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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혹은 나뭇잎 한장. 장편소설(掌篇小說)이나 엽편소설(葉片小說)이라고 불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콩트 모음집이다. 작은 판형에 290여쪽, 그런데 68편이나 실려 있는 건 그래서다. 이야기 하나가 두세 페이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설국>으로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도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이다. 그가 젊은 날에 (이십대였던 1921년부터 1935년 사이) 쓴 이야기들이라 <설국>과 <잠자는 미녀> 같은 작품들에 이르는 단초가 되는 ‘발상’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여자의 몸, 어린 여자의 몸, 생명, 삶, 죽음, 희생을 비롯한 죽음과 맞닿는 탐미주의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이야기도 있고, 예상외로 쿨한 연애담도 있고, 환상담도 꽤 있다.
이야기 내용 자체에 집중해 호불호를 가르는 일도 의미있겠으나, 그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있다. “많은 작가들이 젊은 시절에 시를 쓰지만, 나는 시 대
[도서] 거장의 젊은 손바닥에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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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다. “막 암전되는 화면처럼 어두운 눈”을 지닌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소년 같은 얼굴과 곧게 뻗은 팔다리, 매혹적인 목소리도 지녔단다. <바람이 분다, 가라>의 서인주 얘기다. 그림은 그리는 순간만이 중요하다며 캔버스 대신 곧 퇴색될 산성지를 택한 화가. 모두가 그녀에게 끌린다. 예술에 매혹되듯. 그리고 모두가 그녀의 내면을 속속들이 파악했다고 믿는다. 예술을 분석하듯. 서인주의 평생지기인 희곡작가 이정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맹렬하게 살던 서인주가 자살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서인주의 죽음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그러나 본격 추리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이정희는 서인주를 자살한 천재 화가로 미화하려는 평론가 강석원에 맞서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기로 결정한다. 탐정이라면 서인주가 죽은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목격자와 증거는 있는지 조사하겠지. 대신 이정희는 서인주의 작업실에 침입해서 유품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는다.
[한국 소설 품는 밤] 서늘한 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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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당신의 ‘고향 도시’에 생각해보라. 도시는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멜랑콜리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영혼의 공간이기에, 그에 얽힌 감정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세계 최대 규모의 열두 도시에 살고 있는, 혹은 살았던 작가들이 ‘고향 도시’에 대한 글을 썼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났거나 오래 살았던 한 도시에 대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도시와 삶의 풍광을 자유롭게 그려냈다. <스테이>는 열두 도시에 대한 열두 작가의 글을 담았는데, 모두 다른 이야기지만 어찌보면 서로 닮아 보이는 감상을 자아낸다. 복합적이고도 복잡한. 냉소적이고 자조적이지만 애정을 부인할 수는 없는. 돌아는 가는데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두 돌아버리게 만드는 현실에 대한 농담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아마 당신이 가장 뼈아픈 감정으로 읽게 될 글은 김영하가 쓴 서울에 대한 글 ‘단기기억상실증’일 것이다. “서울은 어쩌면 정신과적 상담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미치지는 않았을지 몰라
[도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서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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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선으로. 요즘 여행의 방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선을 그려야 하니 걷기 좋은 길, 오랫동안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길이 주목을 받는다. 주말에 서울 성곽을 따라 걸었다거나 휴가를 내 제주 올레길을 일주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는 그렇게 천천히 선을 긋는 여행을 시작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는 녹색연합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생태환경작가 박경화가 쓴 국립공원 탐방기다. 저자는 2007년에 국립공원 도보순례에 참여해 전국 국립공원을 탐방한 뒤 자료조사를 하고 다시 찾아 돌아보고 썼다. 저자의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에는 산성과 사찰, 자연생태계를 비롯한 국립공원의 생태학적 읽을거리가 많다. 2006년 벼락을 맞고 쓰러진 할아버지나무의 위용부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새들 사진까지, 사진자료도 풍부하다. 여행정보는 기본. ‘왜 과일
[도서] 나를 부르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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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아주 나약한 영혼을 가진 미국인에게도 비교적 가벼운 질병인데 반해, 무익함은 강인한 사람과 나약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미국인을 매번 파괴합니다. 우린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 이 세상에 만연한 악덕과 물신 숭배와 생명 경시 풍조를 비난하는 어떤 문장들이 이제 너무 나약하고 진부하게 들린다고 생각한다면, 대신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기를 권한다. 이토록 관대하고 지적이고 따뜻하며 동시에 숨넘어가게 웃긴 작가의 뒤를 3박4일 따라다니는 그루피가 되고 싶어질 테니.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중 국내 초역작이다. 보네거트가 자신의 작품들을 직접 평가한 리스트에 따르면,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당당히 A학점을 받았다. <타이탄의 미녀> <마더 나이트> <제일버드>와 같은 순위다(제일 점수가 안 좋은 작품은 <제일버드>
[도서] 보네거트! 이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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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고 싶다 지수 ★★★★
그들의 다른 책도 읽고 싶다 지수 ★★★★
세상 모든 글은 읽는 자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다. 심지어 일기조차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편지만큼 적극적으로 독자를 글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가는 글은 없다. 상대가 글을 쓰게 만드는 건 기본이고 다툼, 사랑, 혹은 영원한 결별을 ‘행동’하게 만드는 글이니까. 그런데 서간체 소설이건 서간집이건 재미있는 점은, 그런 문답의 과정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나 각자가 처한 상황을 이유로 편지들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묻지 않았던 것에 대한 대답, 질문에 대한 회피,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 이번주 신간 지면에 소개할 책들은 세권 다 편지글이다. 편지쓰는 문화가 사라진 시대에 편지만이 할 수 있는 긴장과 자극을 느끼게 해주는 책들이다.
<경계에서 춤추다>는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 서경식과 일본 소설가 다
[도서] 타지에서,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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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플루가 휩쓸던 시절, 멕시코 등 요주의 국가에서 떠나와 공항에서 바로 격리된 사람들을 보며 비로소 ‘생체 권력’이라는 단어를 실감했다. 이제 전염병은 국제적 문제이며, 개개인을 향한 추적 시스템도 계속 발달할 것이다.
<재와 빨강>은 이 현대적 소재를 카프카적 상상으로 풀어나간다. 아내가 바람나서 이혼한데다 회사에서도 따돌림당하는 주인공은 C국 본사로 파견나가서 인생을 ‘리셋’할 작정이다. 그런데 ‘리셋’은 그가 반기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C국에 가자마자 그는 미열이 있고 기침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공항에 격리되고, 회사에서도 대기 조치를 당한다. 마침 숙소는 전염병이 휩쓸고 있다. 거리에는 쓰레기 더미가 방치되어 있고, 소독약이 뿌려지는 희뿌연 세계를 검역복을 입은 방역원들만이 활보할 뿐. 이 디스토피아적 풍경 속에서 그는 점차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다. 고국에서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신이 용의자로 체포될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숙소에
[한국 소설 품는 밤] 신종 플루 시대의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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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을 비겁하게 공격하는 데 이력이 난 당신, 기만적인 방송용 언행의 전문가인 당신. 그런 당신이 입는 하얀 와이셔츠조차도 불명예스럽습니다. 강자들과 친하고 또 어린 시절부터 아주 부유했던 당신.” 굳이 이런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나는 허무주의자에다 반동적인 인물이며, 냉소적인 사람인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에 여성 혐오론자입니다.”
전자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좌파 지식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이고, 후자는 자기파괴적인 우파 소설가 미셸 우엘벡이다. 자칭(타칭) 공공의 적인 두 사람은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 편지 교환을 시작한다. 이쪽 진영과 저쪽 진영의 싸움닭이 편지를 주고받으니 재밌는 싸움 구경이 되겠구나 하는 기대는 이들의 지적이고 현란한 블랙유머를 엿보는 즐거움으로 바뀐다. 은근한 폭로전과 자기고백도.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구글에 자기 이름이 뜰 때마다 실시간 알람이 울리게 해두는 것으로 모자라 악플러 위치 추적을 한다거나, 미셸 우엘벡이 자신의 진
[도서] 마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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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수식할 말이 너무 많아서 난감하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처럼.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키다리 아저씨>식의 서간체 소설이고(편지들로만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 점령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던 영국의 한 작은 섬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브리짓 존스의 일기>처럼 여주인공이 여자에 대한 수완이 좋은 돈 많은 마초 남자와 수줍음이 많지만 진지하고 다정한 남자 사이에서 갈등을 하며 사랑을 찾아나가게 되며, 독자는 몇몇 대목에서 눈물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키득거리며 히죽거리게 되어 있다.
1946년 1월, 전쟁 기간 동안 해학 넘치는 에세이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영국의 여성작가 줄리엣이 주인공. 어느 날 그녀는 낯선 사람에게서 편지 한통을 받는다. 줄리엣이 처분한 책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사람에게서 온 편지에 답장을 하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
[도서] 웃고, 울고,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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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밋밋하다. 한때 소설가를 지망했으나 지금은 대필로 근근이 먹고사는 사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사는 이야기를 읊조릴 뿐이다. 사무실의 “고요, 텁텁한 공기, 말을 걸어오는 사물들”에 둘러싸인 채 원고를 다듬고 일감 청탁 전화를 기다리며 종종 낮술도 마신다나. 신기한 제안이 하나 들어오긴 한다. 우연히 만난 노인이 자신의 삶을 소설로 써보라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가 좀 변하나 싶은데, 아니다. 노인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소설쓰기 프로젝트는 싱겁게 끝난다. 그는 노인의 장례식장에 찾아갔다 별일없이 돌아와 다시 일상을 말한다. 조곤조곤, 서두르지 않고, 적당히 감상에 젖어들다가도 담백하게 빠져나오는 균형을 유지하며.
특별한 사건없이 하루하루 날적이 쓰듯 진행되는 소설은 언뜻 쓰기 쉬워 보이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다. 추진력을 얻기 어려운 탓. 그런데 작가는 은근한 끈기로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긴 시간 동안 주변을 관찰하며 내공을 축적해온 덕분. 주인공의 눈에 비친 동네는,
[한국소설 품는 밤] 대필가 구보씨의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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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만화의 전성기다. 매달 새로운 고양이 만화가 출간되고 있다. 고양이란 축생이 마침내 한국에서도 진정한 반려동물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증거다. 다만 애견만화와 마찬가지로 애묘만화를 고르는 데도 한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기준은 딱 하나다. 고양이를 의인화하지 않을 것. <시마시마 에브리데이>는 일본 만화가 토노가 키워온 여러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림체가 허허롭다고 피해가면 곤란하다. <시마시마 에브리데이>는 진짜 고양이를 아는 사람이 그리고 쓴 진짜 고양이 만화다. 의인화 따위는 없다. 한마디하자면, 출간된 한국 고양이 만화들의 문제점은 자기 고양이를 지나치게 캐릭터화 한다는 거다. 내 새끼 예뻐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예쁘다는 이야기와 말풍선으로 한권을 다 채우는 건 애묘만화가의 직무유기 아닌가. 토노의 고양이들은 다 귀엽지도 않다. 어떤 고양이는 성격이 지랄맞을 정도로 음울하고, 어떤 고양이는 종종 덜 소화되어 눅진하게 늘어진 참새의 시체를
[도서] 책은 고양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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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하느님. 너무 맛있어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토록 소박한 요리가 이토록… 이토록… 사치스러운 맛을 낼 수 있을까. 기다란 송아지 정강이뼈, 드레싱을 살짝 뿌린 샐러드… 맙소사… 몰캉몰캉한 연분홍색 골수를 뼛속 깊숙이 박박 긁어서 빵에 얹고, 최고급 천일염을 살짝 뿌려서… 한입 베어물면… 귓가에는 천사의 노랫소리, 천상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어느새 아버지 위로 육대조 할아버지까지 줄줄이 웃음 띤 얼굴로 천상에서 내려다보고 계신다. 이건 하느님이 주신 버터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요리사 앤서니 보뎅이 세계 음식 기행을 다닌다. 최고급 요리가 아닌 ‘완벽한 한끼’를 찾아, 온갖 술과 약과 병에 몸을 맡기고 돌아다닌다. 그리고 과장과 호들갑을 아끼지 않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 환호하고 떠벌린다. 도쿄에서 완벽한 스시를 맛보고 나서 하는 말을 들어보라. “도가와 선생님, 혹시라도 이 책을 읽으신다면 부디 기억해주세요. 만약 선생님께서 새벽 4시에 도
[도서] 맛있어서 미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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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에 매혹되다 지수 ★★★★☆
무섭다 지수 ★☆
“불가능을 제외하고 남는 것이 설령 믿을 수 없는 것이라도, 그게 진실이다.” 셜록 홈스의 이 유명한 경구는 일본의 ‘명탐정 코난’에서부터 <CSI>의 그리섬 반장까지가 읊곤 하는 미스터리의 법칙 중 하나로 취급받는다. 미스터리에서 불가능에 도전하는 기기묘묘한 트릭들은 그런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담이나 괴담은 어떨까? 논리적인 사고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무섭고 이상한 이야기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탐정소설 ‘도리모노’의 시작을 알린 <한시치 체포록>은 셜록 홈스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는 오카모토 기도가 1917년 발표한 일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사회를 만화경처럼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이 책을, 미야베 미유키는 시대소설을 쓰기 전에 항상 읽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담과 괴담을 다루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의 소
[도서] 에도시대 명탐정 사건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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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강남 올 로케이션을 카피로 내건 90년대 수목드라마 같다. 요가 강사이자 소설가인 서인. 그녀는 ‘유부남 앓이’ 중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친구와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한 사내가 홀연히 나타난다. 묘한 눈빛과 순교자처럼 압도적인 분위기를 지닌 남자 선우. 그는 끈질기게 구애하는 어린 여제자도 뿌리치고 서인을 택한다. 운명이니까. 그들은 남자가 잡아온 생선을 안주 삼아 술을 나눠 마시고 요가의 섹스 체위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격렬한 정사를 실행한다.
그런데 중반으로 접어들며 이야기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방향을 바꾼다. 서인은 선우라는 남자를 도통 모르겠다. 그는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다가도 어느 순간 감정없는 섹스머신으로 돌변한다. 또 선우 본인은 모른다고 발뺌하는 불쾌한 과거가 자꾸 등장하고, 달갑지 않은 실종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서인의 근심은 깊어만 간다. 과연 그는 그녀를 구원해줄 천사인가 아니면 그녀를 파멸로 몰아넣을 악마인가. 이렇게 그들
[한국 소설 품는 밤] 소녀는 죽음을 향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