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 다른 이름R.W. Fassbinder; R.W. 파스빈더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45-05-31
- 사망1982-06-10
- 성별남
소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독일영화의 전설이다. 1982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많은 영화를 찍었으며 ‘뉴저먼 시네마’ 감독들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파스빈더는 40여편에 이르는 다작으로 유명하며 연극연출, 텔레비전 영화, 라디오에 이르기까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일했다. 자기 영화와 연극에도 곧잘 주연으로 출연했으면서도 영화연출 작업을 쉬지 않았다. 심지어 69년과 70년 사이에는 무려 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불가사리처럼 다양한 소재를 자기 취향에 맞게 먹어치웠던 것이다. 가끔 날림영화가 끼어 있을 정도로 파스빈더는 속전속결주의로 영화를 찍었지만 그의 영화는 늘 매끈한 만듦새와는 상관없이 창의적이며 도발적인 것이었다. 파스빈더는 뉴저먼 시네마 세대의 다른 감독들처럼 나치즘에 대한 반성과 산업화한 독일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것이 새로운 독일영화의 나아갈 길이라고 믿었다. 파스빈더의 대부분의 영화는 독일사회에 남아 있는 파시즘의 잔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 전위적인 연극활동을 해온 파스빈더의 영화적 뿌리는 아방가드르다. 69년에 만든 <카젤마허 Katzelmacher>와 <저주의 신들 Gotter Der Pest>(1969), 70년에 만든 <미군병사 Der Amerikanische Soldat> (1970)와 <성스러운 창녀를 주목하라 War-nung Vor Einer Heiliger Mutte>(1971)와 같은 파스빈더의 초기 영화들은 답답할 만큼 느리다.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배우들은 연기하는 게 아니라 대사를 암송하는 것 같다. 관람하기에 괴롭고 기존 영화관습을 하나도 따르지 않는 이런 연출수법은 반사실주의적이고 반환상주의적인 브레히트의 방법론을 영화에서 추구한 것이다. 파스빈더는 무대에서 연기할 때도 미움받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여 야유를 보내는 관객을 향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마치 자신이 관중의 환호를 받는 것처럼 무대 위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 초반 파스빈더는 곧 관객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게 필요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파스빈더는 관객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으로 멜로드라마를 연구했다. 파스빈더는 당시 독일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 스타일을 특히 주도면밀하게 검토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1974)는 멜로드라마 어법으로 인종차별주의 유산이 남아 있는 독일사회를 비판한 파스빈더의 대표작이다. 여주인공 엠마는 나치당원 출신의 늙은 청소부인데 젊은 아랍계 남자 알리와 사랑에 빠진다. 엠마는 유색인종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과 이웃의 따돌림받을 뿐만 아니라 알리와의 관계에서도 만만치 않은 인종적 벽을 실감한다. 엠마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다. 한때 동료 청소부들로부터 따돌림받지만 동료들과 화해한 후에는 동구에서 온 젊은 청소부에게 똑같은 짓을 한다. 엠마와 동료들은 계단에 앉아 점심을 들면서 마치 그 여자가 없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월급인상에 관해 쑥덕거리며 대책을 얘기한다. 이런 불온한 공기가 퍼져 있는 사회에서 ‘진실한’ 사랑이란 불가능한 것이라는 파스빈더는 이야기를 정지시키는 느닷없는 침묵의 순간을 군데군데 집어넣으면서 멜로드라마의 감상주의를 순화시키고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창조했는데, 더글러스 서크의 <순정에 맺은 사랑>을 독일판으로 만든 것은 말랑말랑한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에 정치적 효과를 끼워넣으려는 장치였다.
파스빈더는 하나의 스타일로 묶을 수 있는 감독이 아니었다. <에피 브리스트 Effi Briest> (1974)는 잉마르 베리만의 실내영화를 보는 것처럼 부르주아 가정의 실내에 배경을 한정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해간 탁월한 형식주의 영화다. 그 밖에 파스빈더의 작품목록에는 154일 동안 촬영하고 총 13부로 구성된 <베를린 알렉산더 Berlin Alexander Platz>(1980)와 같은 대작도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들고 찍기로 촬영했고 전체 화면수가 40개를 넘지 않을 만큼 긴 화면 호흡으로 찍은 <왜 R씨는 미쳐 날뛰는가 Warun Lauft Herr R. Amok?> (1970)와 같은 실험적인 작품도 있었다. 파스빈더의 영화는 후기작으로 갈수록 유장해졌고 ‘독일 연방공화국 역사에 관한 연작’인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Die Ehe der Maria Braun> (1978)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 Veronika Voss>(1982) <롤라 Lola>(1982)는 특히 유명했다. 그런 한편으로 파스빈더는 동성애자인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폭스와 그의 친구들 Faustrecht Der Freiheit>(1975)이나 유작이 된 <쿼렐 Querelle>(1982)과 같은 영화를 찍었다.파스빈더는 생전에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문장을 즐겨 인용했다. “나는 인간의 일원이 되고자 하지는 않고 인간성을 표현하려고만 하는 일이 죽도록 지겹다.” 파스빈더는 예술가가 보통사람과 유달리 다른 존재인가에 의문을 표했다. 그는 따뜻하고 진정어린 감정은 항상 속되고 황폐한 것이라고 믿었다. “예술가의 타락한 신경이 느끼는 노여움과 냉담한 무아경만이 예술적인 것이다. 예술가는 우리의 인간성과 따로 외딴 곳에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게 국외자의 심정으로 있으면서 파스빈더는 나치즘의 유산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독일이 새로운 파시즘에 물들까 항상 우려하는 심정으로 생애 내내 독일사회를 치고 박았다. 무엇보다 그의 창조적인 에너지는 현대 독일영화역사를 압도할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