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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도브젠코 (Aleksandr Dovzhenko)

1894-09-11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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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어명Aleksandr Dovzhenko
  • 다른 이름알렉산더 도브첸코;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알렉산드르 도프젠코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94-09-11
  • 사망1956-11-25
  • 성별

소개

알렉산드르 도브젠코는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과 함께 소련의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대가 가운데 한명으로 꼽힌다. 도브젠코의 영화들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색채의 정치성을 띠면서도 이민족적이고 신비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소련 영화감독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즉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원한 고향 우크라이나의 경험을 영화로 기록한 위대한 시네아스트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 경력 내내 그는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정치적 발전과 근대화 경험을 추적했고 그 지방과 자신 사이의 강력한 유대감을 표현했다. 북동우크라이나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도브젠코는 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17년의 혁명 후에 그는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 당원이 되어 급진적인 정치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고, 베를린에서 미술공부를 한 후에는 잠깐 동안 정치적인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영화가 완벽한 정치적인 매체라고 생각한 그는 1926년에 오뎃사의 영화스튜디오에 들어와 영화작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개혁가 바스야 Vasya-reformator>(1926)라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시나리오를 탈고한 다음 그가 처음 만든 영화는 <사랑의 열매 Yagodka Liubvi>(1926)였다. 사회적, 성적 관습에 대한 풍자코미디인 이 영화에 이어 그는 정치 스릴러 <외교 가방 Sumka Dip-kurera>(1927)을 만들지만, 이 작품들은 도브젠코 자신도 형편없는 습작이라고 말한 실패작들이었다. 그가 자기 작품들 가운데 진지한 프로젝트의 출발로 여긴 것은 다음 작품 <즈베니고라 Zvenigora>(1928)였다. 마술적인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스타일을 사용하면서 그는 이 영화를 우크라이나의 과거의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볼셰비키의 현재와 결합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정치적인 알레고리로 만들었다.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주제를 화면에 담기 시작한 이 작품은 이 지방 소작농의 삶과 투쟁을 영예롭게 묘사한 도브젠코의 대표적인 3부작 <병기고 Arsena>(1928) <대지 Zem-lya>(1930) <이반 Ivan>(1932)을 예고하는 영화였다. <병기고>는 1918년에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가 반볼셰비키 민족주의자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키예프의 군수품 공장을 지켜낸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도브젠코는 때로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면서 우크라이나의 과거에 대한 언급과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결합한다. <대지>는 도브젠코의 최고작이자 가장 논쟁적인 작품으로서, 그에게 영화의 시인이라는 평판을 가져다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소비에트의 농업 정책에 따른 우크라이나 농장의 집산화라는 시사적이고 논쟁적인 이슈를 다룬다. 그처럼 명백히 정치적인 소재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때로는 시적이고 서정적이며 때로는 초현실주의적인 정조로 인생과 자연에 있어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이클을 관조적으로 바라본다. 도브젠코의 첫번째 유성영화 <이반>은 우크라이나를 무대로 드네프르강 댐을 건설하는 동안 정치적인 의식이 고양되는 소년의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그리고 있다. 새로이 산업화된 시스템 속에서의 노동자 인물의 위치에 대한 탐구인 이 영화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한 풍부하게 탐구한다. 민족주의적인 이탈을 허용하려 하지 않던 당시 소련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도브젠코의 걸작 <대지>와 <이반>은 형식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당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도브젠코는 우크라이나의 문제에서 벗어난 영화를 만들기도 했고, 스탈린주의적인 개인 숭배에 봉사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3부작 이후의 이 영화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전 작품들의 작품성에 미치지 못했다. 소련의 영화산업이 더욱 경직되고 관료화되고 당의 검열이 엄격해지자 도브젠코의 예술적 창조력은 쇠락해 갔던 것이다. 2차대전 동안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지휘하던 그는 전후에 <바다의 시 Poema o More>라는 영화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발전이라는 관심사로 복귀하기를 희망했으나 작품을 끝마치지 못하고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이 영화는 그의 부인의 손에 의해 1958년에 완성되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