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전갈의 생태를 묘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산적들, 사제, 군인, 관료가 차례로 등장하고,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사랑을 벌인다. 이들의 사랑이 부르주아들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받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요한 이야기인 셈인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엉뚱하게도 사드의 소설 의 후일담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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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뉴엘(1900~1983), 20세기와 함께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미국, 멕시코를 거쳐 프랑스에서 긴 영화 역정을 마감한 이 거장은 생애의 대부분을 상업영화를 만들며 보냈으면서도, 당대의 주류문화를 거스르는 ‘스캔들’로서의 영화를 꾸준히 만든 특이한 존재이다.more
그는 첫 작품인 <안달루시아의 개>(1928)에서 마지막 작품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화에 일관된 세계관이 초현실주의였다고 주장한다. 부뉴엘은 인간이 자신의 본능과 비이성적인 면을 제도와 문명이라는 틀을 가지고 다스리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끈질기게 보여주려 하였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종교――그의 성장 배경인 카톨릭 교회――를 향한 공격, 유럽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야유와 경멸, 그리고 무의식과 본능의 영역인 성에 대한 탐구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음흉하리만큼 우회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러한 부뉴엘 영화의 특징은 그의 두번째 영화 <황금 시대>에 가장 잘 압축되어 있다. 상영시간 1시간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전갈의 생태를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산적들, 사제, 군인, 관료가 차례로 등장하고,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사랑을 벌인다. 이들의 사랑을 부르주아들이 끊임없이 방해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인 셈인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엉뚱하게도 사드의 「소돔의 120일」이라는 소설의 후일담으로 넘어간다. 더욱이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패륜아’ 가운데 한 명이 예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다가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도 사막에 버려진 십자가이다. 이러한 이야기 사이사이에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부르주아의 삶의 단편들이 끼여드는데, 자막과 대사와 음악(<황금 시대>는 최초의 발성영화 가운데 하나이다)은 이 영화의 공격대상이 무엇인지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부뉴엘이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만든 첫 작품 <안달루시아의 개>는, 당시 파리 문화계에서 유행하고 있던 예술지상주의적 전위영화에 대한 공격이라는 만든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예술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라는 오해(?)와 함께 부르주아 문화인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부뉴엘이 <안달루시아의 개>의 성공에 힘입어 만든 <황금 시대>는 일부 좌파 지식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격렬한 분노와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예수를 사드 소설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신성 모독’ 부분이었다. 상영관으로 몰려온 극우단체 회원들은 영사막을 찢었고, 영화는 찢어진 영사막 위에서 며칠간 계속 상영되었다. 그러나 들끓는 여론과 카톨릭 교회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파리 시 당국은 결국 상영을 금지하고 프린트를 압수하고 만다.
1950년에 <잊혀진 사람들>로 유럽 영화에 ‘복귀’하기까지 부뉴엘에게는 ‘악명 높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황금시대>의 오리지널 네가는 1993년에야 원래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안달루시아의 개>가 ‘고전’으로 인정받아 가는 동안, <황금 시대>는 여전히 ‘스캔들’로 남아 있었던 셈이다.
-김홍준 영화감독,<세계 영화 100>(한겨레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