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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서크 (Douglas Sirk)

1897-04-26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6.8

기본정보

  • 다른 이름Detlef Sierck;Detlev Sierck;더글라스 서크;더글러스 써크;더글라스 써크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97-04-26
  • 사망1987-01-14
  • 성별

소개

대표작 <마음의 등불>, <순정에 맺은 사랑>, <바람에 사라지다>, <슬픔은 그대 가슴에>,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비디오 출시작 없음

어떤 감독들은 재발견되고 어떤 감독들은 재해석되지만, 더글러스 서크는 부활한 감독이다. 1950년대와 70년대 당시 더글러스 서크는 그저그런 여성영화나 멜로드라마의 황제로서 잊혀져가는 대표적인 할리우드 감독이었으나, 프랑스의 뉴웨이브 운동을 주도한 평론가들과 앤드루 새리스의 노력과 결정적으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강력한 지지는 그를 사지에서 불러내 작가의 호칭으로 복권시켜 주었다.

클라우스라는 독일이름으로 태어난 독일인 더글러스 서크는 원래 무대감독이었다. 입센, 몰리에르 버나드 쇼 같은 정통 고전연극의 연출자로, 1922년에서 37년까지 그는 영화감독보다는 연극연출자로 더 주가를 올리게 된다. 1934년 독일의 국립영화학교에서 일하게 된 그는 여기서 그의 첫번째 영화 <그것은 사월이었다 ’Twas een April>를 발표한다. 독일에서의 크나큰 영화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1937년 서크는 히틀러의 제3제국을 반대하여 독일을 떠나게 된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머무르면서 그는 각본을 써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마침내 스타 자라 린더와 함께 독일에서 만들었던 자신의 출세작 <새로운 해변을 향하여 Zu Neuen Ufern>를 리메이크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할리우드에서의 생활은 서크에게 인내를 요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해변은 향하여> 외에도 몇개의 프로젝트가 좌절되면서 점차 그는 할리우드라는 괴물에 적응해갔다. 제3제국을 반대한 그의 경력에 걸맞게 할리우드에서의 그의 첫 영화는 히틀러에 대한 풍자적인 비판으로 점철된 <히틀러의 미친 인간 Hitler’s Madman>이었던 것이다. 서크의 지지자들은 이 시기 할리우드영화들이 후기의 멜로드라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의 서크의 영화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으며, <현혹된 Lured>(1947)과 <잘자요 내 사랑 Sleep, My Love>(1948) 정도만이 비전형적이나 완벽한 스릴러로 알려져왔다.

1951년부터 1959년까지 유니버설사의 전속감독이었던 서크는 천신만고 끝에 할리우드의 흥행감독으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체제하에서 영화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제작자 알버트 주크스미스와 로스 헌터와의 협업은 그에게 주옥 같은 멜로드라마의 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 <거대한 강박관념 Magnificent Obsession>(1954) <순정에 맺은 사랑 All That Heaven Allows> (1956) <바람에 사라지다 Written on the Wind>(1957)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itation of Life>(1959)는 놀라울 정도의 매력과 일관성을 지닌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는 촬영감독 러셀 메티, 음악감독 프랭크 스키너, 무대디자인 러셀 고드먼, 미술감독 알렉산더 골리첸, 배우 록 허드슨과 제인 와이먼 같은 독특한 재능을 지닌 서크사단을 만들고 그들의 재능을 조합해냈다.
본질적으로는 서크의 영화들은 미국의 부르주아와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비판을 내재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의 세련된 태도 때문에 언제나 관객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1950년대 유니버설 영화사의 최고 흥행작품들이었고, 특히 <슬픔은 그대 가슴에>는 1959년 발표된 할리우드영화 중 흥행 4위를 기록하는 것이기도 했다.

서크의 멜로드라마는 극단적으로 사치스럽고 인공적인 세트와 벽과 차, 의상, 꽃들의 색이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바람에 사라지다>의 인공호수는 누가 보아도 분명히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슬픔은 그대 가슴에>는 거울, 그림자, 유리 같은 장식품들을 화면 가득 채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카메라와 조명뿐 아니라 장식, 분장, 세트, 배우 등 모든 면을 일정하게 양식화한 서크의 스타일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낭만적인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에 빠지게 하는 법이 없었다. 일종의 사회환경뿐 아니라 삶의 물리적 조건에도 갇혀 있는 여성들의 내부 프레이밍으로의 스타일상 장식은 멜로드라마의 투명성이나 자연성을 흐리게 하고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인위적으로 설계된 현실이며, 오직 이러한 인위적인 세상에서만 ‘사회적 문제들’이 산뜻하게 해결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브레히트적인 소외효과를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서크는 내러티브상에서도 멜로드라마가 사회를 해석하는 데 매우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이용했다. “사랑이야기가 들어 있는 사회의 구조는 사랑 그 자체만큼 중요하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멜로물들은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갈등은 해결되지만, 스토리와 대립되는 사회적 조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두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크의 ‘행복하지 않은 해피엔딩’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가 끝난 이후까지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것을 이끌기 위한 간격을 제공한다.

포드나 하워드 혹스, 히치콕 등이 자신들의 대중적인 성공을 독립적인 제작을 하는 데 투자했고, 그럼으로써 감독의 통제권을 아주 굳건하게 세울 수 있었던 반면, 서크는 스스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바로 그 시점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건강 때문에 그리고 미국적 문화에 대한 환멸 때문에 서크는 영화계에서 은퇴하여 유럽으로 돌아가 스위스와 독일에서 은거했다. 이후 그는 정신분열증과도 같은 영화비평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1970년대 이르러 영국의 평론가들의 대대적인 반격에 힘입어 그는 응당한 대접을 받으며 찬미되었지만 서크 작품의 최고 비평가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확신에 찬 자기 영화의 옹호자였으며 어떤 미국감독보다도 할리우드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성질과 드라마 이론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크는 수동적이고 소비적이며 도피적인 오락물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했다. 그는 미국적인 삶이라는 매혹적인 허구에서 우리 자신의 역할을 결정하는 사회조건과 인간조건에서 절대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결국 서크의 영향력은 파스빈더 같은 정치적 색채가 두드러진 영화감독에 의해 재인용되었고, 그의 작가 정신은 시대와 체제의 악조건과 싸워가면서 가장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어떻게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도구로 승화시켰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 사례로 남아 있다.
그외 주요 작품으로는 <여름의 폭풍우 Summer Storm>(1944) <언덕 위의 천둥 Thunder on the Hill>(1951) <타락한 천사들 The Tarnished Angels>(1957) 등이 있다. <b>[씨네21 영화감독사전]</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