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지면 사랑도 진다...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섬, 보길도그곳에서 일어나는 세 가지 퀴어멜로
당신은 나의 사랑을 경멸하십니까?
재회, <김추자> / 최진성 감독
고등학교 시절, 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실을 목사님이 알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두 남자, 왕근과 춘하. 9년의 세월이 흐르고, TV를 보던 춘하는 우연히 이종격투기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왕근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다시 만난 그들은 조우를 기념하기 위해 왕근의 열살 난 딸 추자와 함께 보길도로 여행을 떠난다. 한국 신파 가요의 영원한 아이콘인 김추자는 진정 그들의 불온한 사랑을 지켜줄 여신일까?
이별, <떠다니는, 섬> / 소준문 감독
서울을 등지고 섬에 도착한 두 남자, 진욱과 연후는 연인 사이다. 도시의 복잡한 시선을 벗어나 행복하게 사랑하리란 마음으로 보길도에 들어온 것이 벌써 2년 전. 서로에게 편안한 안식처였던 그들의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무디게 변해 간다. 섬을 떠나고 싶은 남자와 그 남자를 붙잡고 싶어하는 남자 이야기.
해후, <동백아가씨> / 이송희일 감독
남편이 죽은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남편의 옛 애인은 남자였다. 여자는 남편이 남긴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남편의 옛 애인 현수를 찾아 보길도로 향한다. 한편 현수는 현재 보길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며 어린 애인과 함께 평온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여자는 의도적으로 그 민박집에 머무르게 되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한다. 동성애자들로부터 상처 받은 이 여인은 과연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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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ion Notemore
섬, 동백꽃, 그리고 퀴어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동백꽃>
영화 <동백꽃>의 원래 제목은 <동백꽃 프로젝트: 보길도에서 일어난 세가지 퀴어 이야기>이다. 이 설명적인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남단에 실제 위치한 섬, 보길도를 배경으로 세 명의 감독들이 풀어나가는 퀴어 옴니버스 영화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단체인 ‘친구사이’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본격 퀴어 옴니버스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옴니버스란 것이 통일된 주제를 잘 잡을 경우, 여러 스펙트럼을 한 주제 안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동백꽃>은 '섬'이라는 한정적 공간과 ‘동백꽃’이라는 신파적인 소재를 주요 상징으로 삼고 그리고 ‘퀴어 이야기’라는 한정적 주제를 조건으로 내걸어 각각의 단편들이 산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묶일 수 있었다.
한국에서 퀴어로 산다는 것의 난제를 재확인하기 위해 영화의 배경을 흔히 우리 사회의 축약도라고도 불리는 '섬'으로 삼았다. 이 사회의 섬이지만, 진실로 섬이 아닌 퀴어의 삶을 조망하기 위한 물리적 여건을 가장 여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곧 섬인 것이다. 그리하여 촬영을 결정한 곳이 프로듀서가 일찌감치 찜해 놓은 전라남도 완도군에 위치한 보길도라는 섬이다.
영화의 촬영지인 보길도는 동백꽃이 유명하다. 한겨울에 붉은 빛으로 피는 동백꽃은 여느 꽃들처럼 시들어서 낙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화한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절정의 모습 그대로 깨끗하게 떨어져 버린다. 이러한 동백꽃의 처연하고 애잔한 모습은 많은 시와 소설 속에서 슬픈 사랑이나 청춘의 이미지로 인용되어 왔는데, 바로 그러한 동백꽃이 가진 신파적인 감성이 퀴어 멜로를 표방하고 있는 이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 에피소드 <동백아가씨>의 감독이자 이 영화의 총괄 프로듀서를 담당하고 있는 이송희일 감독은 한국에서 동성애자 인권 역사가 시작된 지 십여 년이 흘렀고, 그 궤적을 함께 그려온 ‘친구사이’의 10주년 기념 행사에 영화로 도움이 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동백꽃이 피어 있고 현기증 나게 떠다니며, 신파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그 조그만 섬에서 이제 그만 당당하게 걸어나오길 바라는 세 감독들이 이땅의 퀴어들에게 전하는 작고 수줍은 연애 편지이다.
그 섬에서 날 구해주오
보길도에서 일어난 시시콜콜 촬영 에피소드
천오백만원 정도의 아주 적은 예산으로 옴니버스 장편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예상보다 아주 힘든 일이었다. 촬영장소가 보길도로 통일된 이유도 그러한 물리적 악조건에서 최대한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공간에 세 단편을 몰아넣는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섬이라는 공간 자체가 영화적으로 극적인 효과를 불어넣어 줄 것이라는 기대도 들었다.
천오백만원의 예산, 2주 동안의 짧은 준비 기간, 그리고 일주일 간의 게릴라 촬영!
세 팀이 동시에 촬영하는 현장이었으나, 밤에 사용할 수 있는 조명 장비는 한 팀이 사용할 정도의 소규모였고, 2주 만에 급조된 현장인만큼 여러 가지 한계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스텝들의 수가 부족해서 한 작품이 준비되는 동안에는 이미 촬영에 들어간 다른 작품의 스텝으로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고, 모든 장비는 니것 내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남단의 섬에 와서 겪는 기자재 고장은 끔찍한 것이었다. 가져간 녹음장비는 도저히 쓸 수가 없었고, 세대의 카메라 중 한대는 아예 고장나 버리기도 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촬영 기간 동안 모든 진행비를 소진하는 바람에, 촬영 후 서울로 올라오던 임대버스가 중간에 못 가겠다고 버텼던 일이다.
충무로의 장편들과 달리 너무 힘든 여건 속에 완성된 만큼, 기존 멜로 영화와는 다른 강렬한 붉은 빛의 퀴어 멜로를 만나실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About Movie
에피소드 1 <김추자>
재치있는 신파의 감성으로 빚어낸 퀴어멜로
세 개의 에피소드 중 처음에 소개되는 <김추자>는 춘하와 왕근 이라는 두 명의 게이 커플과 그 둘 사이를 다시 이어주는 왕근의 딸 추자의 기묘한 삼각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게이가 본의 아니게 ‘여자’와 결혼해서 낳은 딸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성애인을 연결시켜주려고 노력한다는 설정을 통해 세상의 모든 관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유 있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제목은 물론 주인공의 딸 이름에까지 사용된 70년대를 풍미한 도발적인 가수 ‘김추자’는 영화 속에서 왕근과 춘하의 불온한 사랑을 지켜주는 사랑의 정령으로 작용한다.
‘게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만 빼고 보자면 여느 신파 러브 스토리와 다를 바 없는 <김추자>는 다소 엉뚱한 상상력과 신파조 감성을 결합시켜 일상의 보편적인 사랑,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유 있는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이야기 함으로써 퀴어들의 힘든 사랑도 세상의 모든 사랑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에피소드 2 <떠다니는, 섬>
치유보다는 사랑의 상처를 이야기 하는 퀴어멜로
두번째 에피소드 소준문 감독의 <떠다니는, 섬>은 연후와 진욱이라는 게이 커플이 시간이 흐르면서 소진되어버린 서로의 감정을 정리하고 이별하기까지의 과정을 별다른 대사 없이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떠다니는, 섬>은 게이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외로움과 고독함을 ‘섬’이라는 공간적 설정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영화 속 연후와 진욱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각자 떠다니다가 서로에게 머물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따로 떨어진 섬이 되듯, 그런 사랑과 이별의 감정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바로 ‘섬’인 것이다.
<떠다니는, 섬>은 감독 스스로가 게이로서 느낀 관계나 감정에 대한 상처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괜한 환타지를 통해 치유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먼저 그 상처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감정의 상처란 것이 게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나가 안고 살아가는 것이므로, <떠다니는, 섬>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막론한 우리 모두에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에피소드 3 <동백아가씨>
죽은 남편의 편지와 아내, 그리고 남편의 남자를 둘러싼 퀴어멜로
예전부터 남자 둘, 여자 한 명이 만들어내는 삼각관계를 섬에 가서 찍어보고 싶었다는 이송희일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힘들게 나마 그 소원을 이루었다.
촬영 장소를 보길도로 결정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감독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보길도에 가면 동백꽃이 많다’라는 거였다. ‘동백꽃’에 집중하여 생각하다 보니 오페라 ‘춘희’에 등장하는 ‘동백꽃’과 ‘편지’에까지 생각이 미쳤고, 이 모든 것을 한데 묶어 죽은 남편의 편지를 들고 남편의 연인에게 아내가 수신하러 간다는 내용의 <동백아가씨>를 완성했다.
남편이 죽고, 그가 남긴 한 장의 편지. 아내 미현은 편지를 통해 남편이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충격으로 뒤죽박죽 된 감정을 뒤로 하고 ‘그 남자’가 산다는 보길도로 향하는 미현. 그에게 편지를 전해주리라.
그러나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다던 그 남자는 동백꽃이 흐드러지는 섬에서 예쁜 청년과 민박집을 운영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미현이 할 수 있는 건 ‘니들은 행복해서 좋겠다’라고 소리치는 것이 전부이다.
<동백아가씨>라는 제목에서도 짐작되듯이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명의 게이가 아니라 그들의 사랑 때문에 상처 받은 여자, 미현이라는 캐릭터이다. 사회에서 용인되지 못하는 게이들의 사랑도 슬프지만, 그런 그들의 슬픈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방패막이로 이용된 미현의 사랑도 못지 않게 서글픈 일이다. 결국 이성간의 사랑이든, 동성간의 사랑이든, 사랑 때문에 상처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픈 일이고, 분노할 일이고, 슬픈 일이라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부산영화제 상영 당시 여성들의 눈물샘을 가장 많이 자극했던 작품 <동백아가씨>, 마지막에 동백꽃이 가득 핀 숲속을 홀로 덤덤하게 거니는 미현의 모습이 보는 이의 가슴에 아련하게 맺히는 영화이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감독한 김태용 감독이 주인공 현수 역을 맡아 열연하는 점 또한 이 영화를 즐기기에 충분한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