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 곳에 온 것이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수많은 독일의 산악인들에게 정복의 목표였던 산이 있었다. 바로 낭가 파르밧. 이 곳은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 인해 상부에 눈이 쌓이지 않아 원주민들은 ‘벌거벗은 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라인홀트와 건터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산악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산을 좋아하는 젊은이들. 이들은 미지의 산으로 불리는 낭가 파르밧 원정대에 합류하여 등반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악명 높은 낭가 파르밧은 이들의 도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라인홀트와 건터 형제를 비롯한 원정대는 점점 지쳐만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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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수많은 독일의 산악인들에게 정복의 목표였던 산이 있었다. 바로 낭가 파르밧. 이 곳은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 인해 상부에 눈이 쌓이지 않아 원주민들은 ‘벌거벗은 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라인홀트와 건터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산악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산을 좋아하는 젊은이들. 이들은 미지의 산으로 불리는 낭가 파르밧 원정대에 합류하여 등반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악명 높은 낭가 파르밧은 이들의 도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라인홀트와 건터 형제를 비롯한 원정대는 점점 지쳐만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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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었던 운명의 산!
독일은 왜 낭가파르밧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나
1860년대, 140개에 달하는 알프스의 고봉들이 수많은 등반가들의 목숨을 건 도전을 통해 전세계에 그 신비한 모습이 모두 공개된 이후 알프스는 더 이상 매력적인 등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895년, ‘앨버트 머메리’가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고봉인 낭가파르밧에 처음 도전한 후 인류는 히말라야에 위치한 눈 덮인 미지의 14개 봉우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치열한 도전의 무대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낭가파르밧이 있었다. 최초 도전자였던 영국의 ‘앨버트 머메리’가 낭가파르밧에서 사망한지 37년이 흐른 1932년, 독일인 ‘빌리 메르크’는 독일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배경을 등에 엎고 낭가파르밧 정상 정복을 목표로 산에 올랐으나 해발 6,960미터 지점에서 한 달간 이어진 상상도 못했던 눈보라에 결국 등반을 포기하고 만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 원정대의 낭가파르밧 도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9년까지 5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게다가 기상악화로 인한 눈사태로 16명의 대원이 목숨을 잃게 되는 참극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과 전쟁에 따른 피해복구 등으로 잊혀졌던 독일의 낭가파르밧 정복의 꿈은 1953년, 의사 ‘헤를리히코퍼’ 박사가 이끄는 6차 원정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모두 게르만혈통으로 구성된 원정대원들 중 오스트리아인 ‘헤르만 불’은 16시간 30분만에 정상에 오르며 독일 정부의 국가적 염원을 성취하기에 이른다. 이후 낭가파르밧은 전후 독일 재건의 상징적인 모델이 되었고, 독일 국민들의 단합된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 ‘헤를리히코퍼’ 박사와 그의 원정대에 의한 도전은 계속 이어졌지만 ‘헤르만 불’ 이후 단 한 차례도 정상 재등반에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던 중 독일인들 사이에 점점 잊혀져 가던 낭가파르밧은 1970년, ‘헤를리히코퍼’ 박사가 다시 원정대를 모집해 당시 무명에 가깝던 ‘라인홀트’와 ‘건터 메스너’ 형제를 원정대에 포함시키면서 독일의 낭가파르밧 도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은 ‘헤를리히코퍼’ 박사와 ‘라인홀트 메스너’의 만남과 대립 등의 관계를 통해 독일인들에게 낭가파르밧이라는 곳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관심을 더한다.
ABOUT THE MOVIE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교감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연의 일부다!”
진정한 알피니즘의 의미를 담고 있는 영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
이탈리아 출신의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터는 1970년 세계 최고의 난벽으로 일컬어지던 낭가파르밧의 중앙 직등루트인 루팔벽을 세계 최초로 등정하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이 루팔벽이 얼마나 위험한 코스인지는 그가 등정에 성공한지 35년만인 지난 2005년에서야 대한민국의 등반가 김창호씨가 이끄는 대한민국 낭가파르밧 루팔 원정대가 두 번째 등정에 성공한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 밖에도 히말라야 14좌 등반에 모두 성공한 세계 최초의 등반가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등반 철학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산소통에 의지하지 않은 채 800미터급 고봉을 최소한의 인원만이 무산소로 등반하는 방식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방식을 고수했던 이유는 바로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교감, 등반의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78년에는 의학계를 비롯한 모두가 회의적이었던 에베레스트산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고, 연이어 무산소로 낭가 파르밧 등정에 재성공하게 되자 무산소, 단독 등반으로 대표되는 라인홀트 메스너의 ‘알파인 등반 스타일’은 전세계 등반인들에게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그의 이러한 산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등반인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그의 알파인 스타일은 ‘알피니즘(Alpinism)’이란 단어로 통합되어 자리매김하기 시작하는데, 1786년, 등산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위스의 ‘H. R. 소쉬르’가 알프스의 몽블랑을 무산소로 등정한 것에서 유래한 ‘알피니즘’은 산에 하켄을 박지 않고 무산소로 최소한의 인원만이 등정하는 방식을 의미하며, 이는 넓은 의미로 산, 곧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전인격적인 자세와 사상을 담고 있는 스포츠로서의 ‘등산’이라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최근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웃도어 의류업체 휠라 아웃도어가 ‘이것이 알피니즘이다 (It’s Alpinism)’라는 슬로건의 광고를 런칭한 바 있는데, 이 광고를 살펴보면 과거 라인홀트 메스너가 등정에 성공했던 히말라야 봉우리들의 이름과 연도를 소개하면서 자신들이 후원했던 라인홀트 메스너의 순수한 등반정신을 기리는 형식으로 제작되어 아웃도어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기획의도를 엿볼 수 있다. 등반가들에게는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있는 라인홀트 메스너의 산과 대자연을 대하는 숭고한 철학, 그만의 위대한 알피니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은 그가 왜 산에 자신의 젊음과 모든 것을 걸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ABOUT THE MOVIE
영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의 모태가 된
‘라인홀트 메스너의’ 저서 ‘벌거벗은 산’
그가 밝히고 싶었던 1970년 6월, 그 날의 진실들...
히말라야 14좌 중 낭가파르밧은 인간의 등반역사에 있어 여러 가지 특별한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인류가 최초로 도전한 히말라야 14좌라는 점, 최초로 단독 등반이 시도되었다는 점, 히말라야 14좌 중 최초로 조난자가 발생했다는 점, 한 차례의 눈사태로 1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형참사가 있었다는 점 등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전설적인 산악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라인홀트 메스너’에게도 낭가파르밧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산으로 남아 있다. 이 산에서 그는 자신의 동생 ‘건터’를 잃었고, 아이거 북벽, 아콩카과 남벽, 로체 남벽 등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르기 어렵다고 알려진 루팔 벽을 세계 최초로 올랐으며, 그가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세계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는데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운명의 산이기도 하다. 그가 지금까지 집필한 50여권의 책 중 ‘벌거벗은 산 (The Naked Mountain)’이란 책은 바로 그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과 자신의 인연에 대해 서술한 책으로 영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1970년, 동생 ‘건터’와 함께 낭가파르밧 루팔 직등루트를 통해 정상에 오른 후 하산 도중 기상악화로 인한 눈사태로 동생을 잃은 ‘라인홀트 메스너’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명예와 동생의 죽음을 맞바꿨다는 비난을 들을 수 밖에 없었고, 동상으로 발가락 7개를 잃은 ‘라인홀트 메스너’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동생을 낭가파르밧에 혼자 두고 왔다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은 그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욱 강한 철인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그는 이후 히말라야 14좌 모두를 완등한 세계 최초의 기록을 세웠고, 동생을 잃은 지 8년이 지난 1978년에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에 아무런 외부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두 번째 정상에 오르게 된다. 정상에서 그가 카메라 타이머를 이용해 찍은 사진의 오른편에 넓게 비워둔 자리는 바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동생 ‘건터’의 자리였다는 애틋한 사연이 전해지면서 이 사진은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ABOUT THE MOVIE
대한민국과도 이어진 운명의 끈...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최초의 여성 산악인이고 싶었던 고미영의 꿈이 묻힌 그 곳!
8,000미터급 고봉들을 일컫는 히말라야 14좌 중 하나인 낭가파르밧. 이 곳은 높이로만 보면 히말라야 14좌 중 9번째에 불과하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세와 난기류 등은 인간의 정상 정복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가장 오르기 어려운 산으로, 1953년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헤르만 불 (Hermann Buhl)’이 초등에 성공하기 전까지 31명의 목숨을 앗아간 ‘죽음의 산’이라 불리고 있기도 하다. 영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의 소재가 된 1970년, 라인홀트와 건터 메스너 형제의 루팔벽 중앙직등루트 등정 성공 후 35년이 지나서야 대한민국의 산악인 ‘김창호’ 대장이 ‘메스너’ 형제가 오른 루팔벽을 통해 두 번째로 정상 등정에 성공했을 정도로 산악인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김창호’의 낭가파르밧 루팔벽 중앙직등루트 세계 제2등이라는 역사적인 위업 이외에도 낭가파르밧은 우리와 또 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바로 대한민국의 여성 산악인 고미영을 묻은 산이기도 하기 때문. 지난 2006년 10월, 히말라야 14좌 중 제6위봉으로 알려진 ‘초오유 (8,201m)’ 등정에 성공한 이래 ‘에베레스트 (8,848m)’, ‘K2 (8,611m)’, ‘칸첸중가 (8,603m)’, ‘로체 (8,516m)를 비롯 2009년 7월, ‘낭가파르밧 (8,125m)’까지 세계 최단기간 히말라야 14좌 11개봉 연속 등정에 성공하는 대기록을 세운 故 ‘고미영’ 대장. 그녀는 늦깎이 산악인이었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모든 것을 최단시간에 이루어낸 놀라운 인간승리의 과정을 몸소 보여주며 세계 탑클래스급 산악인으로 자리매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2009년 7월 10일, 운명의 산이 되어 버린 낭가파르밧 정상 등정에 성공한 그녀는 하산 도중 해발 6,200미터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난기류를 만나 실족하면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되는데, 여성 산악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라는 대기록을 눈 앞에 두고 벌어진 사고였고, 그녀에게 남은 목표는 가셔브롬 1, 2와 안나프루나 뿐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녀의 등정 파트너였던 ‘김재수’ 대장은 그녀를 떠나 보낸 뒤 그녀의 남은 목표였던 가셔브롬 1, 2와 안나프루나 등정을 마치고 국내에서는 5번째, 세계적으로는 23번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인물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파트너 ‘고미영’ 대장은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