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올림픽 담은 서사시
- 제작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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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이 파시스트의 어용작가라는 치욕스러운 오명을 얻게 된 것은more
1934년의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를 만들면서부터였다. 히틀러를 천상에서 내려온 구세주로 표현하면서도 지루한 정치적 이벤트를 웅대한 드라마로 탈바꿈시킴으로써, 그는 베니스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거머쥠과 동시에 대표적인 관변작가의 대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올림피아>는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나치당의 공식 선전영화라고 하기에는 힘든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인간 육체의 미적 가치에 매혹당한 리펜슈탈은 국제올림픽위원회와 직접 교섭하여 촬영 허가를 받아내는데 몇 개월을 소진해야 했고, 자신과 애증 관계에 있던 선전상 괴벨스의 방해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파시즘의 도도한 흐름을 전파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나치당에게 그리 매력적인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느린' 매체였으며, 선전의 효율성에서 보더라도 영화보다는 라디오가 확실한 투자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오락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우민화의 도구로 정의 죄었다. 기념비적인 행사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하던 히틀러의 독단이 없었다면, 리펜슈탈은 엄청난 제작비를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개회식 장면을 성대하게 묘사하기 위해 비행선에까지 카메라를 장치하고,
다이빙 장면을 연속적으로 찍기 위해 촬영기사들은 몇 개월 동안 수중 촬영
훈련에 매달려야 했다. 그런 치밀한 사전준비 결과 2주간의 운동경기는 225분의 서사시로 새롭게 탄생했다. 바그너풍의 음악을 배경으로 안개에 싸인 고대
그리스애서 채화된 성화가 독일로 전해지고, 히틀러는 천상의 신전에서 이를
내려다본다. 프로파간다가 기조에 깔려 있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내레이션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인간의 육체와 음악을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리펜슈탈은 전혀 새로운 예술적 성과를 창조한다.
그러나 가장 역동적인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흐르는 육상경기를 미국의 흑인
선수들이 휩쓸어버리는 바람에 영화는 당초 계획했던 선전의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어졌고, 이러한 장면을 삭제하라는 나치 관료들의 요구를 리펜슈탈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정치적 구호의 거세도 프로파간다라는 멍에를 완전히 벗겨주지는
못했다. 인간의 육체를 시종일관 찬양하고, 준군사적이며 독특한 양식으로 패턴화된 시각적 모티브들이 반복해서 등장함으로써 파시스트의 미학과 시각적 상상력의 정수가 드러난다. 그 점에서, 히틀러에게는 매력을 느꼈지만 나치의 이데올로기에는 반대했다는 리텐슈탈의 항변은 별다른 힘을 지니지 못한다. 그는 파시즘의 매혹적인 시대정신을 무의식적으로 담아낸 셈이다.
<올림피아>가 이후 대중 세뇌의 주요 수단으로 등장한 텔레비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장르의 원초적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평가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이다.
객관성을 가장한 물신주의는 언제라도 파시즘과 만나게 마련이다. <올림피아>가 남긴 교훈은 하나의 이벤트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대 현실의 왜곡과 등치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국가의 정책적 개입 때문이든, 아니면 개인의 작가적 소신 때문이든
어떤 '기록'도 역사적 책임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김명준 영화평론가, <세계영화 100>(한겨레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