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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재미일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이기도 하다.”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이라고 한다. 이 문장은 <창작의 블랙홀을 건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안내서>의 뒤표지에 인용되었는데, <롤리타>가 책 제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 작품으로부터 기인한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을 널리 쓰고 있음을 떠올리면 나보코프가 최소한 저 말에 대해서는 실천하는 작가였구나 싶다.
<창작의 블랙홀을 건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을 보고 당신이 어떤 내용을 기대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불멸의’ 성공을 거둔 스테디셀러 겸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한 조건을 탐색한다. 작가가 아닌 크리에이터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겠지만, 비단 출판계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고 음악부터 레스토랑, 가위 같은 물건까지를 이야기한다.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는 작가이자 마케터이며 전략가다. 그는 걸작을 만드는 법이 아니라 시장에서 가능한 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창작의 블랙홀을 건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안내서> 지속 가능한 창작자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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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떼목장에 놀러갔던 때의 일이다. 야트막한 언덕에 나무 하나가 서 있는데, 왜인지 그 나무를 향해 여자를 업고 가는 남자들이 있었다. 버뮤다의 삼각지대 같은 곳이라 부상자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나 했으나, 알고 보니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송승헌이 송혜교를 업고 가는 장면을 그곳에서 찍었단다. 이런 ‘유명한’ 나무들은 곳곳에 있기 마련이며 한번 유명세를 얻으면 여간해서는 베어내지 않는다. 여행을 다녀보면 관광명소에 유명한 나무가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영국의 경우는 “이게 바로 윌리엄 월리스가 추종자들을 모았던 참나무입니다”(<브레이브 하트>가 월리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같은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나무들이 있단다. 옥스퍼드대학교 영문학 교수 피오나 스태퍼드는 <길고 긴 나무의 삶>에서 나무의 이야기를 문학과 신화, 예술로 읽어냈다.
챕터 제목은 나무 이름이다. 벚나무, 마가목, 올리브나무, 사이프러스, 참나무, 물푸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길고 긴 나무의 삶> 나무와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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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유명해진 소설 <파이 이야기>는 어느 작가가 흥미로운 경험을 한 사람을 소개받고 찾아가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는 식으로 구성된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역시 그렇다. 헤더 모리스는 어느 날,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졌다는 한 노신사를 소개받았다. 랄레 소콜로프라는 이름의 그는 홀로코스트에서의 시간을 들려주었다. 이것은 그와 그의 아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아우슈비츠의 비르케나우는 특히 혹독한 상황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이야기는 영화 시나리오로 먼저 만들어진 뒤 소설로 개작되었다(영화는 제작되지 못했다). 랄레 소콜로프는 24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다. 슬로바키아에서 온 유대인인 그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 문신을 새기는 일을 하게 된다. 독일어로 문신기술자라는 뜻인 ‘테토비러’로 일하게 된 그는 수용자들에게 번호를 새기는 일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일을 하게 된 랄레. 그나마도 잉
씨네21 추천도서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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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1952년.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소설 <부끄러움>의 첫 문장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에르노의 12살 때의 기억(그는 1940년생이다). ‘그 사건’, 그러니까 아버지 손에 전지용 낫이 들려 있었고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던 그 순간은 에르노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부끄러움>이 1997년에 발표된 소설이니 45년이 지나서야 꺼내보는 기억이다. “내 유년 시절의 정확하고 분명한 첫 번째 날.” 아니 에르노는 그 시기를 추억에서도 끄집어내지만 도서관에 가서 당시의 신문을 찾아보기도 한다. 세상에서 일어난 일, 어렸던 자신이 기억하는 일. 옛날 물건들을 꺼내보고,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실재했던 12살의 나날을 복구한다. “당시의 내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를 가두었던 환경, 학교, 가족, 시골 마을의 의미를 규정하는 동시에, 미처 그 모순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 삶을
씨네21 추천도서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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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죽었다.” 몇년 간격으로 발표되는 권여선의 소설들을 비정기적으로 따라읽고 있었던 나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이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언니를 잃은 후 다언과 엄마의 삶은 망가진다. 다언에게 언니 해언은 내용 없이 텅 빈 형식의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하고, ‘어린애처럼 무심하고 무욕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속옷을 잘 챙겨입지 않는 부주의함으로 엄마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몹시 드물고 귀하게’ 예뻤던 ‘나’의 언니. 그러한 언니가 죽은 후 엄마는 죽은 언니의 이름을 혜은으로 개명하는 데 집착하고 다언 역시 방황하다가 언니에 가깝게 얼굴을 고쳐나가는 것에 몰두한다. 가족의 죽음은 원래 극복될 수 없다. 더구나 사건은 미제로 남았고 그날 언니의 행적은 미스터리가 되어 다언의 머릿속에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언니의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됐던 두명의 남자 한만우와 신정준, 목격자로 나선 윤태림과 다언의 선배 상
씨네21 추천도서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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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덮어도, 이 영화가 끝나도 어딘가에서 이 사람들은 계속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혹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가 있다. 요시다 아키미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역시 그렇다. 엄마와 자식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살았던 아버지의 15년 만의 부고, 어른이 되어 이제 부모의 보살핌 같은 것은 필요 없지만 장녀 사치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장례식장을 찾고 거기서 아버지가 남긴 또 다른 동생 스즈를 만난다. 갈 곳이 없어진 스즈에게 사치가 “우리와 함께 갈래?”라고 손을 내미는 데서 시작했던 만화가 어느덧 완결이다. 2006년 만화잡지 <월간 플라워스>에서 시작된 연재가 일본에서는 지난해 8월에 마무리되었고, 한국에서는 1권이 2009년 출간되었으니 10년 만의 완간이다. 가족이 되어 가마쿠라에서 함께 살며 조금씩 앞을 향해 걸어갔던 자매들의 이야기와 이별할 생각을 하니 아쉽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새 친구를 사귀거나
씨네21 추천도서 <바닷마을 다이어리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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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의 집은 방이 여럿이었다. 우지는 차림이 깔끔했다. 오기가 눈을 떴다. 그 무렵에는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개들이 너무 짖지 않는다. 남편은 제조사 담당자와 통화하고 있다. 유는 갓 부서 배치를 받은 진에게 자신을 유능한 대리라고 소개했다. 뜨거운 걸 잘 마시면 처복이 있다.
편혜영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소설 앞 문장을 이어봤다. 다른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처한 불운은 색이 다르지만 첫 문장을 이어보니 이것이 모두 하나의 선 위에 놓인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의 첫 문장을 읽는 일은 불쑥 남의 정원, 남의 안방, 남의 서재로 한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것은 무례하지만 남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에게 갑자기 닥친 불운과 그것의 연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되짚어봐도 도무지 알 수 없이 엉망이 되어가는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편혜영은 이 책에 원래 ‘우리들의 실패’라는 제목을 붙여두었다고 한다. “우연에 미숙하고, 두려워서 모른 척하거나 오직 잃은
씨네21 추천도서 <소년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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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는 ‘0년 전 당신은’이라는 기능이 있어서 아침마다 부탁도 안 했는데 몇년 전 내가 올린 글이나 사진을 보여준다. 몇년 전 발췌해두었던 글을 얼마 전 페이스북이 다시 보여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이번 북엔즈에서 소개하는 소설 중 일부였다. 권여선의 <무릎> 중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문장이었다. 당시 얼마나 비관주의에 빠져 있었던 건지 모르겠는데, 그 문장이 실린 소설을 이번에 다시 읽으며 불행한 나날 속에서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꿋꿋함을 발견했다. 살인사건에서 시작한 <레몬>은 그 여파로 망가진 삶들을 보여주지만 불행만을 포착하지 않고 그 안에서 점차 레몬의 빛을 발견해간다. 오랜 간격을 두고 연재되었던 소설인 만큼 삶과 희망의 의미를 터무니없이 제시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찬찬히 꺼내 보여서 더욱 미더운 소설이다. 편혜영의 소설집 <소년이로>에는 8편의 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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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가깝고 시차도 없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여행지로 일본이 각광받는 이유다. 비행편도 잦고 직항으로 가는 도시가 많으며, 배로도 갈 수 있는 도시들이 있으니 금상첨화다. 계절과 날씨, 생활방식이 비슷한 데서 오는 유행의 사이클, 선호하는 음식과 물건의 흡사함 역시 그 선호에 한몫한다. 그러니 일본 여행서는 유독 세분화되는 것이다. 가이드북과 에세이가 고루 많을 뿐 아니라 여행 테마(쇼핑, 온천 등)와 지역(홋카이도, 간사이, 소도시 등)에 따른 책이 주기적으로 선을 보인다. 나는 <교토의 밤 산책자>를 쓸 때 계절별 교토와 밤의 교토를 쓰는 데 주력했는데, 그것은 이미 교토만을 다룬 책이 충분히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 도시 가운데 가장 여러 번 말해진 도시를 꼽자면 도쿄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 도쿄를,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가 <아직, 도쿄>라는 에세이집에 담았다.
‘아직, 도쿄’라는 책의 제목에는 두고 온 그리움이 한가득이다. 몸은 이곳이지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아직, 도쿄>, <레트로-오키나와> 갑시다, 도쿄에 오키나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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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 디렉터 김진아의 첫 에세이. 커트머리에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언제라도 앞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표지 인물은 ‘여성다움’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듯 보인다. 야망을 가질 것, 내 파이를 구할 것. 페미니즘은 세대에 따라 다른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김진아가 속한 3040세대는 <섹스 앤 더 시티>를 통해 ‘능동적 섹시’를 학습해왔다.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반성문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리라. 과연 그것은 나의 의지, 나의 선택이었나를 묻고 아니었음을 인정하고야 시작할 수 있는 싸움. 그러고 나서야 보게 되는 현실이 있다. 어느 순간 사내정치에 둔감했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게 된다. 이기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자기 자신을 구조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현실에서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광고 일을 오래 계속하며 분야가 다른 업계의 자영업자로 자리를 잡는 과정, 페미니스트로서 ‘지속 가능성’을 타진하는 싸움, 그 모든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김진아의 첫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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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웹사이트 이름으로, 등산하는 여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곳이다. <고백> <백설공주 살인사건> 등 영화로 만들어진 미스터리 소설들로 잘 알려진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이다. 이번 책을 내고 가진 출간기념회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는데, 평소 취미인 등산을 소재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연작 단편으로 써냈다. 목차는 일본 니가타의 묘코산과 히우치산을 시작으로 홋카이도의 리시리산, 뉴질랜드 통가리로산 등을 경유하는 산과 국립공원, 산악 페스티벌 이름으로 되어 있다. 산이 익숙한 사람도 산이 처음인 사람도 있다. 그리고 다들 그 자신이 산처럼 거대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리시리산’과 ‘시로우마다케’는 자매가 주인공인데 전자는 동생의 시점으로, 후자는 언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동생은 마지막 ‘가라페스에 가자’에서 한번 더 등장한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보통 동반자가 있는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여자들의 등산일기> 산에서 발견하는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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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 핑크> <내 남자의 유통기한> 등을 연출한 독일의 도리스 되리 감독은 소설가로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도 그림책과 소설이 여러 권 출간되었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는 도리스 되리의 대표작인 <파니 핑크>와 설정을 공유하는 단편소설 <오르페오>가 실린 연작 단편집이다. 총 18편이 실려 있다. 도리스 되리의 소설들은 대부분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많은 경우 이성애에 ‘시달린’(달리 적합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성 혹은 여성들이 벌이는 크고 작은 일들을 그린다. 소설 속 여자들은 남자의 사랑을 원하고 그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한다. 그 좌절한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희망은 헛되고 불행은 구체적이다. 영화 <파니 핑크>로 발전된 <오르페오>의 제목은 오르페오라는 점술가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주인공 안토니아는 조니와 살고 있는데 조니가 월드컵에 빠져 지내자
씨네21 추천도서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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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얘기지만 내 경우에는 외국 역사에 대한 지식 상당수가 <먼 나라 이웃 나라>에서 비롯했다. 다른 왕 이름은 기억도 못하면서 프랑스의 ‘피의 여왕’ 메리와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해서는 잊지 않는 것이 다 어릴 때 읽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영향인데, 여왕의 이름 앞에 ‘피의’라는 수식이 붙게 된 연유를 짙은 먹물로 표현한 페이지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다소 복잡한, 글로 읽으면 암기의 영역에 들어가는 역사나 철학을 만화로 읽을 때에는 쉽게 읽히고 오래 기억된다는 장점이 있다. <철학의 이단자들>은 유럽 철학 연구 권위자(그중에서도 스피노자 전문가)인 스티븐 내들러가 글을 쓰고 그의 아들 벤 내들러가 그림을 그린 철학 만화책이다.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이론에 무비판적으로 헌신했던 1600년대 수많은 사상가 중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연구하고 논쟁 벌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상가들의 사유와 논리를 만화로 묶었다. 지
씨네21 추천도서 <철학의 이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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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기형도”라고 답했다가 비웃음을 산 적이 있다. 나를 마치 중2병 소녀처럼 바라보던 그 사람은 “넌 아직 많은 시를 읽어보진 않은 모양”이라고 나를 비웃으며 “그 시인은 다소 과대평가되었지”라고 읊조렸다. 세상 다 아는 척 쓸쓸한 눈빛을 지어 보이던 그의 표정을 떠올리면 지금은 그저 웃음만 난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 이제 다시 나는 좋아하는 시인이 기형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의 시를 다시 꺼내 볼 때에는 웬일인지 서글프고 쓸쓸하고 이대로는 못 살겠다 싶은 기분이 들 때이다. 너무 유명해져서 이제 닳아버린 문장,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를 읽다가 눈길을 위로 올리면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가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유명해지고 흔해져서 나만의 것이 아닌 시라 하여도 어찌
씨네21 추천도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기형도 시전집), <어느 푸른 저녁>(젊은 시인 88 트리뷰트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