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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Park Kwangsoo)

1955-01-22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5.8

/

네티즌7.1

기본정보

  • 다른 이름朴光洙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55-01-22
  • 성별

소개

한국영화계에서 희귀한 사회파 영화의 수호자로 불리는 중견. 그는 분단, 이데올로기, 노동자, 빈민 등 한때 유행처럼 말해졌지만 시대가 바뀌자 차츰 잊혀져가는 우리 사회의 깊은 환부를 끈질기게 탐구해왔다. 강퍅한 메시지만 도드라지는 게 아니라 회화적 미장센과 느리면서도 정교한 영화적 리듬을 구사하는 장인적 재능도 갖추고 있다.

1955년 속초 태생이며 서울대 미대 조소과 재학중 진보적 영화서클 얄라셩에 가입해 영화 수업을 시작했다. 1982년 얄라셩 출신들과 함께 사회적 리얼리즘의 깃발을 내건 서울영화집단을 창립했고, 이듬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영화교육특수학교(ESEC)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1985년 귀국한 박광수는 이장호 감독 연출부 생활을 거친 뒤 1988년 <칠수와 만수>라는 빼어난 데뷔작을 내놓는다. 동명의 연극을 각색한 이 영화는 대도시의 가난한 두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빈부격차, 연좌제 등 예민한 사회문제를 유장한 호흡으로 극화해 장선우의 <성공시대>와 함께 한국 뉴웨이브의 도래를 알린 문제작으로 평가받았다.

탄광촌으로 피신한 운동권 출신 청년의 생활을 다룬 두번째 작품 <그들도 우리처럼> (1990)은 일부 평자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수작. 탄광촌을 길게 찍기로 잡은 화면은 그 어두운 색감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으며, 쫓기는 주인공을 통해 동시대 청년들의 황량한 내면을 세련되게 묘사했다. 단순히 운동권 문제를 성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정착지를 잃어버린 현대 한국인의 삭막한 내면풍경에까지 이르게 한 회화적 스타일의 힘이 무엇보다 돋보였던 작품. 지적이면서도 허무주의적 이미지의 문성근을 새로운 유형의 스타로 탄생시키기도 했던 이 영화는 낭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듬해 내놓은 <베를린 리포트>(1991)는 남북분단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야심적 기획이었으나 캐릭터와 이야기 양쪽 다 초점이 불분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부터 박광수는 유행과 장르를 외면하는 영화적 고집 때문에 충무로에서의 제작비 마련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졌다. 박광수는 충무로 자본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 제작비 조달에 나서기 위해 1993년 영화사 박광수필름을 설립했고 여기서 만든 첫 영화가 <그 섬에 가고 싶다>였다. 외딴 섬에서 장지 이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 분단의 깊은 상처를 그린 박광수다운 영화였지만 대립을 주술적으로 화해하는 결말이 미흡하다는 비판적 논평이 있었다.

다섯번째 작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은 국민주 모금이라는 한국영화사상 초유의 방식을 통해 완성된 작품.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한 노동영웅 전태일의 삶을 한 지식인의 회상 장치를 통해 극화한 이 영화는 고도로 정제된 화면이 돋보였고 평단의 고른 지지를 얻었으나 일부에선 이야기의 단순성과 영웅주의적 인물묘사를 단점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상품으로서 시대착오적인 듯한 이 영화는 뜻밖에도 박광수 영화 중에서는 최대 관객을 불러모았다.

그의 다음 작품은 1901년 제주민란을 이끈 장두 이재수의 삶을 다룬 <이재수의 난>(1999). 제작비가 35억에 달하는 한국-프랑스 합작영화로 충무로의 유행과 정반대 편에 서서 꿋꿋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켜나가는 태도를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1996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 부위원장으로 3년간 활동했으며, 1998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4년<방아쇠>를 연출 하였고, 2005년 <눈부신 날에>각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