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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리베트 (Jacques Rivette)

1928-03-01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7.5

/

네티즌6.8

기본정보

    }
  • 원어명Jacques Rivette
  • 다른 이름자끄 리베뜨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28-03-01
  • 사망2016-01-29
  • 성별

소개

“나보다 영화를 더 잘 아는 리베트 같은 사람은 거의 영화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관해 알지 못한다. 만일 그가 1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는 아마 나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을 것이다.” 누벨바그의 대표적인 인물인 장 뤽 고다르의 말이다. 사실 <카이에 뒤 시네마> 시절 누구보다도 필명을 날렸던 것은 리베트였다. 그들이 존경하는 로베르트 로셀리니와 해박하고 열성적인 대화를 나눈 것도, 로셀리니의 후기작인 <이탈리아 여행 Viaggio in Italia>(1953)에 대한 에세이를 쓴 것도 리베트였다. 하지만 그는 감성적인 트뤼포나 정치적인 고다르나 지적인 로메르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냉철한 분석가였고 실험가였다. 루앙에서 태어난 리베트는 파리의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서둘지 않았다. <파리는 우리의 것 Paris Nous Appartient> (1960)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혁명적인 것들과 문학적인 요소들이 잘 섞인 작품이었지만 당시 관객에게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실험성은 12시간40분짜리 <아웃 원 Out 1: noli me tangere>(1971)을 만드는 결과에 이른다. 하지만 상영을 위해서는 225분의 축약판인 <아웃 원/유령 Out 1: ombre>(1974)을 다시 편집해야 했고, 내러티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당시 관객들이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그가 여러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때때로 지름길로 정확히 되돌아오기 위해서, 제 길을 벗어나 멀리 돌아갈 필요가 있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지 거의 10년 만에 만든 <미치광이 사랑 L’Amour fou>(1968)은 그에게 대중적인 인기를 돌려주었지만, 68년 이후 누벨바그는 쇠퇴했고 이미 자신의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는 시기가 도래했다. 대중들의 인기를 모을 시기에 동료들은 자신의 세계로 탐구해 들어간 것이다. 거꾸로 선 누벨바그의 역사를 쓰는 듯한 리베트는 80년대에도 자신의 영화를 만든다. <북쪽에 있는 다리 Le Pont du Nord>(1981)는 양식적인 실험들이 줄어든 대신 판타지에 대한 공격성과 다양한 함축적인 이미지들이 배치된 영화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회화적인 요소가 점점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90년대에 리베트가 만든 <누드 모델 Belle Noise-use>(1990)은 이미지 자체를 강조하며, 세밀하게 관찰하는 회화적 전통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프랑스의 어느 작고 한적한 마을에 사는 화가를 찾아 젊은 부부 일행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 부부를 중심으로 노화가는 예술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독특한 구조의 영화이다. 91년 칸영화제 출품작은 그의 작가주의가 여전히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 점은 93년 작 <잔 다르크 Jeanne la Pucelle> (1993)에서도 마찬가지다. 2부작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다소 이야기가 늘어지는 감이 있지만 그의 미장센은 여전히 실험적이다. 하지만 그가 선택하는 기법들은 프랑스 자체에서도 외면받기 십상이었다. 이미 할리우드의 물결에 세례를 받은 장 자크 베넥스나 뤽 베송이 판을 치는 영화판에서 누벨바그의 실험가가 설자리는 너무나 좁다. <b><font size=4><FONT COLOR="666666">[씨네21 영화감독사전]</fon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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