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한 남자가 있다. 세헤라자데의 운명을 타고난 이 남자는 72살의 노작가 오거스트 브릴이며, 그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자 역시 오거스트 브릴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여러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며 이름을 떨친 인생이었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이혼한 딸과 남자친구를 이라크 전쟁으로 잃은 손녀딸, 그리고 자동차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어 온전치 못한 육신뿐이다. 매일 밤 죽음의 충동을 이겨내며 노작가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오늘의 주인공은 오언 브릭이라는 스물아홉살의 젊은이로, 작가에 의해 미국 내전의 한복판으로 내몰린 그는 전쟁의 주범인 한 남자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그 남자가 누구냐고? 오거스트 브릴이다. 결국 <어둠 속의 남자>는 한 남자의 머릿속을 탐험하는 과정이며, 이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쏟아지는 생각 속에서 남자가 감추어놓은 진짜 트라우마를 발견하는 데에 있다. 현실과 비현실을 자
삶에 눈뜬 노장의 마술 같은 치유
-
일본 도쿄 근교에 사는 루카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 남들과의 소통이 서투른 소녀.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수족관에서 깊은 바닷속에서 듀공의 손에 자랐다는 신비의 두 소년(우미와 소라)을 만난다. 한편 전세계의 수족관에서는 원인 모를 물고기들의 실종사건이 일어난다. 사라진 물고기들의 공통점은 모두 몸에 흰 점박이 무늬가 있는 종이라는 것. 연이어 평소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거대한 심해어들이 해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루카는 두 소년과 함께 인간은 들을 수 없는 바다의 메시지를 듣게 되는데…. 도입부 줄거리를 대충 요약하긴 했지만 <해수(海獸)의 아이>는 “줄거리가 이러이러하다”라고 쉽게 단언할 수 없는 작품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저 몽환적이기만 한 해양판타지로, 어떤 이에게는 인류의 근원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하는 일종의 다큐멘터리로 느껴질 수 있는 이 만화는 그래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열린 만화다. 작가인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이렇듯 ‘쉽사리 언어로 정의내리
최고의 작화력이 창조한 매력적인 심해
-
1973년 9월11일. 칠레의 봄은 졌다. 국민선거로 이룩한 칠레의 민주사회주의 실험은 CIA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에 짓밟혀 사라졌다. ‘대통령 동지’ 아옌데는 기관총을 들고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칠레 혁명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한명의 아이콘이 있다. 노래를 통한 사회의 변혁을 주창했던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의 기수, 칠레 민중가요의 아버지인 빅토르 하라다. <씨네21> 독자라면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에 등장한 빅토르 하라의 재연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잡아들인 시민들로 가득한 스타디움. 한 젊은이가 일어나서 민중가요 <벤세레모스>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그는 곧 끌려나가 기타 치고 장단 맞추던 손과 팔이 뭉개진 채 총살당했다. 저자 조안 하라는 남편의 시체를 뒤로하고 칠레를 탈출한 뒤 1983년에 <
2008년! 그와 함께 노래하라!
-
소설의 시작. 한 남자가 메마른 눈빛으로 공터를 응시하고 있다. “가슴에 구멍이 났다”고 말하는 이 남자에게 구원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소설은 또 한명의 남자를 조명한다. 경찰청 수뇌부에서도 최고 엘리트로 평가받는 사에키 경시는 유아 실종사건을 맡아 고군분투한다. <통곡>이 유괴 살인사건에 대한 소설이란 점을 상기하면 전자는 유력한 살인범, 후자는 그를 뒤쫓는 추적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이 두 인물의 일상을 기반으로 한 발자국씩 앞으로 전진한다. 용의자가 신흥 종교에 빠져 전 재산을 재단에 기부하고 추적자가 경찰 간부인 아내와 별거하며 르포라이터 출신 애인과 사랑을 나눌 때까지, 평행선을 그리던 두 인물의 삶은 만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대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통곡>은 소설 내내 억눌러왔던 감정을 한꺼번에 분출시키는데, 그 파장이 꽤 크다. 이 소설은 트루먼 카포티의 문체로 서술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물 같다. 다시 말해
건조하게 조여드는 결말
-
-
소설을 영화화해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다. 존 어빙처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가의 소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라세 할스트롬의 <사이더 하우스>의 원작인 존 어빙의 <사이더 하우스>는 낙태가 불법이던 시대에 낙태를 전문으로 했던 의사와 그의 고아원이 키워낸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를 보고 실망했던 사람이라도 책과 사랑에 빠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테고,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책 첫장을 펴면서 밤새 읽을 준비를 하는 게 좋다. 의사 윌버 라치는 새 생명의 탄생을 돕는 ‘주님의 일’의 기술자인 동시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어머니들을 구제하는 ‘악마의 일’을 마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일하는 고아원은 아이를 낳자마자 버리고 가는 여자들과 아이를 지우려는 여자들의 유일한 피난처로, 몇번이고 파양되어 고아원에 돌아온 호머 웰즈는 라치의 아들 같은 존재로 자란다. 웰즈는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지만 낙태에는 반대한다. 웰즈는 낙태를 위해 찾아
선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존 어빙의 힘
-
경고! 이 만화를 보기 전 절대 식사를 하지 마시오! 경고문을 보고 <차이니즈 봉봉클럽>이 구토를 유발할 만큼 엽기적이고 잔인한 만화라고 오해를 할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만화를 보기 전 식사를 하면 안 되는 이유는 이 만화를 보고 또 식욕이 동해 과식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차이니즈 봉봉클럽>은 아무리 포만감에 가득 차 만화를 보더라도 책장을 덮는 순간 강렬한 허기를 느낄 수밖에 없게 하는 무시무시한 음식만화다.
편의점 삼각김밥에서조차 맛의 ‘오의’를 찾는 식도락 여고생 은영은 우연한 기회에 ‘차이니즈 봉봉클럽’이라는 정체불명의 서클에 가입한다. 이 서클은 전국 273개 초중고등학교에 지부를 갖고 있으며 전국의 유명한 중국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는 비밀클럽이다. 은영이 가입한 청송고등학교의 클럽 멤버들은 자장면 비빌 때 나는 소리에 황홀경을 느낄 정도로 진정한 중화요리 마니아들. 덮밥류의 전문가이며 초밥왕 쇼타를 똑 닮은 쇼타, 밀가루 음식의 전문가이
넌 이미 먹고 있다!
-
손에서 놓기가 정말 힘든 책이다. 468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에도, 법정스릴러다운 차가운 속도감에, 결함이 많아 인간적인 캐릭터, 빈 곳 없이 채워진 꼼꼼한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주인공 마이클 할러는 정의와 도덕은 다르며, 죄의 유무보다 중요한 것은 수임료 지불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경력 15년의 닳고 닳은 형사변호사다. 사무실처럼 쓰는 링컨 리무진 뒷좌석에서 여느 때와 같이 시간을 보내던 그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줄기차게 돈을 댈 수 있는 이른바 ‘대박 고객’을 만난다. 의뢰인 루이스 룰레는 강간 미수, 신체 상해로 기소됐는데 할러는 룰레를 만나는 순간 그가 기다려온 무고한 의뢰인일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변호를 준비하는 동안, 2년 전 의뢰인의 무죄 주장에도 유죄를 인정하고 감형받자고 유도한 지저스 사건과 룰레의 사건에서 유사함을 발견하고 두 사건의 진짜 범인은 룰레임을 깨닫는다. 심지어 룰레는 할러가 지저스의 변호사였단 사실을 알고 고약하게도 일부러 그를 고용했던 것. 너무
묵직하면서도 꼼꼼한 법정스릴러
-
<박찬욱의 몽타주>와 <박찬욱의 오마주>, 그리고 <김지운의 숏컷>으로부터 이어지는 마음산책의 세 번째 감독 에세이집이다. 앞서 두 감독과 영화적으로도 끈끈한 동지고, 그들 못지않게 영화광의 왕성한 식탐을 자랑하는 그이기에 <류승완의 본색> 역시 잡다하고 맛깔나는 영화의 성찬이다. 머리말에서 “성격이 산만하니 글도 산만할 것”이라는 귀여운 경고로 시작하더니 <배틀 로얄> <록키 발보아> <지옥의 영웅들> <칠검> 등 인상적으로 본 영화들의 영화평과 더불어 당시 영화월간지 <키노>에 실렸던 ‘액션 명장면 베스트10’과 이대근과 박노식 등 노액션배우들에 대한 예찬론까지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한다. 폐간하는 <키노>를 생각하며 쓴 ‘굿바이 키노’라는 글에서는 한때 영화잡지 기자를 꿈꾸기도 했던 그의 담담한 소회가 묻어나고, ‘버스터 키튼’이라는 글에서는 자신의 존재와 비전에 대한 조
류승완이 말하는 ‘나의 길’
-
내용을 기술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도. 아르헨티나 여성 아니타는 암투병 중이다. 그녀의 투쟁을 지켜보러 온 것은 친구 베아트리스와 애인 포지다. 하지만 아니타는 도무지 두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중산계급의 딸인 그녀에게 페미니스트 베아트리스와 좌파 변호사 포지는 왠지 어려운 상대다. 도무지 호전될 기미가 없는 투병생활에 지친 그녀는 어느 날 백일몽을 꾼다. 그리고 두 여인을 만난다. 한명은 1930년대의 할리우드 스타 ‘여주인’. 다른 한명은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명령을 받고 남성들에게 섹스를 제공하는 ‘W218’이다. 그 백일몽으로부터 아니타는 30년대 누아르와 거대한 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빠져든다.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에 영향을 끼친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와 <거미여인의 키스>의 작가인 마누엘 푸익은 70년대 페미니즘 운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천사의 음부>를 썼다. 그러니 질문은 명확하다.
여성의 완전한 자유에 대하여
-
올해 초까지 민주노동당 문화정책 연구원으로 일했던 저자가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포함해 책을 펴냈다. 월경(月經)의 고통을 강요하는 서울을 벗어나 파리에서 월경(越境)의 환희를 베어물었던 10년 전 유학 시절부터 원피스 나풀거리고 집회에 갔다가 전경들에게조차 무시당했던 날라리 여대생이 좌파정당에 잠입해서 활동가 명함을 내밀기까지의 곡절들이 섬세한 문체에 실려 있다. 세금으로 관광하는 한국 공직자들에 대한 날선 비판이나 68세대 좌파 의사들이 만든 프랑스 산부인과 체험도 흥미롭지만, 한국과 프랑스의 이질적인 문화 충돌을 경험한 이의 생생한 진술이야말로 눈에 띈다(사진을 찍은 프랑스 출신 예술가 희완은 저자의 연인이다. 두 사람은 결혼 대신 시민연대계약을 맺었고, 칼리라는 예쁜 딸을 낳았다). 자유와 정치, 문화와 교육의 문제들을 공적 영역에서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적 영역에까지 끌어내려 확장하는 독특한 에세이.
한 좌파 활동가의 반자본주의 처세서
-
때로 연애는 맛으로 기억된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 둘이 함께 먹었던 음식, 그 사람이 해주었던 음식 같은. 상대의 입맛에 맞추느냐, 상대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느냐의 여부는 관계를 통찰하는 단초를 제시하기도 한다. 다이라 아스코의 <오늘의 레시피>는 미각으로 이야기하는 사랑 이야기 모음집이다. 버터밥이 드러내는 남녀의 나이 차, 카레우동에 집착하는 애인을 참을 수 없는 여자의 이별과 만남을 비롯해 음식에 얽힌 사연이 남녀관계에서 힘을 행사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특정 음식이 어떻다고 설교하기보다 한 인간이 애인에 앞서 어떤 음식을 내세우는 이유나 심리의 근간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모르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라 해도 공감하게 된다. 왜 남자는 어렸을 때의 맛에 집착할까? 내가 싫어하는 게 이 남자일까 이 남자가 고집하는 음식일까? 이 권태는 음식문제일까 인간문제일까? 다이라 아스코의 또 다른 단편집 <사랑 보존법>에는 워낙 특이한 유형의 연애담이 등장하기 때문에
당신의 입맛에 맞는 사랑을 찾습니까
-
매주 새로 나오는 책을 읽고 소개하던 한 문화부 기자가 있었다. 그는 책만큼이나 그 책을 쓴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글쟁이들은 어떤 환경에서 글을 쓰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기자는 직접 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정민, 한비야, 이원복, 공병호 등 현재 대한민국 책시장을 주도하는 18명의 글쟁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의 글쟁이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10년째 출판담당 기자를 맡고 있는 저자의 개인적인 관심을 반영하듯 작가들의 글쓰기 노하우와 자료 보관법, 평소의 생활패턴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흥미로운 건 ‘글쓰는 사람은 불규칙적이고 즉흥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저술가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규칙적으로 글을 쓰는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 자리에서 기록하는 지독한
신간 담당 기자, 글쓰는 사람들을 만나다
-
“대초원의 한가운데 앉아 동서남북 하늘 가득한 별에 둘러싸여 똥을 싼다. 그 해방감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쾌감… 완전히 오르가슴이다.” <러브 앤 프리>의 저자인 일본의 괴짜여행가 다카하시 아유무가 몽골의 대초원을 여행하고 남긴 말이다. <그날 밤 게르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는 이 ‘초원방분’의 전설을 좇아 몽골을 찾은 한국의 여덟 여행가가 그곳에서 겪은 경험을 담은 공동 여행기다. 몽골에서 어찌나 ‘미칠 듯한’ 경험을 많이 했던지 공동집필명도 ‘초원광분’이다. 인천공항에서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지 3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절대 쉽사리 갈 수 없는 곳인 몽골을 향해 그야말로 ‘무작정’ 떠난 이들은 누군가에게 그 경험을 알리지 않으면 입이 근질거려 미칠 것 같아 이 책을 냈단다. 책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여정을 함께 하다보면 몽골이란 곳이 얼마나 따뜻하고도 현명하게 여행자들을 품어주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두개의 달을 만들 정
초원방분의 전설을 찾아 몽골로 떠나라
-
“헌책시장의 신이여, 나에게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현실의 윤택함부터 달라. 지식은 그런 뒤에 줘도 된다.” 첫눈에 반한 아가씨 뒤를 쫓아 헌책시장에 간 청년의 마음속에 책의 바다는 무료할 따름이다. 한없이 달려나가는 상상 속의 로맨틱 엔진만으로 코피를 내뿜는 청춘의 응시를 느끼지 못한 아가씨는 교토 거리의 모험에 사뿐사뿐 발을 디딘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매우 기묘한 환상담이다. 교토에 사는 모리미 도미히코에게 있어 교토는 술과 웃음이 흘러넘치는 판타지의 무대. 하늘에서 잉어가 떨어지고 밤길에는 남의 팬티를 벗기는 술버릇으로 유명한 술꾼이 돌아다닌다. 청년의 사랑은 결실을 맺을 기미가 안 보이고, 봄에서 겨울로 시간이 흘러간다. 최근 출간된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와 더불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기묘한 청춘 모험담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이야기로, 작가의 능청스런 수다가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
술꾼의 충고를 들어 아가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