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가?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한 그때 그 소년들을!
누적 관중 1억 명, 연 관중 700만 명, 사회인야구인 50만 명…
1982년 출범해 명실상부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한국 프로야구!
그해 여름, 잠실야구장을 내달리던 이름 없는 야구소년들이 있었다.
“반짝이던 햇빛, 코끝을 스치던 바람,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2015년 3월,
우리 생애 가장 뜨거운 순간을 함께한 전설들이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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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 관중 1억 명, 연 관중 700만 명, 사회인야구인 50만 명…
1982년 출범해 명실상부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한국 프로야구!
그해 여름, 잠실야구장을 내달리던 이름 없는 야구소년들이 있었다.
“반짝이던 햇빛, 코끝을 스치던 바람,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2015년 3월,
우리 생애 가장 뜨거운 순간을 함께한 전설들이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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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프로야구 개막 카운트다운!
심장이 뜨거워지는 ‘진짜 야구영화’가 온다!
누적 관중 1억 명, 연 관중 700만 명, 사회인야구인 50만 명 등 명실상부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한국 프로야구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최초의 영화가 온다.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이 그 주인공. 1982년 출범하여 올해로 34년째를 맞이하는 한국 프로야구는 그 어떤 종목도 달성하지 못했던 800만 관중, 나아가 1,000만 관중을 목표로 삼고 있을 만큼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불려도 손색 없다. 특히 신생팀 KT 위즈의 합류로 사상 첫 10구단 체제를 앞두며 그 어느 때보다 ‘야구 팬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프로야구 시즌 개막 전, 야구팬들의 오랜 기다림을 상쇄시켜 줄 ‘진짜 야구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이 찾아간다.
그동안 국내에서 선보인 야구영화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파격적인 머니볼 이론으로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를 일군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성공신화 <머니볼>(2011),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 최동원, 선동열의 역사적인 명승부를 스크린으로 재현해 화제를 모았던 <퍼펙트 게임>(2011), 국내 최초 청각장애우 야구부의 감동 실화를 다룬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2011) 등 실화기에 더욱 짜릿한 감동을 전하는 작품들로 야구팬들과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를 잇는 야구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모두 실재하는 경기와 인물들이 바탕 되었을 뿐 아니라 프로야구의 개막을 앞두고 누구도 몰랐던 한국야구의 흥미진진한 역사와 이제는 잊혀진 전설들을 스크린으로 소환해 낸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스포츠의 경쾌함과 동시에 재미와 감동, 정보까지 3박자가 갖춰진 작품”, “의미, 재미, 흥미를 모두 갖춘 영화”, “재미와 감동, 남다른 구성력이 돋보이는 영화!” 등 이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기립박수를 이끌어 낸 <그라운드의 이방인>. 2015년 3월 19일, 정식 개봉을 앞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 야구팬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2nd BASE
짜릿한 명승부의 역사!
고교야구 최전성기를 스크린으로 만나다!
“2만 5천명 규모의 객석이 꽉 들어차는 것은 물론, 미처 티켓을 못 구한 팬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입구를 서성이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강승규, 전 대한야구협회장) “봉황대기의 역사는 명승부의 역사다. 고교야구 특유의 짜릿함과 패기를 앞세워 숨막히는 접전과 역전승부로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김일환 데일리한국 기자) 이처럼 고교야구를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1970~80년대 폭발적이었던 고교야구의 인기를 증언한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의 화려한 탄생 이전, ‘단체 스포츠의 꽃’으로 불리며 최전성기를 누린 고교야구. 그 시절 고교야구는 축구, 권투와 함께 뜨거운 인기를 구가한 스포츠로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등 4대 메이저 대회를 위시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저녁 메인 뉴스의 단골이 되었다. 특히 1971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약 4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는 모든 팀이 예선전 없이 출전할 수 있는 규정으로 인해 매 대회마다 이변이 속출하는 명승부의 장이었다. 또한 1980년 대회 당시 광주일고 투수로 출전해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선동열, 외모와 실력을 두루 갖추며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 선린상고 박노준, 코리안 특급 박찬호, 유지현, 박명환, 정대현, 한기주 등 야구계를 수놓은 스타들을 배출해낸 전국구 스타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이처럼 한국야구의 ‘별’로 남겨진 선수들과 화려했던 과거 고교야구의 리즈시절을 담아내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냄과 동시에, 한국 야구사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오롯이 기억되지 못한 이들을 함께 찾아 나선다. 지금은 존재조차 잊혀진 채 이름없는 야구소년들로 남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바로 그들이다. 정부는 1956년, 한국 전쟁 직후에 야구 발전을 위해 해외 선진야구를 초청하는 일련의 행사,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초청경기’를 계획했고 이후 재정 문제로 어려워지자 봉황대기에 이들을 초청했다. 전국의 쟁쟁한 야구 명문고들 사이에서도 재일동포팀은1974년, 1982년, 1984년 총 세 번의 결승전에 오르는데, 특히 82년 멤버들은 군산상고와 함께 고교야구 최초로 잠실 야구장에서 결승전을 치른 팀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중들의 야유도, 상대팀의 견제도, 서울의 낯선 환경도 모두 감수한 채 악착같이 그라운드를 내달리던 까까머리 야구소년들. 이들을 찾아 나서는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뭉클한 여정 속에서, 관객들은 지나가버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추억 그리고 뜨거웠던 그라운드의 열기까지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3rd BASE
<우리학교> 김명준 감독의 두 번째 프로젝트!
한국 야구사에서 잊혀질 뻔한 영웅들을 소환하다!
“’600여 명의 재일동포 학생 야구인들이 한국 야구사에서 영영 잊혀질 수도 있다’ 이 말에서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2007년 조선학교 아이들의 희망 다큐 <우리학교>를 통해 공동체 상영 포함 10만 관객이라는 놀라운 흥행 기록과 더불어 평단의 호평과 관객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던 김명준 감독이 두 번째 작품 <그라운드의 이방인>으로 돌아왔다. 처음 연출 의뢰를 받고 스포츠, 특히 야구라는 소재에 대해 자신 없어 하던 그는 <우리학교>를 만든 이후 생긴 재일동포 사회와의 남다른 유대감과 책임감으로 <그라운드의 이방인> 연출을 맡기로 결심했다고. 특히 영화의 내레이션을 책임진 배우 권해효와 함께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몽당연필’을 오랜 기간 이끌고 있는 김명준 감독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긴 채, 이제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멤버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았다. 손에 쥔 것이라곤 오래된 선수 명단뿐이었던 김명준 감독에게 <우리학교>의 연출자라는 이력은 의외의 곳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가 찾고 있던 1982년 멤버 중에 김근씨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김근씨의 어머니와 부인이 <우리학교>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 도움이 되었다. 본인도 조선학교 출신이라 촬영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여 준 것 같다”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여정이 실타래처럼 풀리던 순간이었다. “애초에 이 영화를 기획하며 스스로 야구를 잘 모르고 스포츠를 잘 모른다는 점을 많이 의식해야 했다. 그러나 결론은 처음 느꼈던 감정, 즉 ‘어떤 개인이든 역사의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제에 밀착해야 한다고 믿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에 머물렀던 한 달의 시간, 그리고 30여 년 만에 다시 찾아가는 그들의 고향에 대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8년 전, <우리학교>를 통해 ‘다큐멘터리로 가능한, 어쩌면 최고의 마법’을 선사하며 잊지 못할 감동을 안긴 김명준 감독. 3월 극장가, 과연 그가 우리에게 또 어떤 마법의 순간을 선물할지 벌써부터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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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이름없는 야구소년들을 고국의 마운드에 다시 세우기까지…
2010년5월부터 일본을 방문하여 취재에 들어간 김명준 감독과 제작진은 2011년 경, 본격 촬영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사태는 그간의 준비상황들을 잠시 접어두는 계기가 되었다. 김명준 감독은 ‘몽당연필’을 통해 일본에서 피해를 입은, 집계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조선학교와 재일동포사회를 돕는 캠페인에 몰두했고, 이러한 일들이 마무리된 2012년 8월에서야 공식적인 첫 촬영을 시작하게 된다.
오사카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촬영에 들어간 제작진은 큐슈, 도쿄, 오카야마 등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쵤영을 진행했다. 특히 일본 현지에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 지인들이 촬영을 대신해준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재일동포임이 밝혀지는 것을 꺼려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김명준 감독은 “취재 도중 안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방송과 영화를 사칭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한 동포들의 사례가 종종 있어 왔다고 한다. 자기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고 있는 많은 재일동포들의 사정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촬영이 순조로울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만난 1982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멤버들을 위해 김명준 감독은 또 한번의 미션을 수행한다. 그들을 32년만에 고국의 마운드에 다시 세우는 것. 처음 시구를 논의할 때도 서로 반신반의했던 제작진은 불가능하면 불가능한대로 이야기가 된다는 무모한(?) 결단을 내린 채 다음 스텝을 밟아갔다.
“야구 문외한으로서 TV로만 보던 시구를 과연 재일동포가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이미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졌으며 더 이상 한국야구가 원치 않는 일본의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멤버들을 프로야구 무대에 올려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명준 감독의 말처럼 쉽지 않은 과정이었고 지난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션은 결국 완성됐다. 야구 인맥을 총동원한 제작진은 그 중에서도 한 때 프로야구에서 명성을 떨친 투수 임호균씨의 도움으로 잠실 야구장 홈팀인 두산 베어스의 프론트를 움직일 수 있었다. 어떠한 편견도 없이 오직 ‘야구’라는 공통점으로 모두가 한 마음이 된 짜릿한 순간이었다. “연출자인 나조차도 얼떨떨한 순간이었다. 그들이 또 다른 실망을 안고 일본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는데, 특히 투수였던 양시철씨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던 고국에 대한 불신이 조금은 없어졌다는 것이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32년 만에 고국의 마운드에 다시 선 잊혀진 야구소년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또한 보는 이들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오롯이 가슴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