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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RBG

2018 미국 전체 관람가

다큐멘터리 상영시간 : 98분

개봉일 : 2019-03-28 누적관객 : 11,653명

감독 : 벳시 웨스트 줄리 코헨

출연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본인) more

  • 씨네216.00

살아있는 영웅, 평등을 위해 싸운 챔피언.
세상을 뒤집은 위대한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60살에 미연방 대법관이 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하버드 로스쿨에서부터 모두가 인정하는 뛰어난 재원이었지만 그녀의 삶은 차별에 맞선 일대기였다.

법을 통해 불평등한 세상을 반대로 바꾸며 시대의 아이콘이 된 그녀의 감동 스토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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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13)


전문가 별점 (2명참여)

  • 6
    박평식임은정 검사 그리고 사법개혁
  • 6
    김소미제때 찾아온 긴즈버그 보고서. 선명한 용기를 준다
제작 노트
HOT ISSUE 1

“조용하고 사려깊지만 강철 같은 여자, 세상을 더 공정하게 바꾸다” ? Shadows on the Wall
차별과 편견의 역사를 뒤집은 악명높은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세상이 열광하고 아카데미가 인정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성차별이 합법이던 시대, 소수의견으로 세상을 바꾼 미국의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가 2018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상영과 2019 아카데미 기획전 상영에 이어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모으며 개봉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이고 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는 현재 미국 청년들에게 ‘존경받는 어른’을 넘어서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며 ‘RBG 현상’을 일으킨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불꽃같은 인생을 담았다. 긴즈버그가 학교에 입학한 50년대 초, 하버드 로스쿨에 여자는 고작 2%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교직원들로부터 ‘남자들이 앉을 자리를 빼앗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콜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에도 ‘여자와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성차별로 법조계에서 일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긴즈버그는 소수자를 향한 ‘합법적인’ 차별에 대해 알게 되고 소송을 통해 법의 부당함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긴즈버그가 맡은 소송들은 연이어 사회의 이목을 끌며 세상의 편견을 바꿔나간다. 소신있고 강단있게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온 긴즈버그는 60살에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역사상 두번째 여성 대법관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그녀의 소수의견은 대법관으로서도 계속되었다. 영화는 이런 긴즈버그의 삶을 되짚어가며 이 사회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조명한다.

2018년 제 34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식 초청작으로 프리미어 상영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는 제72회 영국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및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과 주제가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작품성을 입증했다. 또한 94%에 달하는 로튼토마토 신선도는 영화가 위인을 담는 고루한 문법을 취한 대신, 재치있는 편집으로 ‘Notorious RBG’를 담아냈음을 보여준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 청년들의 롤모델을 넘어서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부당한 세상에 맞서는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이다.


HOT ISSUE 2

"우리가 지금 당장 필요로 하는 영화" - Empire Magazine
단단한 차별의 벽에 끊임없이 던진 옳은 목소리,
그렇게 세상을 바꾸며 희망이 되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85세의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노터리어스 RBG’(래퍼 Notorious BIG의 이름을 패러디한 명칭)라 부르며 열광한다. 긴즈버그의 얼굴과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에코백, 네일아트, 타투까지 등장하고, RBG의 갈비뼈가 부러졌을 땐, ‘내 갈비뼈를 가져가라’, ‘내 수명의 몇 년을 떼어주겠다’는 트윗들이 화제가 되었을 정도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의 감독 벳시 웨스트와 줄리 코헨은 이러한 ‘RBG 현상’에 주목하며 긴즈버그가 차별에 맞서 만들어낸 역사와 함께 그녀가 새로운 세대의 희망이 된 이유를 보여준다.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는 공정 사회가 화두로 제시되며, 시작점이 다른 경쟁사회에 대한 비판과 청년 세대의 무기력함이 헬조선 담론으로 이어지곤 했다. 같은 시기,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붐을 일으킨 것도 여성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는, 오히려 성별을 근거로 억압하는 사회의 부당함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한국에 비해 진보적인 사회인 듯 보이지만 긴즈버그가 대학에 재학하던 195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 사회의 성차별은 노골적이었다. 1956년, 법조인을 꿈꾸며 입학한 하버드 로스쿨에서 긴즈버그는 ‘남자들이 앉을 자리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고, ‘여성들은 열람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비원에 막혀 도서관 이용조차 하지 못했다. 하버드 로스쿨 재학시절 상위 5% 성적의 학생만 들어갈 수 있는 ‘로 리뷰’의 편집인에 선발되고, 컬럼비아대 로스쿨 수석 졸업을 하고 나서도 로펌 입사는 번번히 거절당했다. 여성이고, 엄마이며,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긴즈버그는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이 ‘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 긴즈버그는 성차별의 부당함을 헌법과 법적 사례, 그리고 인권을 통해 증명하며 사회를 바꾸어 나간다.

긴즈버그가 요구한 것은 단순하다. 남성만 입학할 수 있는 군사학교에 여성의 입학을 허가하는 것(연방정부 대 버지니아주 사건), 기혼 남성이 받는 주택 수당을 기혼 여성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사건), 동일 노동에 대해 동일 임금을 지급할 것(릴리 레드베터 대 굿이어 사건), 편모에게 지급되는 양육수당을 편부에게도 지급할 것(와인버거 대 와이젠펠드 사건) 등이다. 특히 와이젠펠드 사건은 성차별이 양성 모두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며, 차별에 대한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 시사점을 던진다.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긴즈버그는 ‘급진적이다’는 비난을 받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 상식 중 몇몇은 여전히 한국에서도 아직 ‘상식’이 되지 못했다.

정체된 듯한 사회가 조금씩 진보하는 것은 끈기있게 이의를 제기하는 누군가의 목소리 덕분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그럼에도 변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전하며, 개개인의 옳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All About RBG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관한 모든 것
마녀라 불렸던 그녀는 어떻게 세상의 아이콘이 되었나

조용하고 수줍은 사색가, 차별로 가득한 법의 모순을 마주하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반대파들로부터 ‘마녀’, ‘악랄한 운동가’, ‘대법원의 수치’로 불린 것과는 정반대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친구들은 그녀가 어려서부터 수다를 떨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한 사색가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어머니 셀리아 앰스터 베이더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루스는 뛰어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코넬대학교에 입학한다. 이 곳에서 평생의 동반자 마티 긴즈버그를 만나고, 메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인 사회 속에서 옳은 목소리로 바로잡을 수 있는 법조인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루스는 ‘남자들이 앉을 자리를 빼앗았다’며 차별을 당하고,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에도 로펌 입사를 거절당한다. 이후 그녀는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을 깨닫고 평생을 이에 맞서게 된다.

양성 모두가 피해자인 성차별적인 법에 “나는 반대한다”

루스는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후 학생들의 요구로 ‘여성과 법’ 강의를 개설하면서 ‘법이 허락하는 성차별’의 부당함을 알아갔다. 이에 그녀는 변호인으로서 성차별 소송들을 맡으며 성차별의 부당함을 입증하며 법을 바꿔 나갔다. 루스가 처음으로 대법원에 변론한 성차별 사건인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사건은 기혼 남성 공군에게는 지급된 주택 수당을 받지 못한 기혼 여성 공군 샤론 프론티에로의 소송이었다. 루스는 이 소송에서 뛰어난 변론으로 승소를 이끌어내며 소송 사냥꾼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또한 루스는 편모가 받는 양육수당을 지급받지 못한 편부이자 남성 주부였던 스티븐 와이젠펠드의 소송인 와인버거 대 와이젠펠드 사건을 맡으며, 성차별이 양성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음을 입증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서로를 존경한 남편 마티와의 인생 로맨스

루스가 이렇게 차별과 싸우며 역사를 바꿔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남편 마티 긴즈버그의 헌신적인 지지와 사랑이 있었다. 마티 긴즈버그는 루스에게 첫눈에 반한 후, 캠퍼스 커플에서 부부가 되며 사랑과 존경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조용한 루스가 연방 대법관 후보에 오르자 네트워크를 활용해 그녀가 대법관으로 지명되도록 도운 것도 마티였다. 마티와 루스의 자녀들은 “엄마는 생각 담당, 아빠는 요리 담당”이었다며 ‘대안적인 가정을 일군 선구자들’로 불렸던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렇게 가사 분담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마티가 뉴욕의 로펌에서 먼저 일을 시작했을 때 가사일은 대체로 루스의 몫이었다. 그러나 루스가 여성인권을 위한 소송을 맡기 시작하며, 마티는 루스의 일의 가치를 깨닫고 전폭적으로 그녀를 지원해주었다. 존경과 존중을 받았던 루스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여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었다. 루스는 ‘그 시대의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에게도 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마티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퍼스트 젠틀맨’을 자처했던 마티와 그의 지원 덕분에 더 높은 곳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루스의 로맨스는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RBG History

“루스 없이는 진실도 없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차별에 맞서며 이뤄낸 역사적인 순간들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사건(1973)

70년대 공군 소위였던 샤론 프론티에로가 기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혼 남성들은 받는 주택 수당을 받지 못하자 소송을 건 사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공동 변호인은 법원이 차별적인 연방 법을 뒤집도록 만들며 승리를 거두었다. 긴즈버그는 대법원에서 진행한 첫 구두변론에서 건국 이래 미국 여성들이 받아온 이등 시민 취급의 역사를 읊었다. 이어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세라 그림케의 말을 빌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 달라는 것뿐입니다”고 말했다. 긴즈버그의 변론으로 프론티에로는 소송에서 승소했다.

와인버거 대 와이젠펠드 사건(1975)

이 사건에서 긴즈버그는 남성 또한 성별에 근거한 차별로 고통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린 아들을 둔 ‘홀아버지’였던 스티븐 와이젠펠드는 아이를 직접 돌보기로 결정하고 사회보장국에 보육수당을 신청했으나 ‘아버지’는 보육수당을 받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긴즈버그는 소송을 성공으로 이끌며 성차별이 모든 국민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연방정부 대 버지니아 주 사건(1995)

버지니아 군사 대학은 개교 이래 150년간 남자 생도들만 받았다. 한 여학생이 남성 생도들만 뽑는 건 위법이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소송은 대법원까지 올라왔다. 대법관으로서 첫 여성인권 사건에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전례없는 합의문을 작성했다. 긴즈버그는 판결문에서 “여성의 뜻과 성취와 참여는 제한될 수 없고, 여성도 능력에 근거해 사회에 기여할 것이다”고 말했다. 법원은 버지니아 군사학교의 남성에게만 입학을 허가하는 정책을 폐지할 것을 선고하며 성별에 근거하여 차별한 정부의 정책은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셸비 카운티 대 홀더 사건(2013)

대법원이 참정권 차별을 감시하던 투표권법의 핵심 조항을 더 이상 흑인 투표권자들에 대한 차별이 남아있지 않다는 근거로 폐지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이에 대해 신랄한 반대의견을 썼다. “투표 과정의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 판결은 폭풍이 몰아치는데도 우리는 젖지 않을 것이라고 우산을 내던진 꼴이다”. 이 반대의견으로 젊은 세대는 긴즈버그 대법관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릴리 레드베터 대 굿이어 사건(2006)

굿이어의 직원 릴리 레드베터는 같은 일을 하는 세 명의 남성 근로자의 급여가 적힌 익명의 쪽지를 받고 자신의 임금이 그들보다 40% 더 적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레드베터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임금차별을 받아왔던 것을 깨닫고 회사를 고소했다. 대법원은 릴리 레드베터가 차별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소를 늦게 제기했기 때문에 보상금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판결했다. 긴즈버그는 반박 의견에서 “법원은 여성을 임금 차별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교활한 수법에 몰이해하거나 무관심하다”며, “공은 이제 의회로 넘어갔다. 대법원이 빠진 오류를 의회가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반대의견은 미국의 근로 여성에게 폭넓은 영향을 미치는 새 법의 제정을 이끌어냈다. 2009년 의회는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오랜 기간동안 임금 차별을 받은 여성이 사용자를 고소할 권리를 보장했다.

버웰 대 하비로비 사건(2014)

긴즈버그 대법관은 회사가 신앙을 이유로 피임을 직원 건강보험에서 제외하는 것을 허용한 다수의견에 반대했다. 긴즈버그는 반대 의견에서 이렇게 썼다. “여성의 동등한 참여를 경제적, 사회적으로 독려하기 위해 보장해야할 것은 출산에 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다”, “나는 법원이 지뢰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두렵다”



DIRECTOR’s Note

지금 우리에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

우리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처음 기획한 것은 3년 전인 2015년 1월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각자 과거에 프로젝트를 위해 긴즈버그 대법관을 인터뷰했고, 여성 인권을 개척해온 그녀의 업적을 존경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80대의 락스타 ‘노터리어스 RBG’가 되기 이전이다. 지금 밀레니얼 세대들은 트위터와 텀블러에서 RBG를 극찬하고, RBG 티셔츠와 가방이 등장했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RBG의 얼굴을 타투로 새기기까지 한다. 어느날 우리는 RBG 현상에 대해 얘기하다가 지금 당장 긴즈버그 대법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2016년 6월부터 우리는 긴즈버그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대법관 긴즈버그와 그녀가 가족과 휴가를 가서 보내는 시간, 개인 트레이너와 운동을 하는 것을 담았다. 또한 그녀가 대법관이 되기 이전인 1970년대에, 긴즈버그가 변호를 맡았던 고객들의 극적인 이야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시대에는 성별을 근거로 차별하는 것이 완전히 합법이었다. RBG의 뛰어난 변호 전략은 남성과 여성이 법 앞에서 동등한 위치가 되도록 큰 진전을 만든 다섯개의 획기적인 판결을 이끌어냈다.
RBG가 일하는 여성을 위한 세상을 바꾼 후 텔레비전 뉴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여성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나은 세상에 도달했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수의 남성 권력자들이 성차별주의자였음이 밝혀지면서 우리가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할지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성차별주의와 역경에 대한 긴즈버그 대법관의 방식을 마음에 새겼다.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에도 취직하지 못했을 때, 긴즈버그는 ‘분노는 시간낭비’라는 어머니의 조언을 명심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여성인권을 위해 뛰어난 법적인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싸움을 지난 50년 동안 지속하고 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성평등과 모든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민주적인 제도를 위한 헌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녀가 밀레니엄 시대의 아이콘인 것이 놀랍지 않다.
RBG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강렬한 경험이었다.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어들은 매우 명료하고, 신중하게 선택되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고 집중하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후, 우리가 사람들에게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반응은 “루스의 건강은 괜찮나요?”였다. 우리는 관객이 스스로를 위해 행동하는 악명높은 RBG를 보았으면 좋겠다. 신랄한 반대의견을 작성하며 밤을 새우며, 사랑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여전히 플랭크, 스쿼트,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을 말이다.

- 감독 벳시 웨스트와 줄리 코헨



Who is RBG?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Ruth Bader Ginsburg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1933년 3월 15일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1954년에 마틴 D 긴즈버그와 결혼하고 슬하에 딸 제인과 아들 제임스를 두고 있다. 코넬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로스쿨에 재학했으며, 콜럼비아 로스쿨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1959년에서 1961년까지 뉴욕 서부의 지방 법원 판사인 에드문드 루이스 팔미어리의 밑에서 법률 서기로 일했다. 1961년에서 1963년까지 그녀는 연구원이었고 그 다음엔 국제법에 관한 콜럼비아 로스쿨의 프로젝트의 부국장이었다. 1963년에서 1972년까지 럿거스 대학교 법학대학의 교수였고, 1971년에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여성권익증진단(WRP)를 공동 출범시켰다. 또한 1973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시민자유연맹에서 법무 자문위원을 지냈다. 1980년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되었으며, 1993년 8월 10일,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으로 연방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됐다. 긴즈버그는 2019년 현재까지도 대법관 자리를 지키며 계속해서 사회에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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