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농장을 만들려는 농민들의 시도가 지주에 의해 좌절되면서 두 계급간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는다. 농민지도자 바실리는 낡은 소유의 상징으로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울타리를 트랙터로 무너뜨리고 달빛 아래 춤을 추다가 지주에 의해 살해당한다. 바실리의 장례식이 행해지고 난 뒤 그의 어머니는 또 하나의 생명을 낳고 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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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도브젠코(1894~1956)의 <대지>는 소련 영화의 발달사에서 다민족국가 영화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 영화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발달했으나 그 동력은 곧이어 각 민족국가로 확산되었다.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대지>의 영화사적 가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의 선전·선동과는 궤를 달리하여 인간과 대지의 하나됨이라는 영원성의 테마를 추구한 것이었으며, 형식상으로는 당대 소련 영화의 거대한 흐름이었던 몽타주 영화와 달리 시적 영상으로 형상화된 작품이었다.more
도브젠코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코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교사, 공산당 지하요원, 외교관 등을 거치며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되는데, 사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예술이었다. 베를린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귀국과 함께 풍자화가로 나섰다가 1926년에 영화에 몸을 던졌다. 처음 도브젠코는 엑센트릭한 코미디 장르를 다루었으나 그다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것은 네번째 영화인 <즈베니고라>(1928)였다. 여기서부터 그의 영화는 고향 우크라이나의 자연과 삶, 빈곤과 혁명을 담기 시작했다. 앞의 영화와 <무기고>(1929), <대지>, 발성영화 <이반>(1932)은 이 계열의 4부작이라 해도 좋은 영화이다.
<대지>는 우크라이나의 한 농촌 마을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새 것과 낡은 것, 콜호스 농민과 지주, 사람에 대한 신뢰와 신에 대한 신앙 사이에서 생기는 비극적 충돌을 통해 응시하고 있다.
도브젠코는 “나는 농촌에서 새 생활의 새벽을 예고하는 작품으로서 <대지>를 기획했다”고 말했으나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완성된 영화는 농촌사회의 계급투쟁을 담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영원한 세계인 노동과 대지의 친화, 자연의 순환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 생명의 순환, 그리고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토속적 서정으로 가득 찬 영상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지>는 인간의 노동으로 기름지게 변한 자연에 대한 찬가로 시작한다. 휘늘어지게 열매를 맺은 사과나무 아래서 한 노인이 사과를 씹으며 죽어간다. 그의 곁에는 노인의 생명을 이어가기라도 하듯 한 어린애가 역시 사과를 먹고 있다. 느리게, 시적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농업의 집단화를 둘러싼 지주와 빈농의 갈등으로 긴장을 더해가다 바실리가 이 마을에 트랙터를 들여와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낡은 소유의 상징인 밭두렁을 허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 장면은 지주에게 살해된 콜호스의 농민 지도자 바실리의 장례식이다. 친구가 든, 그의 미소짓는 초상이 사과나무 가지를 스친다. 이어 바실리의 어머니가 또 하나의 생명을 낳고 비가 대지를 적시는 시적인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도브젠코는 이 영화에서 서술을 위해서든 충돌을 위해서든 당대 소련 영화의 화려한 몽타주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미지와 이미지, 장면과 장면의 연결과 병치와 상승작용을 더 중시했다.
그의 숏들은 대체로 느릿하고 길며, 종종 극도의 광각으로 촬영되었다. 그것은 대지의 광대함과 자연의 영원성을 드러내는 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단세포적인 혁명론자들에게 공격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영화사가 <대지>를 도브젠코의 오랜 화가의 꿈이 스크린에서 성취된 걸작으로 기록하게 한 요소였다.
-이정하 영화평론가,<세계 영화 100>(한겨레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