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 직업배우
- 생년월일1895-10-04
- 사망1966-02-01
- 성별남
소개
대표작 <우리의 환대>
버스터 키턴은 채플린과 비견되는 미국 무성 코미디 시대를 이끈 창조적 스타이며 영화사의 거장이다. 그는 자신이 위대한 영화들을 만들었던 당시인 1920년대보다 오늘날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감독이다. 채플린처럼 키턴은 연극 가족들을 뒀고, 가족들의 보드빌 무대 위에서 도제기간을 거쳤다. 키턴이 채플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린 시절과 가족의 삶이 덜 고통스럽고 더 평화로웠고, 채플린의 영화를 후에 어둡게 이끈 젊은 날의 암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키턴의 영화들은 더 유쾌하고 활동적이고 낙관적이며, 넉살좋은 곡예와 트릭으로 만들어졌다. 키턴의 코미디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이드 마크는 ‘무표정 얼굴’인데 표면으로 코미디를 포착해낸 키턴의 재능을 알 수 있다. 키턴의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얼굴, 작지만 거의 초인간적인 육체는 언제나 웃음을 만들어냈다. 그의 영화는 물리적 세계의 무한함에 맞서는 한 보잘것없는 인간의 악전고투 속에서 페이소스를 가져온다.
1910년대 후반, 키턴은 그의 친구 패티 아르버클을 출연시켜 두릴짜리 코미디를 만든다. 프랑스에서의 복무기간을 거친 후, 1920년대 초반에는 자신의 두릴짜리 코미디 시리즈에 출연한다. 이 영화들은 키턴의 코믹한 시각적인 재능을 보여줬다. 1923년 키턴의 프로듀서인 조셉 M. 셴크는 예전엔 스타였지만 이제는 스캔들로 몰락한 패티 아르버클을 대체할 만한 극영화 시리즈에 새로운 코믹 스타를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1923년과 1929년 사이에 키턴은 1년에 두편이라는 규칙적인 스케줄에 따라 12편의 극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항상 초가을이면 월드 시리즈를 보기 위해 동부로 여행을 떠났다. 키턴의 이러한 규칙적 패턴은 그가 영화를 바라보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낸다. 그는 예술적인 걸작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하루에 두번 연기하는 보드빌처럼 날마다의 오락을 재빠르게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규칙적인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12개의 무성영화 중 많은 작품은 채플린의 위대한 코믹 작품과 나란히 랭크될 만한 수준의 걸작들이다.
영화들 중 대부분은 패러디적인 전제로 시작됐다. 시민전쟁 로맨스인 <장군 The General> (1926), 엄청난 불화를 다룬 <우리의 환대 Our Hospitality>(1923), 탐정 셜록 홈스 이야기인 <셜록 2세 Shelock, Jr.>(1924), 미시시피 보트 경주인 <증기선의 빌 2세 Steamboat Bill, Jr.>(1928), 그리고 유쾌한 서부극 <서부로 Go West>(1925). 이러한 영화들은 항상 관습적으로 숙녀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만족하려는 키턴의 캐릭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가장 뛰어난 영화는 <장군>인데 도둑맞은 기관차를 찾아서 북부로 추적을 떠난 키턴은 기관차와 애인을 구하고 나서 다시 추적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되돌아간다. 시작부터 끝까지 광대하게 펼쳐진 추적 시퀀스는 코믹한 내러티브, 추적의 리듬, 키턴의 육체적 곡예, 그리고 그의 기계적 장치에 대한 선호로 어우러졌고,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코믹 서사시가 됐다.
채플린과 다르게 키턴의 스타성과 재기발랄함은 동시녹음이 실시된 할리우드의 유성시대에선 살아남지 못했다. 키턴은 육체적 코미디와 마이크 둘 다의 요구에 맞추는 것에 실패했고, 사생활마저 불우했다. 내털리 탈마즈와의 쓰라린 이혼은 그를 심각한 주정꾼으로 만들었고, 키턴의 술마시기는 개인적 고통에 그치지 않고 감독생활에도 심각한 위협이 됐다. 그의 코믹한 정신도, 곡예적인 육체적 도구도 그렇게 많은 알코올의 남용에는 살아남지 못했다. 1929년과 1933년 사이 MGM은 키턴에게 따분한 상황 코미디들의 시리즈를 맡겼다. 그 다음 20여년 동안 키턴은 채플린의 <라임라이트 Limelight>(1952)에서 주요 역할로 컴백할 때까지 싸구려 두릴짜리 유성 코미디와 광고 출연으로 살아갔다. 키턴은 다시 결혼을 하고, 술을 끊고 연극과 텔레비전극을 만들고, 영화출연을 했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그가 죽은 후에야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다.
<b>[씨네21 영화감독사전]</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