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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흔들림과 충돌의 텍스트, <해피엔드> 타이틀과 포스터를 디자인한 마사키 레이 스튜디오 란 대표
이유채 2025-07-03

<해피엔드>의 수직으로 세워진 교장의 차만큼이나 잊기 힘든 것이 있다면 타이틀 로고다. 약간 기울고 층층이 겹쳐진 글자들은 극 중 지진으로 인한 흔들림, 우정의 불안, 감시의 공포 같은 감각을 불러낸다. 영화의 정서를 정확히 붙잡은 이 타이틀 디자인은 누구의 손에서 탄생했을까. 수소문 끝에 디자이너 마사키 레이와 연결이 닿았다. 2022년 도쿄 시부야에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란’(Studio RAN)을 설립한 그는 <해피엔드>의 타이틀 로고뿐만 아니라 크레딧, 프로모션 디자인 전반을 맡았다. 한편 국내 개봉 9주차를 맞은 영화는 6월25일 기준 관객수 11만8530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을 기록하며 장기 흥행 중이다. 10만 관객 돌파를 기념해 6월27일부터 소라 네오 감독과 배우 구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등이 다시 한국을 찾는다. <해피엔드>가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 영화에 얽힌 또 다른 수수께끼를 풀어줄 그에게 서면 인터뷰를 요청했고, 며칠 뒤 한국 팬들에게 감사를 더한 긴 답신이 도착했다.

사진제공 마사키 레이

- 현재 한국은 여름 장마철에 들어섰고, 얼마 전 대통령선거를 치러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감이 감지된다. 2025년 6월의 일본 분위기는 어떠한가.

내가 있는 6월의 도쿄 역시 장마철이라 제법 습하고 비가 자주 내린다. 나의 검은 개 ‘콘부’가 더위에 약해 오래 산책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선선한 날씨를 선호한다. 일본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이곳의 사회 분위기는 내가 가르치는 국제패션전문직대학교(PIIF) 패션 전공 학생들을 통해 주로 접한다. 학생들에게서는 일종의 체념과 무관심 같은 태도가 느껴진다. 반면 미국에 있는 친구들을 보면 훨씬 더 절박한 기운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일본에도 물론 사회적인 긴장감은 존재하지만 대체로 훨씬 더 조용하고 억제된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학생들이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조금 더 가졌으면 한다. 한편으로는 이곳의 문제들은 미국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인 사건들처럼 명확하고 시급하게 느껴지지 않아 쉽게 체감하기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해피엔드>를 언제 처음, 어떻게 보았나.

처음 본 건 2023년 겨울, 소라 네오 감독의 아파트에서였다. 편집자와 영화평론가를 포함해 8명 정도가 테스트 상영을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의 집은 전통 일본식 다다미방인 와시쓰였고, 탁자 위에는 모두가 기차역 근처 할머니에게 사온 귤이 한가득 쌓여 있어 분위기가 무척 아늑했다. 이날 이후 영화는 여러 면에서 변화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언제나 초반부, 학생들이 달려서 동아리방으로 돌아가는 신이다. 그 장면은 영화가 가진 에너지, 동료애, 감성을 가장 잘 담고 있으며 내가 홍보물 디자인을 구상할 때도 그 장면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 <해피엔드> 작업을 맡게 된 출발점이 궁금하다.

이전부터 소라 네오 감독의 작업을 좋아해왔다고 들었다.네오와는 몇년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다.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샐러리맨은 왜 서핑보드를 들고 다니는가?>라는 책을 출간했을 때다. 당시 독립 문화 매거진 <NEUT>와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를 진행한 에디터가 네오의 친구 오구라 후미코였다. 그가 “네오가 기사를 읽고 깊이 공감했다”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도쿄와 뉴욕을 오가며 성장한 공통의 경험이 우리 사이에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만들어주었다. 네오가 처음으로 일적으로 연락을 준 건 2022년, ‘GINZAZA’라는 팝업 프로젝트였다. 그가 <해피엔드>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아이코 마스부치와 기획한 단편영화 상영 행사였는데 함께 작업하면서 뜻이 잘 맞았다. 그래서 이후로도 꾸준히 협업을 이어왔고 <해피엔드>도 그 중 하나였다.

<해피엔드> 타이틀 로고.

- 타이틀 로고에 어떤 감정과 의미를 담아 시각화하고자 했나.

영화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따뜻하고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분위기를 디자인에도 반영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그래픽은 일단 출력한 후 다시 스캔해 컴퓨터로 불러오는 과정을 거쳤는데, 그 과정 자체가 물리적인 손상과 질감을 더해줬다. ‘HAPPYEND’라는 타이틀은 단어 자체가 감정적으로 강한 여운을 남긴다. ‘HAPPY’와 ‘END’가 어딘가 상충하는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라 그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느슨함, 순응, 불안이 뒤섞인 상태를 로고에 담으려 했다. 네오, 마스부치와 논의했던 핵심 중 하나는 일부 타이포그래피가 형식의 제약을 벗어나는 구조였다. 그런 작은 일탈이 은근한 해방감의 힌트가 되었으면 했다.

- 전체 작업 과정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려준다면.

이번 프로젝트는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됐다. 처음에는 로고와 크레딧, 해외용 포스터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일본 내 홍보물 전체로 작업 범위가 확장됐다. 네오의 첫 장편 극영화 디자인을 맡은 건 매우 영광스러우면서도 부담이 컸다. <해피엔드>가 그에게 얼마나 개인적인 작업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고 컨셉은 비교적 빠르게 정리된 반면 포스터디자인은 여러 단계를 거쳤다. 각기 다른 분위기를 담은 컨셉을 제안했고, 최종적으로 선택된 시안은 앞선 제안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너무 추상적일까 봐 망설였다. 그런데 네오가 내 스케치북에서 그 시안을 보자마자 바로 끌렸다고 말해줬다. 시적이고 비정형적인 비주얼 방향을 바라고 있었기에 그의 선택이 무척 기뻤다. 서로의 감각이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 인터내셔널 포스터의 절반 이상을 서서히 덮는 주황빛은 불안과 슬픔이 공존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상단에는 감시 카메라에 달리는 친구들이 포착된 모습을 배치했다. 이러한 색감과 이미지, 레이아웃을 선택하기까지 어떠한 고민이 있었나.

로고와 같이 포스터 디자인에서도 모순된 정서를 담고자 했다. 극 중 젊음의 들뜬 기운과 움직임, 그리고 지진이라는 사건이 가져오는 불안감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 고도화된 감시 기술과 낡고 아날로그한 질감 사이의 대비를 중요하게 보았다. 관객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이미지만으로 일종의 불협화음이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이야기는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해외용 포스터에서는 등장인물 전체가 함께 등장하는 구성을 택했다. <해피엔드>의 모든 인물이 서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해피엔드> 일본 개봉용 포스터.

- 반면 일본 개봉 포스터에는 육교 위 유타와 코우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인터내셔널 포스터의 톤 앤드 매너와는 사뭇 다른데,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나.

<해피엔드>의 일본 배급사 비터스 엔드(Bitters End)가 준 피드백에는 해외용 포스터가 일본 관객에게는 다소 차갑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국내용 포스터는 유타와 코우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일종의 시각적 트릭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했는데, ‘HAPPYEND’라는 타이틀이 그렇듯 포스터 속 두 사람의 순간이 영화 감상 전과 후에 전혀 다른 인상을 주길 바랐다.

- 답신 서두에 자신을 ‘이중언어 디자이너’(bilingual designer)라고 소개했는데, 스튜디오 란과 본인을 한국 독자에게 좀더 자세히 소개해줄 수 있을까.

일본과 미국, 두 문화권을 아우르는 이중언어 디자이너로서 서로 다른 두 배경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다. 문화와 역사, 사회적 이슈가 디자인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연구하고 기록하는 것이 나의 중요한 작업 방식 중 하나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를 공유하는 클라이언트나 기관과 함께 일하고자 늘 노력하고 있다.

- 앞서 언급한 저서 <샐러리맨은 왜 서핑보드를 들고 다니는가?>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작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일본 디자인에 내재된 제도적 백인 우월주의와 서구화를 주제로 한 이중언어 출판물’이라고. 소라 네오 감독처럼 당신 역시 창작 작업을 통해 동시대 일본 사회를 꾸준히 탐구해온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시위 당시 도쿄에 살면서 매우 고립된 기분을 느꼈다. 일본 사람들이 세계적인 이슈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논란이 될 수 있거나 잘못 전달될 우려가 있는 의견을 표현하는 데는 주저하는 면이 있는 듯하다. 나는 두 문화를 오가는 사람으로서 인권문제를 너무 편향되거나 공격적으로 들리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주제를 디자인이라는 렌즈를 통해 다뤄보기로 했으며 이 책에서는 제도적인 백인 우월주의가 일본의 광고, 브랜딩, 시각문화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해피엔드> 인터내셔널 포스터.

- 음악과 영화에 관한 개인적인 취향을 나눠준다면.

작업할 때는 주로 랩과 힙합을 듣는다. 요즘 즐겨 듣는 아티스트는 빌리 우즈와 볼디 제임스다. 집중이 필요할 때는 플로팅 포인츠의 《Promises》 앨범을 틀어놓는다. 종종 영화 관련 디자인 작업을 하긴 하지만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굉장히 좋아하고 그중 <우연과 상상>을 가장 좋아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무성영화에 뮤지션 이시바시 에이코의 즉흥연주가 결합된 공연 <GIFT>에 참여한 경험은 매우 특별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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