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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The Woman Everyone Wanted to Kill

1992 한국 청소년 관람불가

멜로·로맨스 상영시간 : 112분

개봉일 : 1992-05-09

감독 : 최야성

출연 : 이유진 한지일 more

명왕성그룹 회장의 맏며느리이자 명왕성 자동차회사의 사장인 고봉식의 아내 설희주가 가슴에 칼을 맞은 시체로 발견된다. 이 뉴스는 한 부르주아아 집안의 비리와 노사갈등 문제로 부각되어 수사의 조명을 받아 세상에 폭로되고, 설희주는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임이 판명된다. 그리고 설희주의 연인이었던 오민수가 용의선상에 오르지만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설희주는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가담했으나 깊은 회의에 빠졌을 때 재벌 2세 고봉식을 알게되어 끈질긴 그의 구애로 결혼한다. 그러나 그 결혼은 그녀에겐 새로운 투쟁을 위한 계획적인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뜨거운 정열이 몇번의 잠자리로 막을 내리자 설희주는 미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돌아보며 모든 계획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해 자기 구제의 유일한 탈출구요 해결책이라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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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리뷰 (18명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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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ngusal79
    2008-03-08 03:33:13
    6
    잔잔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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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nercap
    2005-02-12 16:33:38
    3
    동일인물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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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ungyk
    2004-11-18 18:22:19
    영화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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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와 진실
    -영화 를 보고...


    영화(cinema)와 진실(verite)에 관하여

    영화는 어떻게 진실을 담아낼 것인가? 영화의 탄생 이래로 이것은 모든 진지한 영화작가들의 화두였다. 그것은 영화 속에 진실이 담겨질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시작하며, 따라서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담을 것인가가 문제시된다.
    지가 베르토프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카메라와 대상세계의 거리가 아니라, 정지된 카메라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포착되는 진실'이었다(키노 프라우다kino pravda). 이것은 '60년대 미국 다큐멘터리 운동을 지배했던 드류 연합의 작업과도 맞닿아있다. 그에 비해 장 루쉬와 에드가 모랭은 끊임없이 개입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짐으로써 답하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내재하는 진실의 정수, 곧 영화의 진실(시네마 베리떼cinema verite)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변혁 감독(또는 극중 영화감독 은석)이 자신의 영화 에서 취한 방식은 후자 쪽이었다. 은석(이정재)은 계속해서 질문한다. 그는 대화의 양적 축적을 통해 인터뷰의 질적 전화를 가져오고자 한다. 또한 그는 뻔한 내러티브를 갖는 픽션(이는 1년전 파리 유학시절 그가 찍는 영화를 통해 잠시 드러난다)보다 다큐멘터리가 더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그가 민중(권민중)이라는 스타를 배제하고 미용보조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는 팍팍한 삶을 살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영희(심은하)에게 집중하는 것도, 그가 믿는 진실이란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희는 이러한 은석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녀는 미용보조도 아니었으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첫 인터뷰 직후에 구한 일자리이다. 또한 매일같이 편지를 써보내는 군대간 애인도 없다. 그녀는 좋은 집안에서 무용 교육을 받은(그것도 프랑스에서!), 애인을 잃은 무용수이다. 여기에서 은석(또는 변혁)은 딜레마에 빠진다. 영희가 셀프 카메라를 통해 드러낸 자신의 진실은, 또는 애인의 무덤 앞에서 넋두리처럼 읊어대는 이야기들(진부한 멜로드라마에나 나올법한)이 전해주는 그녀의 진실은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전자가 카메라와 대상세계 사이의 완전무결한 합일성(그는 카메라가 대상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권력의 장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한다)에 관한 신념이라면, 후자는 픽션의 허구성과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에 관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제 멜로드라마같은 영희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은석(또는 변혁)은 무엇을 진실이라 믿어야 하는가?

    1년전 파리, 그 인식론적 단절에 관하여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1년전 파리 장면을 기점으로 두 번 반복된다. '파리 이전' 장면들이 전체 영화의 뼈대를 형성한다면 '파리 이후' 장면들은 그 뼈대에 붙여지는 살이 된다. '파리 이전' 장면이 표층적 내러티브라면 '파리 이후' 장면은 심층적 내러티브이다. 즉, 둘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한다. 이 말은 사건을 재구성하는 단순 퍼즐 짜맞추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가로놓여있는 진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예를 들어 무용수의 아름다운 동작을 꿈꾸는 영희의 '파리 이전' 독백은 평범한 미용보조의 몽상이지만, '파리 이후'에서의 독백은 자신의 상처받은 과거가 된다. 그렇다면, 변혁 감독이 이 둘('파리 이전'과 '파리 이후') 사이에 1년전 파리 장면을 삽입한 의도는 명백해진다. 감독의 얼터에고로서의 은석(둘다 프랑스 유학파!)이 진부한 멜로드라마를 찍는 과정에서 만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무덤 앞에서, 그는 마치 '가르침'을 구하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것을 사진에 담는다. 그리고 현상된 사진에 "너는 진실을 찾고 있는가?"라고 써놓는다. 그러니까, 은석(또는 변혁)은 영희의 수수께끼같은 진실을 찾고자 다시 한번 파리 유학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때부터 은석이 마주하고자 한 영희의 진실은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한 영화의 진실(또는 그것의 허구성)과 겹쳐진다.

    또 다시, 영화와 진실에 관하여

    이것은 사랑을 맥거핀으로 한, 진실에 관한 영화이다. 여기에는 사랑에 관한 많은 인터뷰 장면들이 나온다. 또한, 그것은 최대한 꾸미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상태로 재현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양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연인 추상미가 고양이에 관한 노래를 불러준 선배를 추억하는 모습이나, '아는 오빠'에게 도둑키스(정확히 얘기하면 도둑뽀뽀)를 당하고서 얼굴이 빨개졌다는 자연인 김윤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감독은 이러한 '생필름'이 허구적 픽션과 만나 반응하는 화학작용(영화 속에서 허구와 사실의 경계는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량의 제한 때문인지 그가 시도했던 이러한 방식은 픽션이 주는 중압감에 눌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가 픽션/다큐멘터리에 내재한다고 믿는 거짓/진실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픽션(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영희의 3류 멜로드라마같은 현실에) 온갖 클리셰(cliche)-심지어 여주인공 이름이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바로 그 이름이다!-를 부여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영화와 진실에 관한 적지 않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필름'으로 찍혀진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정말이지 '날 것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카메라는 자기고백적인 매체임과 동시에 자기은폐적인 매체이다). '96년 미스 코리아 한국일보로 당선된 후 '98년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로 화려하게 은막데뷔한 자연인 권민중과 영희라는 허구의 인물을 친구로 둔 극 중 영화배우 민중이 겹치면서 갈라지는 지점은 어디인가? 또는 박용, 박청화 커플의 실제 결혼식 장면을 담은 비디오 카메라 화면은 현실인가,허구인가? (영화는 극으로 제시되는 허구이지만 또한 시공연속체속에 존재하는 카메라 앞에서의 현실이다.) 이 모든 질문들의 근원이 그가 이미 10년전 단편 에서 제시했던 것들이라는 점을 직시한다면, 우리는 한 곳에 머무르는 감독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까, 또 한 명(언제 또 있었나?)의 작가 탄생을 축하해야 할까? (난,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P.S.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2가지

    1. 은석은 자신이 파리에서 찍은 무용수 영희를 정말 알아보지 못했을까? 정사진도 아니고 비디오 카메라에 담았는데? 그렇다면, 그는 혹시 바보가....?

    2. 은석이 파리에서 찍는 영화 속 프랑스 여배우가 불어로 읊조리는 대사는, 애인의 무덤 앞에서 넋두리하는 영희의 한국어 대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은석이 영희를 만나는 것(서울에서의 영희 뿐 아니라 파리에서의 영희조차도)은 그 장면을 찍은 후이다. 우리는 이 디제시스상의 명백한 반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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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love
    2004-11-18 18:22:05
    잔잔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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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한 감동이 나에게 큰 파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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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mek
    2004-11-18 18:21:20
    변혁! 한국의 로버트 알트먼이 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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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는 시종일관 사랑의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는 사랑의 언어보다는 좀 더 철학적이고 심오한 것의 대한 물음이다. 한마디로 영화 [인터뷰]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타인과 타인의 대한 사랑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대한 사랑의 많은 촛점을 부여한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 어떤 이에게 사랑을 말할 수도 또 사랑을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들 뿐이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기 위해 감독은 끝 없이 인터뷰를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사랑은 구원하지를 못 한다. [인터뷰]는 한국영화 산업에서 쉽게 이뤄질 수 없는 프로젝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일단 씨네2000과 시네마서비스라는 가히 상업적 성취목적이 짙은 영화사에서 제작했다는 작품이 너무도 비상업적이기 때문이다.(이정재와 심은하라는 스타마케팅은 이런 우려를 염두 해 둔것인가?) 몇 씬을 위해서 파리로케까지 감행한 제작자의 열의는 무지인가..아니면 감독의 대한 믿음인가..플래쉬백에 남발, 같은 장면의 반복, 카메라의 촛점의 다각화. 분명 한국영화에서 그다지 흥행에 요소에는 저하되는 것들임에 분명하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변혁감독과 제작자의 고뇌는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 속 인터뷰의 마지막 편집을 앞둔 이정재(변혁 감독 자신)는 조연출 ASS로부터 얘기를 듣는다
    " 감독님 제작자가 제목을 그냥 인터뷰로 가는거냐
    고 다시 묻는데요?"
    인터뷰라는 극히 명사적이고 자극적이지 못한 제목에 제작자와 감독이 끝까지 고민하는 대목이다.
    이정재는 그 물음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인다.
    어쩌면 척박한 이 땅위에서 로버트 알트먼이나 우디알렌이 나올 수도 있다는 기분 좋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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