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의 전도유망한 신인 감독 록 비첵의 데뷔작 <클래스 에너미>는 그릇된 믿음과 편견의 사소한 간극을 비집고 발아하는 비극의 속살을 들추어낸다. 방과 후 사비나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에 홀린 독일어 교사 주판은 연주실로 발을 옮기고 이후 두 사람의 소문이 암세포처럼 학교에 퍼져간다. 그러나 주판의 따끔한 충고에 상처받은 사비나가 투신자살하면서 상황은 기묘하게 흘러간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사비나의 극단적 선택은 어디서 연원하는가.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가차 없이 무너뜨린다. “인간의 죽음은 그 자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문제”라는 토마스 만의 말을 인용하면서 주판은 신념을 지키려 한다. 어디서 문제가 시작되었고, 어떻게 잘못 가고 있는가? 결론은 대담하고 어둡다. 비첵은 슬로베니아 사회를 잠식한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폭력을 교실 안의 우화로 녹여내고 있다. (장병원)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