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이소선이다
고맙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세상에서 가장 올곧은 당신,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이야기...
창신동. 좁은 골목들 사이로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 곳에 한 할머니가 있다. 작은 선녀라는 뜻의 소선이란 이름을 지녔지만 그 누구보다 넓은 가슴과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품어낸 분. 이소선 여사는 큰 아들 전태일의 죽음 이후 이웃의 고통과 그들의 전쟁 같은 삶을 늘 함께 하며, 40여 년간 스스로의 힘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다.
인고의 시간이 만들어낸 올곧음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모든 이들의 어머니였던 그녀의 마지막 2년간의 이야기. 그리고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 어머니 이소선과의 마지막 날을 담은 젊은 예술가들의 연극 <엄마, 안녕>과의 만남. 가늠할 수 없는 그날의 고통을 힘겹지만 아름답게 승화시킨 그들에게 이소선의 삶은 어떤 의미이며, 이소선에게 아들 전태일과 이 땅의 노동자들은 어떤 의미일까.
작은 약속으로 시작된 어머니의 삶의 자취가 기적 같은 희망의 이야기로 우리 곁을 찾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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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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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more
애초의 시작은 그랬다. 불안과 위기의 시대.
모든 이들의 어머니라 부르는 인물에게
카메라를 핑계로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다.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그녀에게 접근해 들어갔고
활자와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그녀를
나의 촉각과 시각으로 담기 시작했다.
그저 보통의 할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방송의 언어로 그녀를 다뤄야 하나, 잠시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이었는지,
그녀에게 빚을 졌다 이야기 하는 한 시대의 연유가 짐작되어 갔고
그녀 또한 허물없이 진심을 다해 카메라와 나를 대해갔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을 이기지 못했고
지금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위로는커녕 툭하면 혼나고 심부름을 해야 했던 나는
애초의 의도 따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잊어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삶의 마지막 한때를 같이했다는 이유로
나는 그녀를 통해 세상을 위로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상실감을 스스로 치유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스스로 빛을 내고 향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꽃과 같았던 한 인간을 통해서 말이다.
-태준식 감독 연출의도
[ Movie Tip ]
아들 전태일의 유언, 그리고 어머니 이소선의 마지막 이야기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어떤 물질이나 어떤 유혹에도 타협하지 마세요. 내 부탁한 거 꼭 들어주시겠죠?... 엄마, 엄마,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한번 대답해줘... ”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연극 <엄마, 안녕>
2010년 전태일 열사 40주기 기념연극으로 부산의 연극단체인 ‘연극 놀이터 쉼’과 대만 타이베이의 ‘워터필드 스튜디오’가 공동제작한 작품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구술을 바탕으로 열사가 분신하기 전,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순간들을 몸짓이 중심이 되는 ‘퍼포먼스 아트’형식으로 재현한 실험적인 연극이다. 부산에서 활약하는 부부 연극인 홍승이씨와 백대현씨가 이소선 어머니와 아들 전태일로 분했고, 대만의 대표적인 저항 예술가이자 연극 연출가, 예술평론가로 활동해온 왕모림이 연출했다. 2009년 홍승이, 백대현 부부로부터 <엄마, 안녕>의 제안을 받았던 연출가 왕모림은 같은 해 이들의 초청으로 11월에 서울에 와서, 전태일 열사 39주기 추모행사에서 이소선 어머니의 연설을 듣고 작품을 연출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2010년 9월 전태일 열사 40주기에 맞춰 첫 공연(부산) 후, 2011년 6월 대만 타이베이에서도 공연했으며 같은 해 7월, 다시 부산에서 재공연했다.
다큐 <어머니>에는 <엄마, 안녕>의 2010년 부산에서의 연습 과정과 공연 실황이 삽입되었다. 특히 공연 실황은 <어머니> 속에서 실제 이소선 어머니가 전태일 열사의 분신 후 마지막 유언을 인터뷰하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어 전태일, 이소선 모자의 마지막 하루를 사무치도록 슬프게 재현한다. 왕모림 연출가는 2009년 실제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뵙고, 그녀에게서 자애와 여성의 강함을 동시에 품었으며, 가늠할 수 없는 슬픈 아들의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마음을 갖고 계신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엄마, 안녕>의 엔딩에는 이소선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전태일이 다시 돌아와 어머니와 만나는 장면을 특별히 연출했다고. 아쉽게도 왕모림 선생과 홍승이씨의 2011년 7월 부산 재공연 초대에도 불구하고 이소선 어머니는 건강 때문에 결국 연극 <엄마, 안녕>을 보지 못했다.
왕모림의 연출의 변 : 전태일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마 어머니였겠지요. 그렇지만 마음 속 이야기를 얼마나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요? 그가 분신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 날 아침, 그는 세 번 씩이나 어머니에게 현장에 그의 항의행동을 보러 오라고 부탁합니다. 나는 관련자료에서 이러한 서술을 읽고 전태일이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 보고 이 잔혹한 장면을 보러 오라는 모진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현장에 있어야만 더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몸을 불 사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나는 이 문제를 연출 연습과정으로 가져가 조금씩 발전시켰습니다. 한 걸음씩 전태일의 내적 영혼 세계로 들어가면서, 뜻밖의 나는 그의 마음 속 고통을 느낄 수 있었고, 이는 그가 반드시 혼자 자신을 불사르는 육신의 제전으로 가야했을 때, 이 숙명적 고독감이 사람을 더욱 모질게 만든다는 데서 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Review
태준식은 전태일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화흔의 기억을 재현하는 작업이 지금 시점, 다른 이가 감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카메라는 이소선 어머니의 현재, 그녀 삶의 마지막 2년간을 온전히 배웅하는 데 집중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과거에 접근해간다. 아들이 ‘열사’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는 어머니는, 아들의 기억을 ‘대의를 위해 추모하고 봉인’하는데 반감을 표하고, 그렇게 단순한 역사 서사의 영화를 만드는 것을 피하려 감독도 안간힘을 쓴다.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운영위원 신은실
영어에선 국가를 대명사로 지칭할 때 여성형으로 ‘그녀(she)’라고 부른다. 한국어로도 자신이 태어난 국가를 ‘모국’이라고, 그 국가의 언어를 ‘모국어’라고 부른다. 마땅히 국민의 ‘어머니’가 되어야할 국가가 ‘어머니’의 따뜻함을 보여주지 못해 국민들이 자꾸 다른 어머니의 품을 찾아 눈물 흘리는 요즘, 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국민들이 ‘노동자의 어머니’를 찾지 않고도 어머니 품을 느끼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서울독립영화제(2011) 관객심사단 백배승
매년 11월이 되면 전태일의 무덤 곁에서 이소선에게 꽃다발을 안기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돼야 삽니다. 하나가 돼야 이깁니다”라고 이소선이 마이크 들고 외칠 때, 환호성을 질렀던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나를 낮춰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는 이소선의 마지막 신신당부가 장면마다 도장처럼 꾹꾹 새겨져 있다.
-씨네21 기자 이영진
인물 다큐멘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다양한 방식이 있긴 하지만 주인공의 업적을 열거하면서 신화를 만들게 되기 쉽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어머니>는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를 통해 주인공의 삶의 태도를 공유하게 한다.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어느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고 보고 나면 몇날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인디다큐페스티발 진행위원 주현숙
[ About Movie ]
일상의 풍경에서 향기롭게 피어나는 이.소.선.
예쁜 영상과 따뜻한 음악이 흐르는 ‘감성 다큐’ <어머니>!
<어머니>는 1970년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불꽃처럼 타올랐다 스러진 전태일 열사, 그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올곧게 한평생을 살아낸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담은 영화다. 노동운동 전문 다큐멘터리스트로 일컬어지는 태준식 감독은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셨던 고 이소선 여사의 마지막 2년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가장 낮고 사려 깊은 카메라로 밀착해서 기록했다. 그의 카메라는 누구나 아는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을 그리지 않기로 작정한듯 그저 쪼글쪼글 주름진 어느 작은 할머니의 일상을 다소곳이 바라보고 바라본다. 카메라 앞에서만 민망해 하는 담배, 사람들 만나기 전엔 꼼꼼히 거울 보기, 허물없이 치는 고스톱, 헛짓 정치인들에게 날리는 일갈, 수시로 자는 낮잠, 아픈 몸 한탄하기 등 우리네 어머니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친근한 모습을 포착한다. 그렇게 태준식 감독은 2년 여간 어머니의 심부름도 하고, 손톱도 깎아 드리고, 고스톱도 함께 치는 등 어머니의 평온한 일상에 함께 속하며 두터운 신뢰를 쌓아갔다. 그 친밀한 일상의 결 속에서 투사의 모습이 아닌 인간 이소선의 온기와 향기를 오롯이 채취해냈다. 또한 그 속에서 이소선만의 향기로운 지혜와 단호한 삶의 원칙을 발견하고, 그녀가 아들 전태일과의 약속을 40여 년간 어떻게 품고 지키며 살아왔는지 짐작케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화화된 노동자의 어머니가 아닌 겸손과 낙천, 사랑으로 향기로웠던 인간 이소선의 실체를 목도하게 된다.
특히 영화 전편에 흐르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감각적인 음악은 프로젝트 듀오 ‘하와이’의 작품으로 일상의 담백한 풍경에 봄볕 같은 향기와 온기를 더하며 <어머니>가 ‘감성 다큐’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하와이’는 밴드 스웨터의 보컬이자 ‘열두 폭 병풍’이라는 이름으로 3장의 앨범을 낸 이아립과 ‘댄 아서라이그’의 보컬이자 집시스윙 밴드 ‘집시앤피쉬오케스트라’의 기타리스트 이호석이 결성한 프로젝트 듀오다. ‘홍대 여신’으로 불리는 이아립의 꾸밈없는 목소리와 따뜻한 감성이 넘치는 ‘누군가 피워놓은 모닥불’, ‘꽃’이 감성적으로 흐르며, 어머니가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하는 다양한 장면과 어머니의 영결식 장면에 삽입된 ‘소선의 테마 2’와 ‘소선의 테마 1’은 영화를 위해 이호석과 이아립이 각각 작업한 오리지널 스코어로 음악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예쁜 영상과 따뜻하고 섬세한 음악이 흐르는 감성 다큐 <어머니>는 이소선의 일대기를 그린 인물의 ‘초상화’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늘 함께 호흡한 이소선 어머니의 일상을 향기롭게 담은 ‘풍경화’가 되어 따뜻한 봄, 드디어 관객들 앞에 당도했다.
참된 이야기를 통해 올곧게 기억되는 이.소.선.
내밀한 호흡과 사랑으로 쓰여진 ‘기록 다큐’ <어머니>!
<어머니>는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이며 평생 2남2녀를 홀로 키운 평범한 어머니 이소선의 말년의 자취를 통해 그녀가 평생을 올곧게 지켜온 삶의 원칙과 태도를 발견해가는 영화다. 우리는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유언으로 어머니 이소선이 아들의 삶을 대신해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해 40여 년을 바쳤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 마지막 유언은 [전태일 평전]은 물론 어머니께서 생전에 하신 수많은 인터뷰와 어머니 일생의 기억을 받아 적은 오도엽 시인의 책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등을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려졌다. <어머니>에서는 그 유언의 장면을 이소선 어머니가 직접 전태일 열사의 임종을 회상하는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어머니가 쏟아 놓은 그 날의 기억은 당시의 절절한 호흡과 감정까지도 담아내며, 활자화된 기록을 넘어 선 슬픈 역사의 순간을 오롯이 현재에 소환한다. 이는 2009년 11월 진행된 도쿄대학교 와다 하루키 교수의 한국의 민주화 운동 인사와의 인터뷰에서 이소선 어머니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다.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녀의 뇌리에 박혀 되내이는 순간마다 온 몸과 마음을 포박하는 그 기억의 순간을 이소선 어머니는 진저리쳐지는 고통과 함께 슬픔을 꾹꾹 누르며 온힘을 다해 전한다. 특히 이 장면은 전태일, 이소선 모자가 이별하던 마지막 아침을 새로운 몸의 언어로 담으려 한 연극 <엄마, 안녕>의 장면들과 교차편집으로 보여지면서 사무치도록 슬프게 재현된다.
유독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신 이소선 어머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하나 마음 깊이 품어 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모습을 가장 많이 카메라에 담게 된 태준식 감독은 그 이소선 어머니만의 흉내낼 수 없는 인사법을 발견하고 이렇게 분류한다. 목사님이나 스님 등 종교인을 만날 때는 배꼽인사, 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만날 땐 따뜻하고 긴 포옹, 유가협 어머니들을 오랜만에 만날 땐 포옹과 함께 부비부비, 장관이나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만날 땐 나 몰라라, 그리고 정치인을 만날 땐 포옹 후 가만히 쳐다보다 한 대 치신다는 것. 더없이 인간적이고 재치 넘치는 이소선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인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가 아들 전태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품었던 삶의 동력이 ‘사랑’이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어머니>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이소선 어머니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그려내지 않지만, 사람을 향한 끊임없는 깊은 사랑과 배려로 그녀의 삶이 완성되었음을 기록하는 영화다.
회귀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나는 이.소.선.
세상의 99%를 위로한 ‘희망 다큐’ <어머니>!
<어머니>는 2011년 9월 3일 이소선 어머니가 영면에 드셨다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태준식 감독은 2009년 초 팔순이 되신 이소선 어머니를 처음 찾아 뵙고, 그해 8월 첫 촬영을 시작하며 그해부터 부쩍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아지셨음을 느꼈다. 하지만 201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기점으로 초인적으로 기력이 좋아지신 어머니셨기에 영화에 어머니의 죽음이 담겨질 거라고는 조금의 염두도 없었다고. 결국 <어머니>는 이소선 어머니의 부고로 시작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점점 더 건강해지는 그녀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영화다. 하지만 이 역순의 구성이 어머니의 소천 때문에 섵택되어진 구성은 아니었다.
편집 시작 전부터 태준식 감독은 막연하게나마 어머니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편집의 리듬과 구성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중요한 법. 단, 플래시백을 통해 회한의 감정을 돋으려는 의도가 아닌 어머니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선택으로 역순의 구성을 선택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영화에 삽입된 연극 <엄마, 안녕>의 정방향(시간 순), 이소선 어머니의 시간의 역방향이 만나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제대로 된 시점을 제공해야한다는 것과 극적 리듬의 완결성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던 것. 하지만 감독에게는 어머니가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쓰러지신 후 다시 못 깨어나시고 같은 해 9월 3일 영면하시자, 이 역순의 구성에 또 다른 심정적 이유가 보태졌다. 그것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어코 살리고 싶었던 절절한 마음이다. 수 만 명의 노동자들에게 하나가 되라고 외치던 마이크 든 어머니의 모습을 손수 영정사진으로 바친 태준식 감독. 그는 장례식에 이상하게도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편집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웃고, 이야기하고, 안아주는 살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몰려왔고, 그렇게 카메라에 담긴 모습 속에서 위로를 받았음을 고백했다.
이 회귀하는 시간 속에서 이소선 어머니를 살아나게 한 감독의 따뜻한 의도는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며 뭉클한 감응을 불러 일으키며 위로와 희망을 준다. 여든셋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노동자들을 보듬고 어루만지고, 의롭지 않은 자들을 향해 맨 앞에서 온몸을 던져 싸우시던 어머니. 거창하고 찬란한 자리는 마다하고 늘 마음 아픈 자리만 찾아다니신 어머니. 분신한 노동자와 학생들의 추도식,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한 시위가 제자리였던 어머니. 마지막까지도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위원을 걱정하며 내려와서 같이 싸우자고 하셨던 어머니. 세상의 99%들을 마음으로 안아주던 이소선 어머니. 다큐 <어머니>는 이소선 어머니가 세상에 남기고간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다.
[ Production Note ]
1. 피곤. 2000~2001
피곤함이었다. 이 체제의 균열을 내고 실질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알았던 그 순간. 그럼에도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이 체제의 불안정에 노예처럼 종속되어 그 피해를 온전히, 끊임없이 받아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던 그 순간. 피곤함이 밀려왔다.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이 전화국에서 끌려 나오고 흩어진 노동자들이 한강대교에 올라가 절규해도, 온 몸에 고추장을 바르고 출입을 막던 경비와 충돌하며 눈물짓는 주봉희 위원장을 팔로우 하면서도, 희망의 크기를 키우기 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나름의 방법을 배우는 시기였다. 지독한 환멸의 시간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소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였던거 같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할당(?)받은 편집을 위해 지난 시절의 화면을 보다 보면 언제나 대오 가운데에 아니면 연단 위에서 달관의 표정으로 지도부와 대오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 그리고 마이크를 잡으면 언제나 당대 노동운동의 큰 화두를 ‘계급적 단결과 연대’로 단칼에 정리해 버리는 그녀 특유의 화법에 놀라곤 했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라는 신화보다는 그저 저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메시지를 보내는 그녀의 강건함에 매료되었었다. 만나보고 싶었었다. 어줍잖게 첫 장편 다큐멘터리였던 ‘인간의 시간’을 끝내고 인물다큐멘터리를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대화’ 시리즈와 ‘필승’ 시리즈의 틀을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내 스스로 이 피곤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시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고육지책이었으리라.
2. 성숙. 2002~2008
하지만 오랜 기간 활동해 왔던 노동자뉴스제작단을 정리하여야 하고 그 불안의 정점으로 내 스스로를 내 던져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때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은 바로 ‘성숙’이었다. 아마도 스스로 무너져 도망가듯 어디론가 가야 했던 나를 변명하기에 가장 적당한 단어였던 거 같다. 무의식적으로 쓰다 보니 정말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몇 군데의 회사 생활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라는 존재를 하나의 계급, 덩어리로 바라만 봤던 내 스스로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생활, 노동자의 욕망, 노동자 사랑, 노동자의 행복, 노동자의 가족, 노동자의 미래, 노동자의 감수성...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문제가 되었고 내가 해결해야 할 화두가 되었던 것. 불안의 정점에서 그 이유를 몸으로 체득해 갔고 변화를 위한 노력은 매우 디테일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갔다. 지겹던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이제는 홀로 설 수 있다는 최면(!)을 걸며 허허벌판에 서게 되었다. 조직이 아닌 다큐멘터리 제작 전 과정을 혼자 온전히 담당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그 일들을 해 나아갔다. 세상과의 몇 건의 불화와 몇 편의 장편 다큐작업이 그 동안의 시간에 놓여졌다. 후퇴의 징후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긍정의 힘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 시기는 이소선을 만나기 위한 성숙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3. 만남. 2009. 8 ~ 2010. 5
또 한 번의 환멸의 시간이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등극하고 곧 이어 터진 금융위기. 그리고 2009년 1월 20일에 터진 용산참사. 혼자 좋아라 했던(?) ‘샘터분식’을 마치고 이제는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자기 발언을 하여야 겠다 생각했던 그 시점. 2000년대 초반 무척이나 사모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창신동 골목길을 구비 구비 올라 전태일 기념사업회 한쪽에 있던 그녀를 2009년 초반 무턱대고 찾아갔다. 9시 뉴스를 보고 있던 그녀는 귤을 까먹고 있었다. 티비 속에 나오던 안 좋은 소식을 날선 언어로 비아냥 대었던 그녀는 자주 찾아 뵙겠다는 나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더 놀다 가지...’라는 말만 자꾸 자꾸 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몸빼 바지와 헝클어진 머리를 했던 그녀는 아침에 했던 김치를 한번 맛보고 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이 작품을 짧게 끊어서 할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평화롭다’ 여기는 그림과 소리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와 나누는 교감의 순간일 것이다. 불안과 위기의 시대, 그 교감이 가지는 의미는 남 다를 것이다라는 판단과 이소선이라는 인물과 그것을 나누려면 조직과 효율이 몸에 밴 그동안의 작업 관성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길게 가면 3년. 짧게라도 1년 이상은 그녀와의 만남에 집중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놀다 가지’라는 말을 하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 뵐께요’ 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나오던 창신동 골목에서 전체의 그림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또 하나, 그녀의 긴 삶을 되돌아 보는 방법이 누군가에게 제공되어지는 말과 뉴스릴이 아니라 나의 카메로만 온전하게 가능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그 이후 처음으로 카메를 잡았던 것은. 불타는 평택의 쌍차 노동자들 싸움이 끝나고 그 해 8월 말. 만해대상 시민운동가상을 받으러 가는 그녀를 쫓아가면서 였다. 2009년 부터 몸이 안 좋았던 그녀에게 백담사까지의 이동하는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지 않으면 이동이 원할치 않았던 그녀는 쉬이 피곤해 하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어느정도의 시각적 움직임을 예상했던 나에게 전체적인 톤과 리듬을 잡아가기 위한 단초를 제공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한한 노동자 편들기(?)는 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빛이 났다.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자리. 문화부 장관과 노동부 장관을 옆에 두고 그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을 분노 어린 목소리로 질타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민망함을 넘어서 울그락 불그락 해지는 그들의 표정이 현장중계되던 큰 모니터에 흐를 때 같이 갔던 유가협 어머니들과 재단 식구들의 박수 소리는 좌중에 울려 퍼졌었다.
2009년 11월. 작품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도쿄대학교 와다 하루키 교수의 한국의 민주화 운동 인사와의 인터뷰 자리는 이소선의 삶의 원형을 확인하고 내가 이소선이라는 인물과 어떻게 관계 설정할 것인가를 정립하게 했던 에피소드이다. 전태일 열사와 헤어지는 그 순간을 떠올릴때 마다 매우 힘들어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인터뷰 과정을 촬영하면서 내 스스로도 감정 조절이 안될 정도로 그녀는 그 기억의 순간을 매우 힘들어 했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소선과 전태일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나는 전태일을 드러내는 전략보다는 최대한 숨겨야 겠다는 전략을 택했다.(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나올것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이것은 나의 카메라가 전태일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거보다는 그녀의 그 이후와 지금의 그녀를 가능케 했던 어떤 삶의 원칙들을 드러내는데 노력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이후 나는 그녀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전태일과 헤어지는 순간을 묻지 않았다. 어느 다큐멘터리 워크샵 자리에서 그런 사정을 모르는 어느 한 분은 이소선 과거 정보의 대부분을 차지할 전태일을 왜 선택하고 보여주지 않았냐는 지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서야 변명해 본다.
4. 언어. 2010. 5 ~ 2011. 3
스탭들을 꾸리고 틈만 나면 작품의 전체 컨셉을 토론했던 시절이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이소선의 ‘신화’와 이소선의 ‘일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였다. 들었던 생각은 ‘신화’로서 이소선이 제대로 다루어 졌던 일이 있었던가? 였고 ‘일상’이라는 빈 사이를 ‘실험’의 관점이 아니라 ‘대중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였다. 이 작품 ‘어머니’는 ‘신화’라는 거대한 성의 한 층을 더 쌓는 역할을 한다기 보다 그 성의 근간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물론 전태일이라는 원형이 있기에 배가가 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원형의 힘을 빌리지 않은 그녀 나름대로의 사람으로서의 향기를 공감시킨다면 그 ‘신화’의 근간은 더욱 튼튼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을 표현하는 전략으로서 그녀와 카메라간의 관계의 밀접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데 ‘일상’이 작동하지만 여기서 ‘일상’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 획득보다 ‘신화’의 근간을 확인하는 역할로 한정 지으려 했다. 그 속에 작품 속의 작품으로 ‘엄마, 안녕’을 삽입함으로서 전체 극의 긴장과 최소한의 정보제공, 그리고 작가의 시선을 대신해 주는 씨퀀스로 촬영 되어졌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녀가 평생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교감하며 획득했던 보편적인 언어, 진정함이 기반되어 졌던 그녀의 삶 속에서 나왔던 언어를 그녀의 방식대로 성기고 거친 듯 하지만 대중들에게 표현하고 싶었다.
이소선은 가면 갈수록 몸이 안 좋아졌다. 2010년 5월. 응급실로 실려 갔던 그녀는 몇 달간의 병원 생활을 반복했었다. 그때였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등질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하지만 어머니는 그 생활을 잘 이기셨고 전태일 열사 추모 40주기에 자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추스르셨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병원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그 노구의 몸을 이끌고 노력하시는 모습은 지금도 마음 한쪽에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이후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40주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고 오히려 그 전보다 왕성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를 남기려 했다. 늙어버린 육신의 그늘은 방 안 구석 조용한 읖조리으로만 남겼고 어디를 나가도 예의 그녀의 토닥임과 질타는 전태일 40주기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남았다. 어찌 보면 아들과의 약속으로 부터 시작된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빛나던 40년 중. 이 시기가 그녀에게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었으리라 감히 짐작한다.
5. 뚝심. 2011. 4 ~ 2011. 7
촬영 본을 HD 파일로 전환하는 시간만 한 달이 걸렸다. 전체 용량은 16T가 나왔다. 촬영 횟수는 날짜 수만 100일에 가까웠고 심심하면 카메라를 들지 않고 찾아갔던 시간까지 따지면 꽤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낸 결과가 편집을 앞에 두고 나왔다. 손경화 감독을 비롯한 촬영팀과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이때부터는 서로를 찾는 사이가 되어져 갔다. 2011년 6월 어느 날. 나의 엄마를 만나고 작업실로 돌아갈 때.. 카메라 없이 그녀의 집에 가 저녁을 먹고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자기가 나의 카메라를 허락한 이유, 그리고 이 작품이 정말 잘 나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면 한다는 바람. 제작비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해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온전히 카메라 앞에 자신을 내어 주셨고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자신의 언어임을 아셨던 걸까. 그때 어머니의 표정과 말씀들이 잊히지 않는다.
편집을 앞에 두고 나에게 가장 절실했던 화두는 뚝심이었다. 관계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는 뚝심과 긴 시간을 재조직하기 위해선 한 두 씬에 일희일비 해서는 안된다는 뚝심.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편집 리듬의 뚝심이 필요하기도 했었다. 김나영 감독과 이러저러한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 나는 어머니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플래시백이라는 회한의 감정을 돋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 필요했던 조치였다. ‘엄마, 안녕’의 정방향과 이소선의 역방향이 만나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제대로 된 시점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것과 극적 리듬의 완결을 위해서도 선택되어진 전략이었다. 이것은 매 씬 촬영된 결과물이 그것을 충분히 가능하게 할 거라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고 긴 시간동안 쌓아왔던 이야기가 충분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결과는? 부끄럽지만... 관객의 판단에 맡긴다.
6. 추모. 2011. 7 ~ 2011. 11
2011년 7월 18일. 오후 10시. 잊지 못하는 날과 시간이었다. 가편집을 하던 중 작업실에 찾아 온 지인과 술 먹고 있다 태삼 형님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숨을 안 쉬어’ 무작정 뛰어 나갔고 카메라는 챙기지 못했다. 가편은 중지되었고 무작정 기록을 위해서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어머니 하고는 단 한번의 촬영을 남겨두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에 다다라 가장 낮은 겸양의 철학을 가졌던 그녀가 세상 사람들을 위무하는 나레이션 녹음만이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아니, 그때는 작품의 끝이 있고 없고를 떠나 무조건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랬던 시기였다. 한동안 밀려왔던 자책은 끊이지 않았던 비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었다. 내가 카메라로 그녀를 귀찮게만 하지 않았다면... 떠오르기 싫은 기억을 다시 꺼내 놓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도 후회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깨어나지 못하셨다. 한 달이 조금 넘은 시간에 한일병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응급차 안에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매만지며 전달되어지던 그녀의 따뜻한 온기를 잊지 못한다. 조금만 더 서두르고 게으름을 피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질타와 훈계를 들으면서도 이 작품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한일병원으로 이송되고 난 후 전체 구성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놓았던 편집을 다시 잡기 시작했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그녀를 응원하는 것은 최대한 이 작업을 빨리 끝내는 것이리라 다잡았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숨을 거두었고 장례 기간 너무나도 맑았던 하늘과 구름들 사이로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 시기. 나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자랑이 아니라 그 마지막 모습을 기록해야 할 임무를 스스로 자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이 작품을 위해 남겨 놓은 나의 일을 위해 뚝심을 발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남겨 놓은 자리와 말들을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달하여야 하여야 한다는 책임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조금이라도 먼저 세상과 헤어지게 한 빚진 마음을 털기 위해서 그저 슬퍼하고만 있을 순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 감사.
이 지면에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제작스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작업을 위해 고민을 나눠준 수많은 사람들. 더불어 선뜻 후원에 손을 내밀어 주신 후원제작자 분들. 이소선이라는 인물 때문이었을 테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어머니가 살아 오셨던 삶처럼 편들어 주고, 나누었던 수많은 이소선 때문에 이 작업은 어렵지만 완성되었다.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로는 뭔가 매우 부족하다. 그저 이 작품이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 이소선 어머니... 고마웠습니다.
(글 태준식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