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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 2월19일 폐막, 금곰상은 파트리스 셰로의 <인티머시>“괜찮은 영화, 흥미로운 영화는 많지요. 하지만 베를린에서 위대한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요?”칸과 베니스를 위시한 세계 어느 영화제 상영관보다 월등히 호화로운 포츠담 광장 인근의 극장 로비에서 만난 관객과 기자들은, 하나같이 베를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또렷한 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이들의 이야기는 치명적 결함이라기보다 베를린영화제가 영리하게 확보한 칸영화제와 차별화된 존재 근거에 가깝다. 역사와 현실의 정치적 뿌리에 늘 한발을 걸치는 영화 선정, 일반 관객에게 문을 활짝 여는 현대적 시설의 상영관, 어느 누구도 1/10을 보기 어렵다는 방대한 작품 수, 할리우드 스타로 대중을 유혹해 파노라마와 포럼 부문까지 힘을 실어주는 행사 설계. 우아하고 햇살 찬란한 칸, 베니스와 어깨를 겨누며 축축한 늦겨울 중유럽에서 베를린영화제를 지탱해온 이 모든 장점 혹은 단점은 지난
제5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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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를 맞아 연일 비가 내리는 로스앤젤레스 USC(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지난 2월9일부터 18일까지 한국영화의 현재를 돌아보는 영화제가 열렸다. ‘근대화의 그늘: 한국사회의 변화와 뉴 코리안 시네마’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는 최근 해외영화제나 <춘향뎐>의 상업적 배급망 진출 등 외형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한국영화의 현재를 있게 한 뒤안길을 돌아보는 의미있는 행사였다.우울한 근대, 한국영화는 뭘 했나‘근대화의 그늘’이 상징하는 바처럼 80∼90년대 영화를 통해 되짚어본 한국사회의 근대화 모습은 대부분 우울한 이미지였다. 채윤정(USC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곽한주(USC 영화비평 전공 박사과정)씨가 선정한 상영작들은 <바보선언>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우묵배미의 사랑> <서편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칠수와 만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깊고 푸른밤> 등 1
한국영화는 어제, 어디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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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유바리 문화스포츠센터에서는 한국에서 날라 온, 정말이지 막 나가고 정신 없이 날뛰는 짧은 애니메이션이 공개되었다. 현재까지 모두 4편(편 당 러닝 타임 3분 정도)의 에피소드가 완성된 웹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이 유바리 영화제의 디지털 시어터 부문에 초청되어 극장 관객들에게는 처음으로 선을 보였던 것이다.젊은 창작 애니메이션 팀 J TEAM이 만든 <아치와 씨팍>은 그 알 듯 말 듯한 이상야릇한 제목부터 이해가 되면 그것이 대략 어떤 모양새를 갖춘 작품일지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애니메이션이다. 두 주인공들의 이름이기도 한 아치와 씨팍은 각각 '양아치'와 '씨X X끼' 하는 비속어와 욕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이 정도만 알아도, 이들 캐릭터들이 '삼류 정신'에 충실한 펑크들(punks)임을 눈치채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아치와 씨팍>은 그 배경부터가 아주 불온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하드(Hard)라는 이름의 마약이 금전적 가치를
웹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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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메> 일본 극장 입성 준비삿포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유바리라는 작은 도시는 처음부터 영화적인 볼거리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슈파로 호텔 사이로 난 좁은 도로엔 낮은 상점 건물들마다 온통 지금은 추억의 영화로 자리잡은 오래된 영화들의 그림 간판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찰리 채플린, 존 웨인, 마릴린 먼로, 알랭 들롱, 장 가뱅에서부터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와 이시하라 유지로 등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옛 스타들이 지극히 고풍스런(?)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만을 보고서 과연 이곳은 영화와 관련된 도시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이 거리를 조금 둘러보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유바리 키네마 거리(夕張キネマ街道)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 아이러니하게도 시네마, 즉 영화관이라곤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눈 속에 잠긴 이 도시의 지나친 고요함마저 떠올리면,
제12회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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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5살 아역을 시작한 것. 돌아가신 김기영 감독님하고 아버지하고 친하셨는데, 그래서 우연히 눈에 띄어 영화를 하기 시작한 게 지금 내가 영화와 가까이 있게 된 아주 큰 사건이었던 같다.중3 때 영화를 관둔 것도 나름의 큰 사건이다. 계속했다면 아역 이미지를 벗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그리고 보편적인 일반인의 감정을 갖고 생활했기 때문에 결국 성인이 돼서 어떤 인물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됐기 때문에.대학 시절 베트남어를 전공한 것. 졸업과 동시에 베트남이 망했기 때문에 먹고살 일이 없어서 갈 길이 영화쪽으로 정해졌다.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로 성인연기자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야쿠쇼 고지0살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4번째 형까지 낳고 부모님께서 이제 그만 낳자 하셨는데, 형제 중에서 가장 무뚝뚝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15살 처음으로 친구랑 포크밴드를 결성했다. 학교축제 때 공연을 했는데, 난생 처음 러브레터를 받아봤다.고3 때 이대로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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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쇼 고지젊었을 때는 나이든 배우들을 보며 너무 안일하게 연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그게 안일하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젊을 때는 힘으로 연기를 한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기분이나 감정으로 연기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연기를 하면서 다른 배우들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연기를 하면서 무언가 목표를 보고 달려가야 하고, 나이를 잘 먹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류이치 슈라고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잘 나왔던, 이미 돌아가신 배우를 좋아한다. 류이치 슈는 30대부터 아저씨나 할아버지 역을 했다. 그가 나이먹어가는 모습을 보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안성기돌아가신 김승호 선생, 허장강 선생. 그분들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한 대배우는 한국에 아직 안 나왔다고 본다. 그리고 외국배우 중에서는 로버트 드 니로를 예전부터 지금까지 죽 좋아하고 있다. 그의 완벽주의자적인 연기란! 요즘엔 나이가 좀 들어서 예전 같은 매
내 인생의 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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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 vs 야쿠쇼 고지 한,일 국민배우가 말하는 삶과 영화“한국이 처음이라고? 그랬나?” “그러게요. 이렇게 가까운 줄 알았더라면….” 안성기와 야쿠쇼 고지(役所廣司). ‘국민배우’라고 말을 하면 그저 마주보며 씩 웃어버릴 듯한 이 한·일 두 국민배우의 만남은 성공한 남자들 특유의 격조와 몇번 만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을 듯한 막역함으로 처음부터 멋들어졌다. 둘이 손을 맞잡고 있으니 다른 듯 같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마주한 듯한 이들은 생일도 똑같은 1월1일. 1952년생인 안성기가 1956년생인 야쿠쇼 고지보다 4살이 위다. 1996년 오구리 고헤이 감독의 <잠자는 남자>에 출연하며 처음 만났던 이들은 그때 일본에서 몇달을 함께 보내며 급속하게 가까워졌고 “이복형제 역으로라도 함께 또 영화를 하자”고 말할 만큼 형제에 가까운 우정을 나누었다. <쥬바쿠> 홍보차 야쿠쇼 고지가 한국을 찾으면서 이들의 재회는 성사됐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르기로 소문
국민배우,국민배우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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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로 입문, 어떤 작품에 참여했나.코믹 연기를 곧잘 한다는 주위의 격려에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들어가선 곧바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느라 정작 무대하곤 거리가 멀었다. (웃음) 전대협에서 일하던 마지막 해 92년. 사회단체에 들어갈까 하던 차에 정지우 감독을 만났다. 같은 과 3년 후배였는데,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스무살 젊은이에게>라는 대학생 의식화(?) 비디오물을 제작하고 있던 영화제작소 청년은 거대 조직에 몸담았던 내가 배급책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큰 도움은 못줬다. (웃음) 96년이었나. 장편영화를 하자는 이야기가 내부에서 나오면서 다른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 이외의 스탭들에겐 특히 그랬다. 당시 이선미 프로듀서는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제작부로, 나는 동숭아트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기획, 배급쪽 실무를 맡으면서 관객의 반응을 직접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어 좋은 때였
아름다웠던 80년대, 액션으로 풀어볼까 -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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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로 입문, 어떤 작품에 참여했나.솔직히 나는 영화광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는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대학교 때는 음악동아리를 했고 대학졸업 뒤엔 죽 무역일을 했다. 그러다 94년 결혼을 하고나니 이게 아니다 싶었다. 무역일이란 게 늘 해외로 나돌게 마련이라 가정을 꾸려나가기엔 적합한 일이 아니었다. 좀더 안정된 일을 찾던 중 음악동아리 선배가 ‘블루캡’이라는 영화사운드 업체에서 음반기획이나 영화관련 일을 해보자 해서 이건 무역보다는 안정적이겠다 싶어 수락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이후 영화 관련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챙겨 보고 신씨네에서 하는 6개월짜리 영상아카데미 프로듀서양성과정을 들었다. 그때 강의를 한 사람들이 심재명, 차승재, 신철, 오정완 대표 등이었고 김승범 튜브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원동연(<돈을 들고 튀어라>의 원작자)이 내 동기였다. 거기서 영화인력들을 알현하고 프로듀서가 뭘
좋은 나이 마흔, 늦게 핀 영화인생 - 최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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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가 됐나.‘무식한 놈.’ 대학 졸업작품을 만들 때 네거필름이 뭔지 모른다고 했다가 선배에게 들은 말이다. 그런 말을 들어도 쌌다. 83년, 재수를 해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건 순전히 충동의 산물이었고, 연극연출 전공이었다가 4학년 때 영화로 전공을 바꿨으니까. 그것도 영화를 원해서라기보다 졸업공연을 해야 한다는 게 엄두가 안 나서였으니까. 신방과 대학원을 마치고 MBC에서 FD생활을 6, 7개월 했다. 출퇴근, ‘내 멋대로 해라’라는 점이 좋았다. 사실 영화는 그전부터 좋아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을 밟았다. 영화에 대해 발언하고 싶다, 직접 만들고 싶다. 당연한 수순 아닌가. 93년 <영화, 이렇게 보면 두배로 재미있다>란 나 홀로 평론집 비슷한 책도 한권 냈다. 94년 <그 섬에 가고 싶다> 연출부 제의를 받았다. 솔깃했다. 단호하게 “하겠다” 했다. 그러나 언제나 내 인생의 갈림길에 훌륭한 이정표를 제시해 주곤
영화, 이렇게 만들면 두배로 재미있다 - 김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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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가 됐나.대학 졸업하고 광고회사에서 광고기획을 했고, 그뒤엔 매니지먼트사에서 배우 매니저로 일했다. 언니(심재명)의 권유로 명필름에 입사해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이 93년. 입사해서 <그 여자 그 남자> <닥터 봉> <게임의 법칙>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등의 마케팅 일부터 배웠다. 명필름에서 <코르셋> 제작을 준비하는 동안, 경상비를 벌어볼 요량으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홍보했다. 서른살이 되던 해에 <접속>을 준비했고, 프로듀서로 데뷔했다. 명필름은 언제나 이은 감독과 심 대표, 그리고 나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역할을 나눠 공동 진행하는 식이다. <해피엔드>의 경우 크레딧은 기획으로 올랐지만, 캐스팅과 마케팅 등을 진행하기도 했고, 부제작을 맡았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이은 감독이 외적인 시스템 가이드를 하고, 내가 시나리오 등 제작
십대영화 욕심난다 - 심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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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로 입문, 어떤 작품에 참여했나.국문과를 나온 나는 어느 날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공채시험을 봐 화천공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구로아리랑> 카피라이터를 한 게 영화 일의 시작이었다. 1년간 기획실 일을 배웠는데, 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생소하고 어색하고 힘들었다. 관두고 사보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글을 썼다. 그런데 영화 일은 마약과 같더라. 동아수출공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영화 홍보 일을 시작했다. <천국의 계단> <원초적 본능> <늑대와 함께 춤을>…. 한국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외화가 훨씬 많았다. 3년 넘게 일하니 지겨웠다. 배급 일이 하고 싶어졌다.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타서 그 돈으로 일본에 갔다. 배급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대학에 창작쪽 과만 있더라. 3개월 만에 돌아와 1년간 프리랜서로 일했다. 기회는 그무렵 찾아왔다. 이춘연 대표가 강우석 프로덕션에 사람이
울리거나, 혹은 웃기거나 - 김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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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로 입문했나.국문과를 졸업한 뒤 영등포 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하다가 광고회사에 들어가 카피라이터 일을 했다. 글 쓰겠다는 생각으로 쉬던 중 어느 날 친구가 ‘영화 안 해 볼래’ 하고 제안을 했다. 해서 기획, 홍보사였던 영화기획정보센터에 들어가 마케팅을 담당했다. 당시가 90년이었을 것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을 마지막으로 이화예술필름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기획시대에 들어가게 됐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청바지처럼 꽉 끼는 포르노그라피’라는 카피를 뽑아 성공적으로 마케팅을 한 뒤 유인택 대표에게 제작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케팅은 너무 무시당하는 분위기였고, 내가 영화에 대해 기술적으로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꼬리치는 남자>의 제작 총지휘를 맡게 됐지만 흥행과 비평에서 실패했다. 당시 충무로의 풍토를 너무 몰라 제작과정에 지나치게 개입했고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도 만들지 못했다.
단군신화를 꿈꾼 적 있나 - 조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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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로 입문, 어떤 작품에 참여했나.옛날 이야긴 하기 싫은데(웃음)…. 오랫동안 노문연(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활동하다가 92년 김동원, 변영주 감독 등과 함께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을 하는 푸른영상 창립멤버로 들어갔고, 장산곶매에도 잠깐 머물렀다. 유의미한 시간들이었지만 극영화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삼호필름과 LIM에 들어갔는데 두곳 모두 한국영화 제작에 의지가 없어 때려치웠다. 이후 첫 작품으로 기획시대에서 문승욱 감독과 <이방인>을 만들었다. 폴란드에서 찍으면서 그곳의 안정된 시스템, 스탭들의 연륜 등에 놀랬었다. 98년엔 박기형 감독과 함께 씨네2000에서 <여고괴담>을 만들었다. 예상보다 크게 잘돼 흥행 PD, 호러 PD라고 불렸지만, 별로 달갑지 않았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민규동, 김태용 감독과는 다른 영화에서 만날 요량이었는데, 원래 염두에 뒀던 감독과 뜻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연락했다. 그러
일상은 NO, 주변은 YES! - 오기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