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넌, 내게 왔을까?”
12년 전 사라진 딸,이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그녀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자신의 지난 날을 고백하기로 한
‘줄리에타’의 아름다운 용기를 담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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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to. Julietamore
나의 딸, 안티아
널 찾을 희망에 다시 빠져버렸어
내겐 남은 게 없어 너만 존재할 뿐
너의 부재가 내 평생을 채우고 파괴하고 있어
네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전부 전하려고 해
그때 넌 어렸고, 내게는 고통스러운 이야기였거든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LETTER from. Pedro Almodovar
MOTHER
‘줄리에타’는 마드리드에서 딸 ‘안티아’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두 모녀는 ‘안티아’의 아버지이자 ‘줄리에타’의 남편 ‘소안’의 죽음으로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슬픔은 함께하는 이들을 가깝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슬픔을 함께하는 이들을 더욱 멀어지게 하기도 하는 법이지요.) ‘안티아’는 18세가 되는 해에 아무 말 없이 어머니를 떠나버립니다. ‘줄리에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딸 아이를 찾지만 노력할수록 그 동안 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는 안타까움만 커질 뿐입니다. <줄리에타>는 불확실성을 견뎌야 하는 한 어머니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보내고, 그들을 인생에서 지운 채 아무런 의미 없는 듯이 혹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듯이 살아가도록 이끄는 운명, 죄책감, 그리고 불가해한 미스터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DESTINY
<줄리에타>는 붉은 천을 가까이 들여보면서 시작되는데, 우리는 곧 그 안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바로 ‘줄리에타’의 심장입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테라코타의 감촉과 색을 지닌 조각품이 보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앉아있는 한 남성을 나타내는 모형으로 줄리에타는 이를 종이상자 위에 올려놓고 버블랩으로 조심스럽게 감쌉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 옷을 입히는 것처럼 말이죠. 지금은 2016년입니다.
이 조각품은 나중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 일찍, 1985년에 이를 만든 여성 조각가의 스튜디오에서 보여집니다. 이 조각가의 이름은 ‘에바’입니다. 아마 ‘에바 가드너’의 이름을 땄을 것입니다. ‘에바’는 <원 터치 오브 비너스>에서 비너스 역할을 맡은 여배우만큼이나 아름답고 자유롭습니다. 비너스는 사랑, 아름다움, 그리고 풍요의 여신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세가지 요소는 ‘에바’의 스튜디오에도 가득합니다.
1985년의 어린 ‘줄리에타’는 앉아있는 남성 조각품을 두 손으로 감쌉니다. 이번에도 마치 어머니 품 안의 아이처럼, 체중과 살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 다음 장면에서 ‘에바’는 점토로 새로운 형상을 빚고 ‘줄리에타’는 그녀를 지켜봅니다. 진흙은 서서히 남성의 엉덩이와 다리의 모습을 띱니다. ‘줄리에타’는 말하죠. “신들은 찰흙과 불의 도움으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을 만들었어요.” ‘에바’는 작업을 계속하며 귀를 기울입니다. ‘줄리에타’는 고전 문학을 가르칩니다. 그녀는 창조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다가 결국 자신이 임신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장면들은 여성의 힘을 보여줍니다. 여성을 남성의 창조자로써 말이죠. 남성들은 그 손에 비해 아주 작은 조각품으로 표현됩니다. 마치 킹콩의 손 안에 있는 금발의 포로와 동일한 비율입니다! 서로에게 그를 넘겨주는데 이는 실제 ‘에바’와 ‘줄리에타’의 경우와 같습니다. 여성은 남성에게 생명을 줄 뿐 아니라 무척 강인하게 보여집니다. 싸우고 고통 받으면서도 인생이 주는 행복함을 누립니다. ‘줄리에타’에게 그녀 자신보다 강인한 것은 오직 운명뿐인 것 같습니다.
DESIER
저는 언제나 기차에 매료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부터 시작해 영화 속에 나오는 기차가 참 좋았습니다. 평소에 기차에서 촬영하는 꿈을 자주 꿀 정도입니다. 마차나 말이 나오는 서부영화를 제외한다면 모든 운반수단 중 기차가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차는 모든 장르에서 선보여질 수 있죠. 하지만 제 기억 속 최고의 장면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반드리카 초특급><열차 안의 낯선 자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로 기억합니다. 프리츠 랑감독의 <인간의 욕망>도 굉장한 기차씬이 등장합니다.
<줄리에타>의 리허설을 위해서 1980년대의 낡은 열차의 한 객실에 들어섰을 때 저는 곧바로 ‘이번 촬영은 힘들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카메라나 장비가 들어설 자리가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순진하게도 저는 1985년의 열차가 그렇게 작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진드기가 가득해 지옥 같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은 ‘줄리에타’의 운명이었으니까요. 실제 각본 작업 역시 야간열차의 차례대로 써내려 갔을 정도입니다. 무척이나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장소에서 ‘줄리에타’는 인간의 양극인 삶과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죽음에 대응하는 육체적 사랑 역시 기차에서 만나게 되죠. ‘줄리에타’가 ‘소안’과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두 번 모두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모두 죽음에 대한 회신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GULITY
2003년, ‘줄리에타’의 딸 ‘안티아’는 18세가 됩니다. 성인이 된 그녀는 3개월 동안 아라곤의 피레네 산맥으로 수련회를 떠나고 ‘줄리에타’는 한번도 떨어진 적 없는 딸과의 이별로 괴로움에 사로잡힙니다. ‘줄리에타’는 ‘안티아’가 문을 나서 계단 아래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최대한 불안함을 숨기면서 말이죠. 그 장면은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두 개의 이별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안티아’에게 숨겨왔던 과거입니다.
첫 이별은 기차에서 일어났습니다. 1985년, ‘안티아’를 갖게 된 그 야간 열차에서 눈가가 촉촉한 한 남성이 ‘줄리에타’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녀에게 말을 겁니다. 그는 무척이나 못생기기도 했지만 들러붙는 태도에 ‘줄리에타’는 차갑게 답합니다. 그녀는 무척이나 불편했기 때문에 결국 그를 뒤로하고 객실을 떠나버립니다. 그 후, 그 남자는 열차에 몸을 던집니다. 누가 봐도 그는 열차에 올라서기 전에 이미 죽음을 결심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줄리에타’는 그에게 냉정하게 대한 자신을 자책했으며 자신이 객실을 떠날 때 그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그녀를 괴롭게 하는 또 다른 모습은 남편 ‘소안’과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그는 같은 날 열차에서 만난 어부입니다. ‘줄리에타’와 ‘소안’은 가족을 꾸려 레데스라는 갈리시아의 한 어촌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한지도 13년이 지났을 때 ‘줄리에타’와 ‘소안’은 ‘소안’의 과거에 대해서 부부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집을 나설 채비를 했고 ‘소안’은 남아서 대화를 하자고 빌어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소안’은 떠나를 그녀를 당혹스러운 듯 애원하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그 날 오후 ‘줄리에타’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소안’은 집에 없었고 결국 그 대화는 평생 마무리되지 못합니다. 그녀가 집을 떠난 후 바다로 나간 ‘소안’은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인해 물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줄리에타’는 계단 밑으로 사라지는 ‘안티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이 떠나버린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 두 남자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두 번의 비극적인 이별은 우연과 악운의 결과였지만 ‘줄리에타’에게는 항상 짐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치명적인 운명처럼.
CHANCE
<줄리에타>는 캐나다의 여류 소설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입니다. 저는 앨리스 먼로의 [Runaway]를 읽은 후 [Chance][Soon][Silence] 총 세 편의 작품을 각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두 ‘줄리엣’이 주인공이지만 연결된 스토리는 아닙니다. 하여 영화를 위해 각각의 이야기를 통일시키고 필요한 부분은 새로 꾸며가는 순서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Runaway]라는 책은 이미 <내가 사는 피부>라는 영화에 소품으로 선보여진 바 있습니다. 교도소장 마리사 파레데스가 포로 엘레나 아나야에게 건네준 접시 그리고 아침상에 앨리스 먼로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마음 속에서 이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나 봅니다.
초본은 이야기의 배경을 캐나다에서 미국으로만 옮긴 채 스페인어로 작업을 했습니다. 세 개의 이야기를 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각색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유롭게 작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불확실성 때문에 무너져버렸어요. 각본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지 아니면 영어로 감독하는 것에 대한 자신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어와 문화, 장소를 낯선 곳으로 바꾸는 것이 겁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기 전까지 초본을 계속 지니고만 있었습니다.
2년 전쯤 초본을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스스로를 평가했던 것보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배경을 스페인으로 옮겨오기로 결심하고 다시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점점 앨리스 먼로의 스토리에서 멀어졌지만 <줄리에타>만의 날개를 단 것처럼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앨리스 먼로의 스토리가 <줄리에타>의 본원이기는 하지만 캐나다 작가의 스타일로 나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앨리스 먼로의 팬들이 꼭 <줄리에타>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MEMORY
수년간 딸의 소식을 듣지 못한 ‘줄리에타’는 그녀의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해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인간미 없는 아파트로 이사합니다. 어떠한 물건이나 그림도 장식되어있지 않은 곳입니다. 고요하고 꾸밈없는 하얀색의 공간은 그녀 마음 속의 공허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입니다. 하얀 공간은 ‘줄리에타’의 억누르는 감정을 향한 제 자신의 갈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시각적인 부분에서 언제나 스스로의 감각을 억제해왔습니다. 예를 들면 ‘그 누구도 노래하지 않는다. 캐릭터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영화의 장면들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단 한 가닥의 유머나 혼합 장르도 존재하지 않는다.’ 등 적어도 제 스스로 캐릭터의 공간에 대한 기준은 단호한 편입니다.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듣고 다시 그녀를 찾을 희망에 사로잡힌 ‘줄리에타’는 ‘안티아’와 함께 살았던 아파트로의 이사를 원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동일한 아치 아래, 동일한 구조의 아파트에서 살게 됩니다. 그녀는 딸과 함께 살던 장소에서 다시 한번 딸을 기다려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줄리에타’는 “돌아오면 모두가 제자리에 있을 거야. 예전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과거에 살던 곳을 찾게 되는 법입니다. 마치 인생이 힘든 시간을 연습할 기회를 제공하는 듯이 말이죠.
저는 <줄리에타>가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멜로 드라마 장르는 아닙니다. 미스터리가 가미 되어있는 강렬한 드라마에 가깝지요. 평생을 함께 살아온 누군가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집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드릴 수도 없지만 말이죠. 이로 인한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줄리에타’는 그런 고통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줄리에타>는 이유 없이 떠난 누군가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SCENERY
미켈 나바로는 ‘에바’스튜디오의 조각상들을 빚은 조각가입니다. 저는 2년 동안 ‘앉아있는 남성’상과 함께 살아왔고 그가 저의 영화에 출연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풍경, 노래나 물건들은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혹은 재발견하거나 물건인 경우 샀을 때부터) 내 영화에서 모습을 보일 거라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 것들은 참을성 있게 수년간 간직하며 적당한 영화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곤 합니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는 란사로테의 검은 해변 풍경이 그러했고, <욕망의 낮과 밤>에서는 잠수부가 그러했습니다. ‘안티아’와 ‘베아’가 우울한 ‘줄리에타’를 닦아주던 갈색 수건도 그렇습니다. 루시안 프러드 전시회의 포스터는 ‘줄리에타’가 '로렌조'와 함께 살때까지 4년을 기다렸습니다. ‘줄리에타’가 쓰레기통에 버린 파란 봉투를 찾으려고 뒤적일 때, 프러드의 모습이 그런 그녀의 모습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기서의 쓰레기통 역시 처음 샀을 때부터 제 작품에 등장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 제가 사용하는 쓰레기통 입니다.
바다 그림은 갈리시아의 화가 세와네의 작품입니다. 갈리시아의 집에 실제 그 곳의 화가들과 공예사들의 작품을 담길 원했습니다. 세와네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참 큰 행운이었죠. 영화 속 등장하는 타투의 중심은 디스 베를린이 디자인했으며, ‘안티아’가 마드리드 방에서 되찾은 바다 그림 또한 그가 완성시켜주었습니다.
MUSIC
저와 함께 20년 동안 작업해온 작곡가 알베르또 이글레시아스가 <줄리에타>를 처음 봤을 때 음악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편집실에서 막 완성된 헐벗은 상태 그대로가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음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저에게 음악은 스토리에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각본과 함께 음악 역시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뼈대이기 때문입니다.
알베르또에게 시간의 전이, 캐릭터의 중복을 강조하는 전이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명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 혹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그의 음악처럼 섬세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음악 말입니다. <줄리에타>는 겉보기에는 투명하고 부드럽지만, 알베르또가 음악을 더하려고 하자 이를 거부했습니다. 마치 사람처럼 말이죠. 우리는 무척이나 절망스러웠습니다. 수많은 음악을 듣고 고민하던 중 히로시 테시가하라 감독의 <모래의 여자>에 선보여진 도루 다케미쓰의 음악을 선택했고 알베르또 또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다케미쓰는 그를 구스타프 말러와 알반 베르크에게로 이끌었고 그 뒤로 모든 것이 운명처럼 원활하게 풀렸습니다.
알베르또 이글레시아스는 최고의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칼 같은 흐름을 갖춘 음악이 아닌 캐릭터의 목소리, 스타일과 어우러지는 음악이었습니다. 저는 ‘줄리에타’의 눈빛에서 음악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매우 긴 곡선이 살아있으며 생물체처럼 움직이고 대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음악이었습니다. 많은 대사가 존재하는 장면에 어울릴만한 음악을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하면 대사와 음악이 서로 싸우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알베르또는 이 문제를 천재적으로 해결했습니다.
파이널 크레딧에는 단 하나의 노래가 존재합니다. 차벨라 바르가스가 노래하는 ‘Si no te vas’(만약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의 가사는 ‘줄리에타’가 내뱉는 마지막 대사의 연장선입니다. “만약 떠난다면 내 세상은 끝나버릴 거야. 너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말이야. 떠나지 마. 떠나지 말아줘. 네가 떠나는 순간 나 또한 세상을 떠날 테니까.”
ACTRESS
<줄리에타>는 저의 여성 세계로의 복귀를 상징합니다. 모든 여배우들이 스스로에게 새로웠습니다. 과거에는 로시 드 팔마와 수지 산체스와 함께 작업한 경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져가야 할 위험요소 중 하나는 ‘줄리에타’라는 캐릭터를 위해서 두 여배우를 캐스팅한 것이었습니다. 20세부터 40세까지는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를, 40세 이상부터는 엠마 수아레스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동일한 배우가 한 캐릭터의 넓은 나이 폭을 연기하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습니다. 긴 세월을 화장이나 분장만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5세의 여배우가 50세 여인의 무게를 표현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주름만이 아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월의 깊이와 시간의 흔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두 명의 배우를 한 캐릭터에 캐스팅하는 것에는 위험요소가 존재합니다. 영화가 완성된 이후 저는 제 선택해 대해서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드리아나 우가르테와 엠마 수아레스는 내 세계 속의 뮤즈인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빅토리아 아브릴, 마리사 파레데스, 세실라 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P.S.
저의 작품 대부분은 한 번 이상 관람됩니다. <줄리에타>는 한 번 보고 스토리를 아는 상태로 두 번째 볼 때 훨씬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관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첫 만남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는 법이지요. <줄리에타>도 마찬가지 입니다.
LETTER to. Julieta
엄마, 아직 마드리드에 사는지 모르겠지만
달리 알고 있는 주소가 없어서
엄마 생각이 나 슬퍼서 미칠 것 같아
평생 지금처럼 괴로웠던 적이 없어
내가 사라졌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지 알겠어
그땐 짐작도 못 했어
그때 알았더라면 아무도 아프지 않았을 텐데
LETTER from. Pedro Almodov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