 로랑 캉테의 유작이기도 하다.
직원들 반응이 좋아서 구매까지 이어진 경우다. 그런데 신기한 게 <엔조>를 샀다는 소식이 보도되자마자 한 투자배급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작품이 제2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식의 외신 보도를 미리 본 것 같더라.
- 2025년 상반기에 개봉한 수입작의 면면을 보면 회사가 확장을 꾀한다는 인상이다. 처음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을 접했을 땐 동명의 물류 배달 업체와 이름이 겹쳐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어떻게 출발한 회사인가.
2020년 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정점일 때 출발한 회사다. 영화계 스태프로 출발해 판씨네마가 서울씨네이던 시절부터 10년, 데이지엔터테인먼트에서 5년, 이후 퍼스트룩의 공동대표로 5년 근무한 후 내 손으로 차렸다. 처음엔 투자사가 있었다. 그 회사의 이니셜이 DH(디에이치)였다. 여기에 이성우의 성씨 L(엘)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사명을 디에이치엘로 가는 순간 동명의 물류 회사와 이름이 아예 똑같으니 앞에 ‘스튜디오’를 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투자사가 사라졌다. 이름을 바꾸자니 더이상 작명에 쏟을 에너지가 없었고 이미 법인명도 등록한 후였다. 다행히 창사 이후 주변 수입사나 관계자들이 회사 이름을 외우기 쉬워 좋다는 반응을 보여와 그냥 가자 싶었다. 꿈보다 해몽 아닌가. 수입작을 한국 극장까지 안전하게 배송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회사가 되고자 한다.
- 창사 초기에는 수입보다는 타 수입사의 예술영화 배급에 주력했다. 타사의 작품을 통해 자극을 받기도 하나.
수입사들의 A24 영화를 자주 배급하다 보니 자연히 A24의 관계자들과 만나게 됐고, <러브 라이즈 블리딩>을 수입 및 배급하게 됐다. 무엇보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향한 애정이 있다. 판씨네마에서 일하던 시절 <트와일라잇>의 흥행을 보기도 했고, 이후에도 스튜어트의 작품과 종종 연이 닿아 마치 딸 같은 배우다. 공교롭게 나한테 딸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영어 이름을 지어오라기에 크리스틴을 추천하기도 했다. 개봉이 쉽지 않을 걸 알았지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본 기억이 강렬해서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수입하고 싶은 영화의 경쟁이 붙어도 해외 세일즈사로부터 기존에 함께했던 회사를 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시작 단계이니 더 열심히 달려보려 한다.
- 극장의 미래를 낙담하는 시각이 팽배한 와중에 몇 아트하우스 영화들이 쏠쏠한 흥행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제 또한 예매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럴수록 수입사 입장에선 관객 모집단 분석 모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영화제만 가면 놀랍지 않나.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시네필이 대체 어디서 나왔나 신기하다. 특히 영화제가 팬데믹 이후로 매진 행렬을 이룬 현상을 주목하면 남녀노소 불문 아트하우스 시장에서 관객층의 확장은 확실히 있다고 보인다. 그럴수록 관객층을 특정하기란 어렵다. 10년 전의 50대 관객과 지금의 50대 관객은 차이가 크다. 나도 50대 초반인데, 우리 세대만 해도 영화를 향한 인식 지평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홍콩영화 키즈로 자라던 중 처음으로 직배사를 통해 수입된 외화를 청소년기에 접했고, 단관 시대가 저물고 멀티플렉스 시대가 도래할 무렵엔 이미 청춘이었거든. 극장과 영화의 변화는 물론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FIFA 월드컵, 심지어 계엄 사태까지 전부 본 세대인 것이다. 이 경험을 세대가 아닌 성별로 놓고 봐도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가령 여성 관객들이 영화를 훨씬 많이 찾는다는 통계가 이미 지표로 나와 있다. 다만 흥행을 예단하려면 20대 관객의 분석이 중요하긴 하다. 예매 추이야 전 세대가 비슷한데 경험상 영화의 흥행을 만드는 건 가장 젊은 관객층이다. 이들은 본인이 재밌으면 X 등의 플랫폼에서 기꺼이 자생적인 바이럴을 만든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의 향후 계획은.
앞으로도 아트하우스 영화들을 1년에 대여섯편은 꾸준히 수입할 의사가 있다. 빅타이틀 영화도 꾸준히 찾을 예정이다. 아직은 홍보대행사를 끼지 않고 회사 내부에서 마케팅도 함께하는데, 직원 모두가 ‘내 영화’라는 인식으로 마케팅을 할 때 우리가 보유한 영화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는다. 직원들의 말을 잘 들으려 한다. 옛말에 영화사 대표가 포스터 시안을 고르면 그 작품은 망한다는 속설이 있다. (웃음) 대표가 1번 시안을 맘에 들어 해도 젊은 직원들이 3번 시안을 선호한다면 3번 시안이 웬만큼 시장에서 통하는 것이다. 지금도 영화를 구매하기 전 모든 직원들에게 의사를 물어본다. 해외 마켓에서 스크리너 수급이 가능한 작품일 경우 국내 상주 중인 직원들이 한국에서 크로스체크를 마친 후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앞으로도 완성도를 갖추되 지금 관객들의 감각을 뒤쫓을 수 있는 작품을 찾아나서겠다.
제78회 칸영화제 수입작 일람
2025년 6월 기준, 제78회 칸영화제에서 수입된 작품 목록을 수입사별(ㄱㄴㄷ순)로 정리해보았다. 이 리스트엔 칸영화제 상영작뿐만 아니라 칸영화제의 마켓에서 오고 간 작품들의 목록을 포함한다. 국제영화제에서 또 극장에서 다음 작품들을 만날 날을 고대해보자.
그린나래미디어
<리빌딩> 감독 맥스 워커 실버먼
<센티멘털 밸류> 감독 요아킴 트리에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이즈 다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누리픽쳐스
<다이 마이 러브> 감독 린 램지
더쿱디스트리뷰션
<러브 온 트라이얼> 감독 후카다 고지
<왼손잡이 소녀> 감독 쩌우스칭
<스트로베리 문> 감독 사카이 마이
스튜디오 디에치이엘
<데인저러스 애니멀스> 감독 숀 번
<사운드 오브 폴링> 감독 마샤 실린슈키
<엔조> 감독 로뱅 캉피요
엠엔엠인터내셔널
<로메리아> 감독 카를라 시몬
영화사진진
<영 마더스> 감독 다르덴 형제
오드(AUD)
<르누아르> 감독 하야카와 지에
찬란
<굿 보이> 감독 벤 레온버그
<시크릿 에이전트> 감독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판씨네마
<리브 원 데이> 감독 아멜리에 보닌
<물의 연대기>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
<아르코> 감독 우고 비엔베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