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마이크 리는 켄 로치와 더불어 현대 영국 리얼리즘영화의 희망을 짊어진 감독이다. 고집스럽게 영국사회와 영국의 하층민들이 짊어진 고통스런 문제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담아온 리는 정해진 각본없이 배우들과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창의적인 작업과정을 신봉하는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사회비판적인 소재에 각본도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니 영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지만 1992년에 뉴욕 현대미술박물관에서 회고전이 열린 이후 리는 당당히 세계영화계 맨 앞줄에 있는 거장으로 올라섰다.

1943년 영국 샐포드에서 태어난 마이크 리는 캠버웰미술학교와 런던영화학교를 졸업했고 연극, 텔레비전, 영화감독으로 활동했으며 극영화 부문에서는 88년에 <높은 희망 High Hope>을 발표하면서부터 각광받기 시작했다. <높은 희망>은 전세계 영화예술가에게 제작비를 지원하는 영국 텔레비전 방송사 채널4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리는 이 작품으로 쓰러진 줄 알았던 영국영화의 저력을 확인시켰다. <처량한 순간들 Bleak Moments>(1972) 이후 16년 만에 극영화쪽으로 화려한 외출을 했지만 그때부터는 탄탄대로. <인생은 달콤하다Life Is Sweet>(1990), <네이키드Naked>(1993) 등의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개봉됐고 그에 걸맞은 비평적 반응을 얻었다.

리의 영화는 켄 로치의 영화와 비교될 만큼 좌파적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노동 계급이나 하류 계층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다루더라도 리의 영화에는 로치의 영화에 없는 영국식 유머가 있다. 리는 구호를 내건 해결책을 싫어하고 등장인물의 개성에 뿌리를 둔 영국사람들의 기질과 환경에 유쾌하게 시비를 건다. 첫 작품인 <처량한 순간들>은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수줍음을 타고 성불능인 사람을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재미있게 고찰한 작품이다. 사회적으로 주눅들고 그렇다고 자기 여건을 개선시킬 만한 의지도 없는 이 가난한 주인공에게 감독은 혐오와 공감을 동시에 보낸다. 그러나 염세적인 굴레에 갇히는 것도 아니다. 투쟁도, 프롤레타리아 영웅도 등장하지 않지만 마이크 리의 최근 영화는 보수화로 멍든 영국사회의 실상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칭찬을 들었다. <높은 희망>과 <인생은 달콤하다>는 대처리즘의 허상을 직접 까발린 영화로 유명하다.

<인생은 달콤하다 Life Is Sweet>(1991)는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한 중산층 가족 얘기이며 앤디와 웬디 부부, 쌍둥이 딸이 살고 있는 런던 교외의 자그마한 집이 무대이다. 두딸 중 니콜라는 안경을 썼고 담배를 피우고 모든 관습적인 것을 경멸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자인 데 반해, 나탈리는 단정하고 명랑하며 예의바른 여자다. 그러나 두 자매는 서로를 싫어한다. 낮과 밤의 관계처럼 상극인 이 자매 중 니콜라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데, 스스로 외로움에 빠져 자기 혐오로 살아가는 그녀의 주변 삶 역시 천태만상으로 꼬인다. <인생은 달콤하다>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비판적 지성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지만 <네이키드 Naked>(1993)는 리의 영화 가운데 가장 어두운 분위기로 가득 찬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다분히 묵시록적이다. 주인공 조니는 영웅도 악당도 아니며 다만 갈 곳 없이 떠도는 부랑아일 뿐이다. 조니는 옛 애인 루이즈를 찾아 런던으로 오지만 루이즈와 같은 방을 쓰는 친구와 성관계를 갖고 그곳을 떠난다. 조니는 거리를 헤매다 아치란 청년을 만나고 그가 찾던 애인 매기도 만난다. 그리고 브라이언이라는 사무실 경비를 만나고 그가 멀리서 사모하는 여자와 성관계를 나누려다가 그만둔다. <네이키드>는 단순히 집없는 사람의 유랑기가 아니라 런던판 오디세이라 부를 만큼 런던의 환경 묘사가 뛰어나다. 명암 대비가 강한 조명 스타일로 찍힌 화면은 모든 사물을 더 황량하고 갑갑하게 보이게 만든다. 마이크 리는 <네이키드>로 94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이후 96년에는 <비밀과 거짓말 Secrets and Lies>(1996)로 역시 칸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리의 전작들에 비해 관습적인 드라마의 흔적이 강했지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인생의 페이소스를 관찰하는 리의 부드러운 감각이 돋보였다. 리는 줄곧 개인의 자유와 집단적 순응 사이의 갈등을 담으면서 큰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삶의 변화가능성을 탐색하는 신중한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다. <b>[씨네21 영화감독사전]</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