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화려한 휴양도시 베트남 다낭에서 20분이면 닿는 마을,매년 음력 2월이면 마을 곳곳에 향이 피워진다.
1968년, 한날 한시에 죽은 마을 주민들을 위해
살아남은 이들은 위령비를 세우고 50여 년간 제사를 지내왔다.
“내가 똑똑히 봤어. 한국군이었어”
그날의 사건으로 가족들을 모두 잃은 탄 아주머니,
그날의 현장을 똑똑히 목격한 껌 아저씨,
그날 이후 전쟁의 흔적으로 두 눈을 잃은 럽 아저씨는
지금껏 숨겨온 기억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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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S NOTEmore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을 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할아버지로부터 ‘월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가 만난 베트남과 할아버지의 ‘월남’은 같은 곳이었지만, 할아버지의 기억과 나의 것은 확연히 달랐다. 고엽제로 인한 암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월남전 참전 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생존자인 탄 아주머니가 한국에 방문했다. 그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어깨를 잡으며 파르르 떨 때, 나는 사람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국가 폭력에도 무너지지 않고 다른 이의 손을 꼭 맞잡고 살아가는 베트남 여성 탄, 학살 이후 지뢰로 눈이 먼 럽, 들리지 않지만 학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마주한 껌. 이들의 삶에서 공적 기억과는 또 다른 사적 기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그들의 기억의 전쟁이 있다.
FESTIVALS / AWARDS
2018 부산국제영화제 – 와이드앵글
2019 인디다큐페스티발 – 올해의초점
2019 인천여성영화제
2019 제1회 평창남북평화영화제
2019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한국장편경쟁
2019 제20회 제주여성영화제
2019 제8회 대구여성영화제
2019 제10회 광주여성영화제
2019 제20회 가치봄영화제
HOT ISSUE 01
참전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침묵으로부터
‘베트남 전쟁’의 숨겨진 기억을 꺼내다!
50년의 시간을 건너 전하는 그날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의 손녀인 이길보라 감독이 할아버지의 침묵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찾아간 베트남에서 듣게 된 50여 년 전 그날의 기억을 담아낸 작품. 화려한 휴양도시 베트남 다낭에서 20분이면 닿는 마을, 그곳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담아낸 <기억의 전쟁>은 그간 한국 사회에서 비밀처럼 감춰왔던 기억들을 스크린에 펼쳐낸다.
이길보라 감독은 맹호부대 장교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스스로를 ‘참전 용사’라고 칭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기억의 전쟁>을 기획했다.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과 표창장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베트남 전쟁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던 할아버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끝끝내 침묵했다. 할아버지의 말버릇에 따라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던 이길보라 감독은 베트남 여행지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이야기에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전쟁이 얼마나 더러운 전쟁이었고 그곳에서 무고하게 죽은 민간인의 생명이 얼마나 어머어마한 것이었는지, 현재 한국 사회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침묵하고 있는 것인지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알게 된 이야기는 나의 기억과도, 할아버지의 기억과도 너무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에 한동안 나의 모든 것을 휘청휘청하게 만들 정도로 온 마음을 짓눌렀다.”라고 고백한 이길보라 감독은 그 기억의 차이를 알기 위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카메라 안에 꾹꾹 담아낸다.
그날의 사건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탄 아주머니, 그날의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껌 아저씨, 전쟁의 흔적으로 두 눈을 잃은 럽 아저씨, 그리고 나는 살인마가 아니라며 시위하는 참전 군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서 있는 ‘우리 모두의 불행의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이 영화를 준비하던 초반에는 할아버지가 너무 미웠고, 가해자임에도 큰소리치는 참전 군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완성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보면 그들 역시 또 하나의 피해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가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푸른 청춘을 바쳤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라는 이길보라 감독의 이야기는 <기억의 전쟁>이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현재 세대들의 첫걸음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묵인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단호한 메시지를 전할 <기억의 전쟁>은 또 하나의 필람 무비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HOT ISSUE 02
농인 부모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낸 데뷔작
<반짝이는 박수소리> 이길보라 감독의 완벽한 변신!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서로 다른 기억을 담아내다!
농(청각 장애) 부모 밑에서 ‘입말 보다 손말’을 먼저 배우고 자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데뷔작 <반짝이는 박수 소리>로 반짝이는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이길보라 감독. 나이 어린 여성, 농인 부모, 아시아인 등 자신을 규정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소수자’라는 범주로 국한시키지 않고 ‘다양성’의 세계로 확장하며 폭넓은 시각을 선보였던 그가 ‘베트남 전쟁’이라는 묵직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정치적 문제를 다룬 대담함과 동시에 우아한 접근법을 보여줬다.”(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메세나상 심사위원 특별언급), “담담한 방식으로 무겁고 뜨거운 테마를 전한다. 툭툭 제시되는 증언들과 공간들이 부딪히며 팽팽한 서사를 만들어낸다.”(제1회 평창남북영화제)라는 호평을 받은 <기억의 전쟁>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기억을 이야기하는 희생자, 참혹한 기억을 묻어버리는 참전 군인, 외교 문제가 우선인 한국과 베트남 정부,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무관심했던 우리들의 시선까지,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하나하나 상기시키며 강렬한 여운을 전하는 <기억의 전쟁>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가장 거시적인 담론을 만들어나갈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회적 문제, 거시적이고 큰 거대 담론을 이야기해야지 왜 너의 개인적인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를 찍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모든 이야기는 개인의 시선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라는 포부를 표한 이길보라 감독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하여 50여 년의 긴 역사를 관통하는 영화를 완성해냈다.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뜨겁게 설득하려 하기보다 고요하게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한마을로 관객들을 이끄는 <기억의 전쟁>은 2020년 새해 극장가에 새로운 화두를 던질 단 하나의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HOT ISSUE 03
여성 감독 X 여성 프로듀서 X 여성 스태프
ALL 여성 제작진의 빛나는 감수성!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바라보는 섬세한 시각
“사실 지금까지의 공적 기억의 대부분은 남성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이야기들이 공적 기억의 기반을 이루어왔다면
이에 대항 축을 이루는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 역시 남성들인 경우가 많고
‘다른 기억’의 내부에 존재하는 ‘또 다른 기억’들이 왜곡되고 간과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 이야기가 전쟁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남성들의 영역이며
남성들의 발언 지구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존의 관념이었다.”
- 김현아 [전쟁과 여성] 여름언덕, 2004
<기억의 전쟁>은 여성 감독, 여성 프로듀서, 여성 스태프까지,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제작진의 남다른 시각을 마음껏 담아낸 작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바라보는 섬세한 시각은 물론, 지금까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전쟁의 흔적을 여성의 시선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길보라 감독은 <기억의 전쟁>이 전원 여성들로 구성된 제작진이었기에 완성할 수 있었던 영화라고 이야기한다. 여성, 청각 장애인, 시각 장애인 등 그간 역사에서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이길보라 감독은 “베트남에 갔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군대에 가본 적도 없는 어린 여성인 네가 전쟁에 대해서 뭘 알아’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죽는 건 여성과 장애인, 아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발화되지 못한 채 떠다니고 있는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것이 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라는 기획의도를 통해 왜 ‘전원 여성 제작진’이어야 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했다. 나아가 여성 제작진이었기에 가능했던 지점들도 있었다. 그날의 트라우마로 인해 여전히 한국 남성을 두려워하던 ‘탄 아주머니’는 한국에서 건너온 제작진들을 딸처럼 여기며 그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자신이 목격한 것을 그림으로, 손짓으로, 표정으로 전하던 ‘껌 아저씨’의 ‘손말’을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한 이길보라 감독은 껌 아저씨의 이야기를 마을 주민들에게 역으로 전해 남다른 신뢰 관계를 쌓기도 했다.
공식적인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고 주변화되어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던 기억들을 섬세한 시각으로 담아낸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 전쟁을 넘어,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전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PRODUCTIN NOTE
“기억의 전쟁들은 서로 교차하며
우리가 이것들을 어떻게 기억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섬광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나는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편집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의 첫 상영을 앞두고 있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침대에 누워 잠깐 쉬던 차였다. 핸드폰 화면에서는 사람이 탄 배가 가라앉고 있는 장면을 생중계했고, 나는 그걸 멍하니 바라봤다. 황망했다.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죄책감과 부채감에 휩싸였다. 지금 당장 뛰쳐나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당장 마무리해야 하는 영화 후반작업 일정이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떤 글도 쓰고 올리지 못한 채 영화 후반작업을 마쳤다. 곧 있을 영화 상영 홍보 글을 올려야 하는데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 어떤 이야기도 꺼내기 어려웠다. 영화 마무리한다고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한 그 어떤 활동도 하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앞섰다. 광화문 부근에 갈 일이 생기면 버스가 아닌 지하철을 탔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월호 부스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유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위한 농성과 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국가’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생겼지만 그곳에 갈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다.
2015년 4월, 영화 <기억의 전쟁>의 주인공이자 1968년 2월 12일에 있었던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Nguyễn Thị Thanh)이 한국에 방한했을 때였다. 그는 빈딘성 떠이선현 떠이빈사 빈안 마을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 떤 런 (Nguyễn Tấn Lân)과 함께 왔다. 일정 중 하루는 영화 제작진, 활동가들과 함께 서울을 구경하기로 되어 있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한국에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다들 민감한 한국 정세에 혹여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긴장을 많이 했다. 우리는 탄 아주머니와 런 아저씨의 손을 꼭 잡고 광장 시장을 둘러본 후 광화문으로 향했다. 시간대가 맞아 광화문 내부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이후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걷다 보니 세월호 천막이 보였다. 아차, 온몸이 굳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데……. 통역을 맡은 자원 활동가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나는 속으로 말을 골랐다. 탄 아주머니가 사람들이 오가는 천막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입을 열어야 했다.
“2014년 4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에 한국의 남쪽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배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때 304명이 죽었고 172명이 구조되었어요. 미디어는 그걸 생방송으로 보도했고, 국가는 제 할 일을 하지 못했어요. 탄 아주머니와 럽 아저씨도 아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그때 이 모든 일의 책임자였죠. 배가 왜 침몰했고 국가는 이들을 왜 구하지 못했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부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천막을 세우고 매일 같이 이곳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면서요.”
베트남어로 통역을 하는 자원 활동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피해자와 유가족뿐 아니라 국민들 또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탄 아주머니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옆에 있는 활동가의 팔을 꽉 잡은 채였다. 런 아저씨는 부스 앞에 걸린 단원고 학생들의 얼굴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저씨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둘씩 들여다봤다.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안다는 듯 말이다. 참사 이후 광화문에 오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나와는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잠시 후, 두 분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 주저하는 나를 대신해 부스에 있던 활동가가 진상 규명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서명을 하거나 성금을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런 아저씨와 탄 아주머니는 펜을 들어 서명을 했다. 이윽고 갖고 있던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내 이거면 충분하냐고 물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맛있는 것 사 먹고 선물 사시라고 한국의 초청 단체에서 드린 용돈이었다.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던 유가족 중 한 분이 말을 걸었다. 베트남 사람이라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니 베트남 관광객들이 종종 온다며 연습했던 베트남어로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이걸 통역해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분들 베트남에서 오셨고,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이자 생존자이셔요.”
난감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국가가 구하지 않아 아이들을 잃은 부모님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국이 일으키고 한국이 참전한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다. 이 둘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확신할 수 없었던 건 이 둘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지였다. ‘아픔’과 ‘슬픔’이라는 단어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조우, 아니, 그 자체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서로 만나 대화를 할 수 있겠어, 그 아픔과 상실이 너무 큰데.
런 아저씨와 탄 아주머니에게 “여기 지금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이 참사로 아이를 잃은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런 아저씨가 걸음을 옮겼다. 삭발을 한 채 아이의 얼굴 사진을 목에 걸고 있는 아버지를 안았다. 탄 아주머니도 말없이 그를 안았다. 아주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무슨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슬픔을 내가 안다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절대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둘이 만나던 때, 나는 이 영화를 무슨 일이 생겨도 꼭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1968년에 있었던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기 위해 저 멀리 베트남에서 이곳까지 온 두 사람이 보여주는 용기와 연대의 희망. 그것이 이 영화를 제작해야 하는 이유와 동력이 되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이 장면은 영화에 삽입되지 않았지만, 그때 그 순간은 내게 있어,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기억의 전쟁들은 서로 교차하며 우리가 이것들을 어떻게 기억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섬광처럼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