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자들의 소리없는 외침
덕규스토리 : 사춘기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덕규는 현재 원단회사에서 배달 일을 하며 산다. 그에겐 이곳의 삶이 그리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더 이상 가장 역할을 못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신은 꿈도 희망도 없다고 좌절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느 날 그와 함께 일하는 상현에게 위험하지만 유혹적인 제의를 받는다. 현실에 삶의 만족 못하는 그는 상현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범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보름스토리 : 어릴 적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보름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기계처럼 일을 한다. 보수적인 아버지의 성향으로 학교는 일찌감치 그만 두고 일에만 매달린다. 공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갇혀 살듯이 사는 보름. 어느 날 배달 온 덕규를 만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지만 어릴 적 당 한 아픈 기억이 떠올라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형식스토리 :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직후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야채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현지인 친구들과의 갈등으로 학교에 적응 못하고 거리로 나온 형식, 또래 비슷한 여건의 친구들을 모아 어설픈 조직을 만든다. 하루하루를 양아치처럼 사는 그들의 눈에 가시가 된 돈 많은 교포오렌지. 친구들과 함께 그를 혼내주려고 하지만 실수로 엄청난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띠나스토리 :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이민 2세 띠나는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한다. 하지만 한 번도 한 곡을 끝까지 치지 못하고 중간에 실수를 하는 띠나.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 있다고 믿는다. 아르헨티나인도 한국인도 아닌 애매모호한 자신의 처지가 음악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던 중 그에게 도움을 주려는 현지인친구 마르띤에게 함께 연주를 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동영상 (2)
- 제작 노트
-
제7회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독립영화제 경쟁부문.more
제30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디스커버리” 공식초청.
제10회 부산 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공식초청.
제27회 하바나 국제영화제 FEISAL특별언급상 수상.
2005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공모전 수상.
2006년 마이애미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2006년 일본 스킵시티 D-CINEMA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제15회 뉴욕 디아스포라 국제영화제 공식초청.
영화를 시작하기 까지...
12살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던 나.
적응하기 힘들었던 어린 이방인의 청소년기를 달래주었던 것은 형과 함께 자주 찾았던 동네 영화관. 스페인어 자막을 100% 이해는 못했지만 그때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이 나에겐 막연한 꿈이 되었던 것 같다.
15살이 되던 해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17살이 되던 해 경제적인 압박으로 형과 누나는 아버님의 친지가 있는 일본으로,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지만 난 아르헨티나에 홀로 남겠다는 고집을 피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변화를 겪고, 큰일을 당해서인지 그냥 혼자 있는 것이 편 할 거라는 당돌하고도 이기적인 결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부터 홀로 아르헨티나에서 살게 된 나는 모든 걸 혼자서 판단해야 했으므로, 또래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고, 외로움에 일찍 익숙해져서 인지 혼자 상상하기를 좋아하고, 나의 생각들을 글로 표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아르헨티나 TV광고영상에 반해 막연한 동경을 안고 대학을 광고학과로 선택했지만, 영상을 제작하려면 다른 과로 갔었어야 하는 걸 뒤늦게 알게 되고, 졸업 후 직접 카메라로 촬영도 하고, 영상을 편집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방송전문대에 입학 후 운 좋게 학생 신분으로 현지 방송국에 입사한다.
방송이라는 매체가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인 것에 회의를 느낀 나는, 언젠가는 나만의 생각, 나만의 표현을 영상으로 옮기겠다는 다짐을 하고 영화를 내 삶의 목표로 정한다.
하지만, 20대를 남들처럼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즐기며 나의 꿈을 게을리 한 채 무의미하게 떠나 보내고, 30살이 되던 해 1월 1일, 꿈을 이루기 위해선 나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과 지금 못하면 죽을 때까지 미련을 가지고 살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여 지금부터 나의 모든 것을 영화라는 것에 걸어보겠다는 다짐을 한다.
꽤 좋은 조건과 위치를 갖고 있던 직장을 나와 결혼은 아예 포기하기로 하고, 사랑조차 사치라는 생각에 여자 친구도 안 사귈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건 후, 영화 제작비를 짧은 시간에 충분히 마련하기 위해 웨딩 및 이벤트 프로덕션을 차려 운영하던 중, 아르헨티나가 디폴트 상황을 맞게 되어 최악의 경제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고, 시민들의 대규모 냄비시위로 당시 대통령이 정권에서 쫓겨나고 나라 전체에 폭동이 일어나는 등 대혼란이 벌어진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라의 위기가 나에겐 기회가 되어 당시 아르헨티나를 취재하기 위해 물 밀려오듯 몰려드는 많은 한국 방송 팀 및 기자들의 현지 코디네이터 일을 하게 되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2002년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들, 아르헨티나 아이템으로 기획되는 여러 방송 프로그램 일을 도맡아 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웨딩사업을 병행하여 생각보다 빨리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게 된다.
2003년, 충분치는 않치만 그 동안 모은 자금 한도에서 어떻게든 시작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가지고 있던 차와 돈 이 될 만한 모든 것을 팔고,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 보증금을 뺀 후 카메라 한 대와 옷만 들고, 혼자 살고 있던 후배 녀석 집에 얹혀살면서 먼 꿈으로만 여겼던 영화를 부푼 마음으로 시작하게 된다.
2년이라는 제작과정이 험난할 거라는 걸 감지 못한 채...
시나리오
영화를 꿈꾸는 나로서 첫 영화의 주제를 선택해야 하는 과정은 끝나지 않는 미로처럼 느껴져서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칠 정도로 고민스러웠다.
더군다나 여러 가지 여건상 외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쩔 수 없이 “이민”이라는 뻔한 소재와 그들이 겪는 갈등과 고뇌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식상 하다고 느껴져서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나리오의 방향을 못 잡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이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갇혀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나와 같은 1.5세대들이 모두 다 꿈을 가지고는 있지만 두렵기 때문에 넘지 못하는 벽 같은 존재라는 결론.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식상한 게 뭐가 중요 한가? 넘지 못할 벽이면 해머로 깨서 뚫고 나가자고...
한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내가 커다란 해머를 들고 벽을 뚫고 있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고, 그런 상상이 도움이 되어 어떠한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어져 2주 만에 시나리오를 끝내고 말았다.
프리프로덕션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은 너무도 열악했다. 우선은 제작부터 캐스팅, 기술적인 파트까지 모든 걸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나부터 시작해서 배우, 스텝 모두가 영화는 처음으로 해보는 초자들이었고 그런 우리들이(나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건 아니 억지로라도 용기를 만든 것은 “상황은 초보이나 마인드만은 프로라는 생각으로 함께 가자!”라는 무슨 캠페인 슬로건 같은 말을 만들어 제작 전 그들에게 강조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충분치 않은 제작 예산을 고려해 필름영화의 욕심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디지털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 후 Pre Production 단계에 들어갔다. 스텝구성은 방송국에서 일하며 친하게 지내던 현지인 친구 3명에게 무보수로 일해 달라는 애정 어린 협박이 통했고 믿고 의지하던 후배 녀석 한 명을 추가 스텝 5명이라는 조그마한 영화 제작팀이 완성됐다.
나를 비롯한 제작진은 안정적이고 평범한 일상에서 과감하게 인생의 유턴을 선언했다.
그 의미로 영화제목 중 “YOU” 를 “U” 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캐스팅 과정은 주위에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을 위주로 부탁을 해서 수월하게 진행 되었지만 모두들 연기는 처음으로 하는 아마추어 배우들이어서 내가 원하고자 하던 캐릭터를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연기 리허설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내가 원하는 감정들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판단 시나리오를 다시 수정하고 중요 인물들을 2명에서 4명으로 늘려 모자란 부분을 서로 채워주자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 의미로 영화제목 중 "FOR"를 4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보니 주인공을 둘러싼 배우들이 더 많이 늘어갔고, 감독을 포함한 모든 스텝들도 연기에 가담 심지어는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 수위아저씨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인맥이 이 영화에 출연한 것 같다.
디지털의 장점은 필름 값 걱정 안하고 무한대로 찍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하고 컷 수가 다른 영화보다는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장르 또한 애매모호한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드라마도 코미디도 액션도 다큐멘타리도 뮤지컬도 아닌 조금은 생뚱 맞은 그러나 어떠한 경계선에 있는 듯한 나름대로의 짬뽕장르. 그리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일수도 있으니 하고 싶은 거 다해 보자 라는 단순 무식한 생각으로...
프로덕션
촬영기간은 4개월을 목표로 두었지만 결국엔 무려 1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주위에 친구 녀석들은 “반지의 제왕” 찍냐고 우스게 소리를 해댔지만 촬영 초기에 난 심각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문제는 배우들의 스케줄이었다. 연기에 목숨 건 배우는 단 한 명이고 모두 공부나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주로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을 이용해 촬영하였고, 누가 되면 누가 안 되는 날들을 여러 번 반복하니 스텝들은 촬영하고 싶은 열정에 사로 잡혀있는데 배우들이 안 따라와 나부터 힘이 빠지는 상황에 부딪혔다. 처음 몇 달은 그렇게 애를 태웠지만 첫 작품인 만큼 시간에 구애 받지 말고 원하던 작품을 만들자는 결정을 내리곤 천천히 남미 인들 특유의 느긋함(?)을 발휘 촬영을 꾸준히 해 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안타까운 점이기도 한데 연기자들이 지속적으로 연기를 안 하고 드문드문하니 연기의 리듬이 깨지고 그것이 영화상에선 티가 나는 것이다. 독립영화의 애환은 이런 것이 구나 새삼 느끼는 계기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시간들이 개인적으로는 참 소중한 시간인 것 같다. 아무 일도 안하고 남는 시간에 많은 영화를 찾아보고, 내 영화만을 생각했던 백수 같은 나날들. 인생에 한번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완전 타락 했을 지언정… .
포스트 프로덕션
편집기간은 2개월. 매일매일 친구들이 운영하는 후반작업 프로덕션에서 그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나는 출근해 밤 시간대를 이용하며 편집을 했고 주말에는 거의 편집실에 갇혀 살며 폐인생활을 했다. 워낙 많은 분량을 촬영해놓고 장면들을 고르는 것은 정말로 곤욕이었다. 초반 촬영 분은 나조차 잘 된 것인지 판단력이 없었을 때여서 같은 씬을 10번 이상 촬영해놓고 정작 편집 때는 첫 테이크를 쓰는 배우들에겐 아주 미안한 결과를 내기도 했다.
일차 편집본은 러닝타임이 무려 2시간 30분이었다. 스텝들과 몇몇 배우들과 시사를 한 결과 스토리 전개상 필요악이라는 장면들이 많다는 지적에 장면들을 잘라내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독립영화지만 사람들이 보고 지루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에 대해 나 역시 동의했기에 결국엔 러닝타임 93분인 완성 본을 만들어냈다.
영화 제작과정을 되돌아보면 영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꿈”이라는 잡히지 않던 열정을 서로 믿고 작업한 것과 지금 못 하면 죽을 때까지 미련을 가지고 살 것 같다는 나의 생각이 이젠 결과로 나왔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난 앞으로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이젠 영화라는 것이 막연한 꿈이 아니라 나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민에 관한 영화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이 영화는 이민에 관한 영화이다. 그러나 또한 이민에서 벗어나고픈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제작 후 뒷이야기
영화편집을 거의 마쳐가고 있을 시점에 이 영화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영화를 촬영하면서도 남는 시간에는 독립 영화제들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기도 하였고…
결론은 이 영화가 비록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한국사람들이 출연하고 영화의 언어도 80% 한국어 이었기에 한국 영화제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한 듯 했다. 더군다나 가족과 거의 15년이라는 세월을 이산가족처럼 살아왔기에 이 영화가 한국에서 주목을 받고 한국서 영화 일을 하면 정말 좋겠다 라는 바람이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주국제영화제에 연락을 취했다.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살고 있는 교포이고 독립영화를 한편 만들고 있으니 출품해 보겠다는 연락을 드렸고, 영화 제출 마감일을 지나 보낼 수 있는 입장이니 좀 봐달라는 내용과 함께… 왜 전주국제영화제여야 했냐 라고 묻는 다면, 전주국제영화제에 디지털영화 경쟁부문이 있었고,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전주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이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는 독립영화를 환영한다는 그런 문구여서 꼭 내 영화가 가야 할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영화제의 배려로 마감일이 몇 일 지난 날짜에 영화는 출품되었고, 결과발표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영화제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 내용은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라는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난 2년이란 세월의 노력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과 함께 영화에 출연하고 나를 도와주었던 이들에게 드는 미안함. 안 그래도 주위 사람들은 나에 대해 “미친놈 아니야? 일 잘하다가 전 재산을 영화 한다고 다 쏟아 부었다는 둥, 지가 영화 해서 성공하면 나도 하겠다” 등등 안 좋은 소리까지 듣고 있는 와중에 밀려오는 쪽팔림은 나를 주눅들게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전주영화제의 결과가 있은 다음 날 바로 멕시코 국경에 있는 한국 중소기업인 리모콘 제조공장에 이력서를 보냈다. 아무래도 아르헨티나에서 쪽 팔리게 사느니 아무것도 없는 사막 같은 곳에 달랑 공장 하나 있는 그런 곳에 짱 박혀 일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의 응답은 전주영화제와는 달리 완전 호의적이었다. 내가 갈 길은 그쪽이구나 라는 운명을 감지한 후 2주 후 멕시코로 떠날 계획을 하며 무의미한 생활을 하던 중 부에노스아이레스 영화제에서 연락이 왔다. 지난 몇 년간 영화제에 오는 한국감독님들의 통역 자원봉사를 했었기에 올해에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번에는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던 중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실 나도 영화를 한편 만들었는데, 디지털 영화인데 출품 할 수 있냐 라고 소심하게 물었고, 그쪽에선 빨리 보내봐라 마감일이 몇 일 안 남았다라는 대답을 했다. 전화를 끊고 당장 영화카피본을 들고 영화제 사무국에 찾아가 출품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했고 일주일 후에 영화제 측에서 연락이 왔다.
“배연석 감독님! 당신의 영화가 경쟁부문에 올랐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고, 참으로 아이러니 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국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계획이 거꾸로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될 판이니 말이다.
그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영화제 기간 동안 내 영화는 매스컴에 집중적으로 보도되었고, 선례가 없던 지라, 동양인이 만든 아르헨티나의 첫 영화라는 것이 이슈를 만들었으며, 영화평도 호의적 이여서 영화제 기간 동안 관객투표 2위에 오를 정도로 관객들이 좋아했다.
그리곤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인터내셔널 프리미엄의 조건으로 초청되었고, 부산국제영화제, 하바나국제영화제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초청 콜과 관심을 받고 있다.
나는 왜 내 영화가 많은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추측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아무리 허접한 결과물일지언정 내가 영화에 쏟아 부은 열정과 내가 말하려던 진심을 누군가는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그런 것 같다. 정말 절실한 마음으로 만든다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알아줄 결과물 이 된 다는 걸… 어쩌면 나는 이런 영화는 앞으로 만들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처음처럼 절실한 마음을 유지하기란 힘들 수 있기에…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