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 다른 이름Alan Smithee;Donald Siegel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12-10-26
- 사망1991-04-20
- 성별남
소개
대표작 <신체강탈자의 침입> <살인자들> <더티 하리>
비디오 출시작 <더티 하리> <알카트라즈 탈출> <텔레폰> <러프 컷> <돌파구>
돈 시겔은 액션영화의 대가였다. 적은 제작비로 빠른 시간에 영화제작을 마쳐야 하는 싸구려영화의 감독이었지만 고도로 정확하게 계산된 액션장면 연출은 시겔의 장기였다. 50년대 이후 시겔에게 따라다니는 별명은 이른바 ‘B급영화의 제왕’. 그러나 시겔은 동시대의 다른 감독들만한 명예를 누리지 못했다. 시겔은 영화에 자기 스타일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것. 미국에서는 영화제작자들에게만 유능한 감독으로 소문났던 시겔을 명예의 전당에 올린 것은 50년대의 프랑스 비평가들이었다. 더이상 잘할 수 없는 스튜디오 감독이라는 것이다.
시겔은 33년 워너브러더스에 배우로 취직해 영화자료실 조수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편집실 책임자로 일했다. 30, 40년대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성기.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에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숱하게 많은 싸구려영화들을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이 만들어냈다. 이때의 편집실 경험을 바탕으로 45년에 만든 단편영화 <밤의 별 Star in Night>(1945)과 기록영화 <히틀러는 살아 있나? Hitler Lives?>로 오스카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다음해부터 극영화 감독으로 뛰어든 시겔의 액션영화는 대부분 도덕관이 애매모호한 남성 영웅이 주인공이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레이먼드 챈들러, 대시엘 해밋의 소설에 나오는 남성들과 성격이 비슷하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Body Snatchers>(1956) <살인자들 The Killers>(1964) 등의 초기 영화들도 주목받았지만 시겔의 액션영화는 60년대 후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경찰영화를 통해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시겔은 68년에 <일망타진 Coogan’s Bluff>으로 이스트우드와 처음 교분을 튼 뒤, 그와 5편의 영화를 같이 찍었다. 당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스타가 된 뒤 고국인 미국에 돌아와 입지를 모색하고 있었다.
두사람의 출세작은 <더티 하리 Dirty Harry> (1971). 사이코 범죄자를 쫓아다니는 하리 캘러한 경사의 얘기인데,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만든 동시대의 <프렌치 커넥션>과 비교할 만한 형사의 냉정한 성격 묘사가 압권이다. 하리는 힘들게 잡은 범인을 이런저런 이유로 풀어주는 미국의 법 제도가 불만이고 아예 법원의 판결을 무시한 채 범인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잔인하기로는 하리 경사나 범인이나 다를 게 없다. 하리가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하리의 법이다. <더티 하리>는 영화만듦새의 구조로만 보자면 완벽한 교과서다. 이야기 전개나 결정적인 추적 장면의 배치, 긴장과 이완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시겔은 숨막히는 형사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이 영화에서 보수주의자들의 공포를 보았다. 히피운동과 반전데모가 횡행하는 시대에 미국의 법 질서 수호에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의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존 웨인과 로렌 바콜이 출연한 <최후의 총잡이 The Shootist>(1976)는 노인들이 나오는 서부극의 만가다. 영화가 시작되면 늙고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왕년의 총잡이 존 웨인이 마을로 걸어들어온다. 거리에는 마차와 자동차가 일으키는 먼지가 인다. 존 웨인은 죽어가기 직전에 이 마을을 최종 도착지로 정하고 막 도착했다. 웨인이 왠지 불안해 보이는 거동으로 화면에 들어올 때 카메라는 서서히 이동하면서 자동차와 마차가 일으키는 거리의 먼지 속에서 웨인의 형체를 잡아낸다. 자동차가 있는 마을은 총잡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문명이 건설된 서부에는 총잡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부영화로 유명한 존 웨인은 늙었고 한때의 인기장르였던 서부영화도 장르로서 시효를 다했다. 영화 속 존 웨인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는 죽기 직전의 임종장소로 이 마을을 택한 것이다. 시겔은 이 한 장면만으로도 드라마의 상황뿐만 아니라 서부영화라는 장르를 둘러싼 맥락까지 설명한다. <카이에>의 평론가들이 그토록 칭찬했던 ‘장면의 효율성’ 미학이 여기 집결돼 있다.
시겔은 <최후의 총잡이> 뒤에도 <알카트라즈 탈출 Escape from Alcatraz>(1979) <텔레폰 Telefon>(1977) <러프 컷 Rough Cut>(1979) <재수없는 상대 Jinxed!>(1982) 등의 영화를 더 찍었다. <러프 컷>은 좀 싱겁지만 다른 영화들은 장인 돈 시겔의 만년의 걸작들이다. 그리고 시겔은 91년에 사망했다. <더티 하리>가 논란을 일으켰던 72년 당시 돈 시겔은 말했다. “난 항상 반항아였다. 그게 젊은이들이 내 영화를 좋아한 이유다. 난 자주 내가 일하던 곳에서 해고당했다. 난 권위가 싫다.” 시겔은 평생을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상업영화 장르에서 일했으며 처음에는 기교를 익혔고 나중에는 기교 속에 자기 얘기를 심는 법을 익혔다. 존 포드처럼 별로 두드러지지 않게 튀지 않는 화면을 연출했지만 시겔이 나이를 먹고 만든 어떤 영화들은 심오한 통찰을 보여준다. <b>[씨네21 영화감독사전]</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