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워야만 하는 남자의 슬픔
“우승은 내꺼란 말이다!!”미국 LA ‘세계태권도챔피언’ 결승전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 한국 최고의 파이터 승현(준 리-이동준)과 미국의 자존심 잭밀러(스티븐 시걸)의 불꽃 튀는 대결이 한창이다. 지존의 자리를 놓고 펼쳐지는 화려한 태권도 기술... 하지만 누가 봐도 승현의 경쾌한 몸놀림에 이은 빠른 공격이 한 수 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승현의 멋진 공격들이 잭밀러의 급소에 수차례 적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수는 오르지 않는다. 미국 측의 농간으로 처음부터 우승은 잭밀러의 몫이었던 것...
“대책없이 꼬이는 내인생...!”
태권도 챔피언을 강탈당한 그날,애인 민서(김혜리)와도 엇갈린 길을 걷게 된 승현. 그렇게 시간은 꼬인 채로 7년을 흘러간다. 꿋꿋한 승현은 그래도 열심히 삶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머리보다 주먹이 앞서 골치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형사라는 직업도 있고, 예쁜 딸 사랑(은서우)과의 단란한 생활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에게 있어 삶의 이유이자,목적이다.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황종철(기주봉) 패거리와 얽히면서 그의 인생은 코너로 몰리게 된다. 폭력사건으로 형사를 그만두고 생계와 딸을 위해 갖은 수를 써보지만, 세상은 그에게 번번히 실패와 좌절감만 안겨줄 뿐이다.결국 그의 강한 주먹을 눈여겨본 황종철의 싸움개가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승현은 거절할 수 없다.목숨보다 아끼는 사랑이를 위해서.
“없던 아이가 생기고, 죽었던 엄마가 살아납니다.”
하는 일마다 꼬이기만 하는 아빠에게 딸 노릇, 애인 노릇, 와이프 노릇, 엄마 노릇 하느라 바쁜 깜찍한 꼬마 사랑은 마트에서 우연히 민서를 만난다. 사랑은 상냥함과 터프함을 동시에 갖춘데다 얼굴까지 예쁜 아줌마가 너무 맘에 들고, 민서는 애어른마냥 똑부러지는 사랑의 말과 행동이 마냥 귀엽고 신기하다. 섹시하고 지적인 민서의 직업은 나름대로 능력 있는 터프 여검사. 엄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차고 씩씩한 사랑에게 민서는 묘한 연민을 느끼고, 점차 아이에게 깊은 애착을 갖게된다. 그러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사랑과 자신의 복잡한 연결고리를 깨닫게 되는데...
“내딸을 돌려줘...!!!”
승현 덕에 불법 이종격투기에 맛을 들인 황종철은 미국측의 프로모터 토마스(캐빈 그레비스)로부터 승현과 잭밀러의 승부를 제안 받는다. 이런 큰 건을 놓칠리 없는 황종철. 하지만 승현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싸움이 싫다. 설득이 안 통하자 황종철은 미국 측과 짜고 급기야 승현의 딸 사랑을 납치하기에 이른다. 어쩔 수 없이 딸을 구출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승현... 사랑이 납치된 소식은 민서에게도 전해지고 엽기폭력여검사 열 받았으니, 주모자는 쌍코피 감! 그녀 역시 당장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과거의 잘못된 승부를 청산하고 최고가 되고픈 야망에 사로잡힌 잭밀러와 오로지 딸을 위해 싸움에 나선 승현의 목숨을 건 한 판! 하지만 딸 사랑이가 잡혀있는 상황에서 승현이 어떤 승부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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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리뷰 (33명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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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y5112012-01-04 17:34:1010대작이다, 이거슨...more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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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왜 4점대인지... 세상은 클레멘타인 전후로 남는데... -
jak10202011-05-30 19:59:4410김두영은 한국의 스탠리 큐브릭이다. 필히 재조명되어야 할 작품...more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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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타르가 을 보고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화는 씨네필이라면 상식으로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와 을 뛰어넘는 희대의 걸작, 김두영의 . -
sunokim2010-12-11 20:35:4110아역배우의 울음 이 영화의 감동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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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saida2009-12-06 11:01:2210드디어 네이버 평점 9.00대 진입!more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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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 드디어 네이버 네티즌평점 9.00대로 진입했다. 당초 디씨의 소수 또라이, 아니, 선구자들로부터 시작된 이 거사는 다수의 네티즌들로부터 동참의 욕구를 불러일으켜 월드컵 길거리 관람이나 촛불시위를 능가하는 국민 대통합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 영화가 개봉한 당시(04년)엔 평점이 2점을 넘을까 말까했으나 그로부터 장장 5년여에 걸친 네티즌들의 끊임없는 '성지 순례'로 인해 오늘의 성과가 달성된 것이다.
현재도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성지엔, 거사에 참가한 네티즌들 스스로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가 뭉치면 못할 것이 없다'라며 감격에 겨워 서로 자축하는 분위기다. 그리고 이 거사에 반기를 든, 가끔 들어와 '이게 뭐하는 짓들이냐'라며 무자비하게 별 반개를 남겨 버리고마는, 120K로 달리는데 갑자기 나타난 과속방지턱처럼 얄미운, 시대에 역행하는 일부 몰지각한 네티즌들 때문에 평점이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다며 아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럼 여기서 그들의 주옥 같은 40자 평을 몇 개 살펴보자.
보라. 이 격정과 환희의 언어들을. 마치 절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시를 내뱉는 시인처럼, 이들은 그 어떤 구속됨이 없이, 오직 동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이성적 존재로 태어나 훌륭한 창작작품을 대한 것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경외와 존경의 열반상태에 빠졌으니, 영화 역사이래 이토록 다양한 접근의 표현으로 극찬을 받은 작품이 있었던가!
음냐...
이 영화는 또 다른 의미로 판도라의 상자라고 할 수 있는데, 유치한 상업 신파 감수성의 뚜껑이 열리면서 이렇게 다양한 확대재생산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신파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
신파가 하나의 장르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하여튼 장르라고 치부했을 때, 유사있는 장르이자 보편적인 장르이다. 인간의 DNA는 신파와 호환한다. 무릇 '인간'이라면, 신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신파는 유행가 가사 속에 널려있고, 우리네 삶 속에 배어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신파적으로 태어나 신파적 삶을 살다 신파적으로 죽는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며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다.)
신파는 무엇인가? 인간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당신의 바짓가랭이를 잡고 늘어지며 한 번만 봐 달라고 구걸하는 것, 앵벌이 하는 것,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신파는 무엇인가? 신파는 뻔한 것이고, 뻔한 건 지루한 것이다. 신파는 울리기 위해 먼저 운다. 신파는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관객의 정에 호소한다. 당신이 인간이라면(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광주사태를 안다면, 6.25를 안다면 등등) 이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울부짖는 것이 신파다.
신파는 나쁘다. 최소한 창작 작품에 있어서는 말이다. (예전에 누가 말하던데, 신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왜냐면 사전에 부정적인 의미로 기제되지 않아서라고 하더라. 참으로 개뼈다귀 같은 주장이다. 그럼 '포르노'도 찾아보라. 이 것 자체도 나쁜 의미는 아니다.)
신파의 단골 소재로 흔히 누군가 죽는데, 착하거나, 고생을 많이 했거나, 인간적인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악인이 죽는 것은 신파가 아니다.) 영화는 이 사람을 죽이기 전에 관객으로 하여 공감과 호응을 받게 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 드디어 좋은 사람이 죽는다.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 살아남은 사람은 운다. 관객도 운다. 그 순간 관객의 이성은 마취된다. 죽은 인물에 대한 동정심은 영화에 대한 동정심으로 발전되고 나아가 영화의 작품성까지 우수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것은 최면이다. 옳은 정신에서 내린 판단이 아니다. 전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높은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잇는 구름다리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했을 때, 100이면 100 여자가 받아들였다는, 그런 실험이 있었다고 한다. (남자들, 써 먹어보라.) 아찔한 구름다리 위에 놓인 여자는 공포와 긴장으로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분출되어 평소의 차분하고 진지한 이성적인 상태에서 벗어난다. 이런 상태에서의 이성은 평소보다 더 멋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동일한 남자가, 평지와 구름다리에서 똑 같은 제스처로 여자에게 말을 건넸을 때, 구름다리 쪽이 훨씬 우호적으로 나타났다.) 신파를 보고 울 때 관객의 정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요 앞에 말한 적이 있는데, 주로 같은 프로에 연예인, 의사, 기타 전문가 등의 사람들이 나와 과거의 고생담을 들려준다. 옛날에 얼마나 가난했는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큰 병에 걸려 죽는 줄 알았으나 기적적으로 치료한 이야기 등등을 늘어놓는다. 방청객은 눈물을 흘쩍이고 패널은 그 출연자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운다. 분명 그네들의 삶은 순탄치는 않았고 역경을 극복해낸 점은 인정할만 하다. 이것이 진정성이다. 문제는 이렇게해서 생겨난 인지상정이 그 출연자 자체에 대한 훌륭함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출연자가 박사라면 그 사람의 강연은 명강이 되고 그 사람의 저서는 우수한 책이 된다. 연예인이라면 훌륭한 연기자가 되고, 의사라면 명의가 되어버려 병원이 손님으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네들의 고생담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고난한 과정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실력이나 인간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흔히 '감동과 재미'를 주는 영화라고 한다. 여기서 '감동'은 '재미'와 동격의 지위를 갖는다. 우리는 패러디 영화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1시간 내내 팝콘을 먹으며 낄낄거리지만 그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아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게 되거나, 중간중간에 몇 번 정도 울고 나면, 감동을 먹어서 그런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고 그 영화를 간단히 명작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은 것도 아닌데 웃음보다 울음을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것으로 알고 있다.) '날 울리다니, 이건 명작임에 틀림없어'가 되는 것이다. 여기엔 일종의 자존심이 작용하는데, 울거나 웃거나 놀라거나 하는 것은 일종의 부끄러운 감정이다. 그러니까 영화에게 '진 것'이다. 여기 신파 영화가 한 편 있어 당신은 울었다. (당신은 그만큼 영화에 집중했고, 또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런 것이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진데) 당신은 운 것이 부끄럽다. 당신은 괜히 울지는 않는다. 분명 어떤 위대한 것이 당신을 울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울린 영화는 훌륭한 영화임이 분명하다, 가 되는 것이다.
인간시대나 아침마당에 출연하는 그네들의 삶이 무슨 우수하거나 위대한 것이 분명 아니듯이 감동이란 요소 또한 재미란 요소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고 느끼는 하나의 감정(쾌감)일 뿐이지 감동을 느꼈다고 그 영화의 작품성이 좋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이 역은 성립한다. 작품성이 좋은 영화는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거나 어떤 울림을 준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은, 신파적 요인으로 감동을 받아 그 영화의 광신도가 되는 행위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디 워, 화려한 휴가, 국가대표까지 모두 이에 해당된다.) 사실 신파와 그 아닌 영화를 판가름 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없지 않으나, 결국엔 그 사건(죽음 또는 헤어짐)을 다루는 방식에서 보여지기 마련이다. 신파는 뭔가 비장한 듯(주로 슬로 모션으로) 강조하고 반복하여 보여준다. 관객이 슬퍼할 것을 영화가 먼저 설명하고 슬퍼해버리니 관객의 자리를 차압해버리는 식이다. 신파에 대한 잠깐 이야기는 이만 마친다.
좋은 영화는 A를 말하기 위해 A를 말하지 않는다. B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A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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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bj2009-06-10 19:46:352아~ 낚였따.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