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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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명陳凱歌
- 다른 이름Chen Kai Ge; Chen Kaige; 진개가;첸카이거; 첸 카이거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52-08-12
- 성별남
소개
첸카이거는 장이모와 같이 중국영화 감독들의 ‘5세대’ 사이에서 주도적 목소리를 내는 감독이다. 그는 문화혁명에 홍위병으로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그 시기에 인민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옌안 지방에서 고무재배를 하도록 하방된 사람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첸은 문화혁명에 연루된 그의 세대의 관심사를 정확히 겨냥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와 그의 명성은 중국영화를 세계에 알렸고, 중국영화의 새로운 지도를 위한 길을 내줄 수 있게 됐다.
첸카이거는 영화감독인 첸화이아이의 아들이다. 문화혁명 시기를 옌안에서 보낸 후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1975년부터 베이징 영화공정소에서 일했다. 폐교됐던 베이징 영화아카데미가 문을 열자 78년부터 82년까지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1984년 장이모의 촬영으로 첫 영화 <황토지 黃土地>를 완성한다.
지적인 그의 작품은 중국역사에 대한 강력한 고찰이다. <황토지>는 ‘사람과 대지’ 사이의 관계를, <대열병 大閱兵>(1985)은 ‘개인과 단체’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으며, <아이들의 왕 孩子王>(1987)은 ‘사람과 문화’ 사이를 고려한다. <황토지>는 민속민요 구조를 내러티브에 적용한 영화로, 길게 열려진 쇼트와 정교한 편집이 특징적이다. 첸은 <대열병>과 <아이들의 왕>에서 시적 리얼리즘의 화려한 스타일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첸의 영화들은 선전 선동적인 예술 속에서 많이 사용된 주제들을 피하고, 마오이즘과 혁명에 대한 어떤 영웅적 독해도 거부한다.
<황토지>는 193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팔로군의 한 병사가 민요를 수집하기 위해 가난한 마을 산시성에 도착한다. 이 병사는 소녀에게 공산당의 거점인 옌안에서는 여성이 다른 대접을 받는다는 말을 하고 이 말을 듣고 마을의 노인과 약혼했던 소녀는 옌안을 향해 떠난다. 영화는 군인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불모의 대지에서 빈약한 결실이라도 짜내려는 농민들의 시도에 초점을 맞춘다. 소녀는 마을을 떠나며 “만인을 구하려면 공산당에 의지해야 한다”는 공산당에 대한 축가를 부르지만 마을이 물에 잠기는 자연의 소리에 의해 소녀의 소리는 침묵되어진다. 여기에 첸은 정치적 은유를 담으면서도, 검열을 피해가려 했다. 이처럼 첸의 영화에서는 말해지지 않은 것이 말해진 것보다 중요하다. <황토지>는 첸의 영화 중 가장 완벽하게 모든 것이 성취된 영화처럼 보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영화로 받아들였다.
천안문의 건국 기념행진에 참가하는 군부대에 대한 정치적 해석 때문에 당국의 압력을 받았던 <대열병>과 시골학교로 하방당한 교사의 교육방책과 당국과의 갈등을 그린 <아이들의 왕> 이후 첸카이거는 미국으로 가 듀란듀란의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한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전통과 미학 사이의 정교한 접근인 <현 위의 인생 邊走邊唱>(1992)을 만든다. 1993년 첸카이거는 그의 영화 경력을 새롭게 시작시킬 <패왕별희 覇王別姬>를 완성한다. 중국의 경극을 바탕으로 이성이 상실된 문화혁명 시기와 동성애에 접근한 이 작품은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국제무대에 첸을 화려하게 등장시킨다. 비평적·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그의 첫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첸의 오리엔탈리즘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1996년 거대자본을 들여, 20년대 상하이를 무대로 한 <풍월 風月>을 완성한다.
그의 작업은 이제 좀더 개인적으로 치우쳤고, 첸은 자신의 지적인 계보를 던지고 그 위에 상업적 색깔을 입히게 됐다.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과 함께 만든 스테디 캠의 몽환적 화면은 탐미주의와 형식주의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했다. 이로써 첸카이거는 중국으로부터도 점점 멀어져가고 있으며, 다양한 변화를 모색해가는 그의 영화동지인 장이모와도 전혀 다른 세대처럼 보인다. 지금 그는 중국영화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야망에 가득 찬 프로젝트인 진시황에 관한 대서사극 <진 秦>에 착수했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