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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비치 (Ernst Lubitsch)

1892-01-28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7.1

기본정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92-01-28
  • 사망1947-11-30
  • 성별

소개

에른스트 루비치는 초기 영화사를 장식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독일 태생의 루비치 감독은 무르나우, 프리츠 랑과 함께 독일 초기 영화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많은 독일 표현주의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1922년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세실 B. 드밀과 폰 스트로하임 등과 함께 할리우드 20년대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할리우드는 1920년대에 작가적인 역량을 지닌 감독들을 여럿 보유할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 절반은 루비치처럼 유럽에서 건너온 유수한 감독들이었다. 할리우드로 건너간 최초의 감독들은 모리스 투르니에, 에른스트 루비치, 무르나우, 두르비그 베르거 등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감독들을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전통에서 만든 루비치의 독일영화들은 일찍이 미국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처럼 할리우드에서 루비치가 자신의 모든 재능을 다 보여줄 수는 없었다. 미국의 영화광들은 루비치의 코미디를 좋아했으며 ‘루비치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가벼운 섹스 코미디는 그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파라마운트사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리잡았으며 <사랑의 행진 The Love Paradise>(1929) <몬테 카를로 Monte Carlo>(1930) <미소짓는 중위 The Smilling Lieutenant>(1931) <니노치카 Ninotchika>(1939) <죽느냐 사느냐 To Be or Not to Be>(1942) 등이 대표작이었다. 그의 행진은 할리우드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1950년대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감독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를 겸임하며 새로운 감독들과 배우들의 발굴에도 힘을 썼다. 조셉 L. 맨케비츠 감독도 루비치의 후원으로 데뷔작을 만들 수 있었다. 흔히 영화사가들은 드 밀과 루비치의 공통점 찾기를 좋아한다. 루비치가 미국으로 건너가 가벼운 코미디물들을 주로 만든 데 반해, 그 시기에 드 밀은 루비치가 행했던 스펙터클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스트로하임의 영화에 가깝다. 즉 소재 자체가 섹스와 돈을 배경으로 삼는다는 것. 그러나 폰스토로하임에 비해 깊이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성영화 시대에 들어서도 루비치는 세련된 감각으로 잘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세련된 코미디물 이상이 되지 못한 그의 할리우드 시절은 어쩌면 불운한 유럽 감독의 할리우드 적응기였는지도 모른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