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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트야지트 레이 (Satyajit Ray)

1921-05-02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6.5

/

네티즌8.9

기본정보

  • 다른 이름샤티야지트 레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21-05-02
  • 사망1992-04-23
  • 성별

소개

아시아영화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전까지, 서구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아시아영화계에는 오직 두명의 감독만이 있을 뿐이었다.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와 인도의 샤트야지트 레이. 샤트야지트 레이는 세계 최고의 영화생산대국이면서도 세계영화계의 주변부서 주목받지 못하던 인도영화를 단숨에 중심으로 자리잡게 한 감독이자, 언제나 열악한 창작환경에서 신음하며 고군분투하는 아시아 영화인들의 아버지요, 선배 같은 존재였다. 놀랍게도 샤트야지트 레이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중국의 제5세대, 6세대 감독이 부딪치는 현실의 난관, 그리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이란이라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비관적인 사회현실 속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던 상황들이 앞서서 펼쳐진다.
샤트야지트 레이는 처음부터 이단자였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시인이자 학자였으며 아버지 또한 촉망받는 젊은 시인이자 인쇄회사를 운영하는 부유한 인텔리 집안이었다. 하지만 레이의 이러한 유복한 환경은 그가 여섯살 때 인쇄소가 파산하고 아버지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급전직하로 몰락하고 만다. 하지만 타고난 머리로 레이는 벵골의 최고 명문인 프레지던셜 칼리지에 무난히 입학한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예술적 끼를 잠재울 수 없던 레이는 진로를 바꿔 타고르대학 미술학부에 들어가서 광고일을 시작하게 된다. 직업적인 상업미술가로서 그는 자유시간에는 영화에 열중하는 학생이었다.
젊은 레이가 광고일을 하던 이 시기는 또한 그가 영화에 눈을 뜬 시기이기도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시네마테크의 성격을 지닌 캘커타 필름 소사이어티의 창립멤버가 된 그는 회원들을 위해 영화해설을 해줌과 동시에 그 자신 열렬한 영화광의 한사람으로 영화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레이를 사로잡은 것은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과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도둑>이었다. 또한 장 르누아르의 <남부사람> 또한 그에게 무한한 영화적 영감을 준 작품이었는데, 마침 르누아르는 <강>의 촬영차 캘커타에 머무르고 있었다. 레이는 르누아르를 찾아가 심부름도 해주고 많은 이야기도 나누면서 대가의 자양분을 흡수할 기회를 가진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많이 보다 보면 그 다음 단계는 자연히 직접 영화를 만들고 싶어지는 법. 하지만 어떠한 경력도, 입증된 재주도 없는 샤트야지트 레이에게 그 같은 기회가 주어질 리 만무했다. 많은 독립영화감독들처럼 레이는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대가로 융자받은 7천루피를 모두 쏟아부어 만든 첫 작품 <길의 노래 Father Panchali> 촬영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7천루피는 장편영화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제작비가 바닥나자 레이는 주중에는 광고일을 계속해 나가면서 주말에만 영화를 찍었고, 자신의 책은 물론 가족의 패물까지 몽땅 팔아 계속 영화를 찍어나갔다. 그럴듯한 상업영화 배우를 기용할 수 없었던 그에게 주변사람들은 하나둘씩 영화배우가 되어갔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40분 분량의 영화를 편집해 투자자들에게 보여주었지만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머니의 소개로 벵골 정부 총리가 <길의 노래>를 본 다음 1만루피의 보조금을 지원했고 그가 속한 광고회사에서도 일부의 제작비를 지원해서 드디어 1955년 <길의 노래>는 완성될 수 있었다. 촬영을 시작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답이라도 하듯 <길의 노래>는 벵골 지역에서 개봉되어 커다란 흥행성공을 거두었고 인도의 전 지역에서 상영되었다.
레이의 첫 작품인 <길의 노래>는 인도 하층민들의 삶을 다큐멘터리적인 터치와 감독의 고유한 염세적 시각으로 다룬 영화로서 많은 부분을 데 시카의 <자전거도둑>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대가의 작품에 대한 창백한 모방은 아니었다. 이는 그의 영원한 주인공 아푸가 12살 될 때부터 자신의 나이만한 아들을 갖게 될 때까지의 여정이 펼쳐진다. 벵골 지방 농민의 삶을 특유의 자연풍광과 다큐멘터리적인 카메라워크로 사회 종교 경제적인 주제들이 가족의 매일의 생활에서 세부적인 짜임새로 펼쳐진다. 작품이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인도 정부는 그의 영화가 담아낸 인도의 현실이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다. 레이는 이후에도 계속적인 작품활동을 통해 인도 민중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냈지만, 당시 인도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가령 그의 영화는 같은 벵골어권인 파키스탄에선 상영될 수 없었는데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독립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의 노래>가 성공을 거둔 다음 레이는 이듬해 속편격인 <아파라지토 Aparajito>를 발표한다. <아파라지토>는 일찍이 아버지가 죽은 후, 심금을 울리는 아푸의 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열망(그것은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과 전통적인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모순된 욕구가 야기하는 부드럽고 애정이 깃든 긴장들을 다루고 있다. 일종의 연작인 작품은 1956년 베니스영화제에 그랑프리를 수상함으로써 구로사와와 함께 아시아영화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곧이어 <철학자의 돌 Parash Pathar>(1958) <음악살롱 Jalsaghar>(1958)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인도지역에서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전작들에 비해 작품성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얻는다. 이같은 비판을 의식했는지 레이는 다시 초기의 작품세계로 돌아가 이른바 그의 벵골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제3편 <아푸의 세계 Apur Sansar>를 발표한다. <아푸의 세계>는 앞선 두 작품에서 등장한 인물들의 그후 삶을 계속 묘사하는 것으로, 주인공 아푸가 성장하여 결혼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낳다 난산으로 숨지자 절망한 나머지 아이를 버려두고 집을 나간다. 아이 때문에 아내가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한 아푸는 계속 방황하지만 마지막에 다시 아이를 만남으로써 삶의 인연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여전히 염세주의적 분위기를 끌고 가면서도 앞선 작품의 리얼리즘적 전통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인도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얻었다.
삼부작에 이어 그는 좀더 인도적이고 개인적인 관심사로 옮겨간다. 그는 하층민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중산층으로 물질적인 것에서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주제들로 방향을 바꾸었다. <여신 Devi>(1960)에서 종교에 빠져 있던 봉건 지주는 자신의 며느리가 여신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칸첸중가 Kanchen-junggha>(1962) <차루라타-외로운 아내 Cha-rulata>(1964) <숲속에서의 낮과 밤 Aranyer din Ratri>(1970) 모두는 부유하고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복잡하며 변화하는 가족과 부부간의 성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본의 오즈 야스히로처럼 레이는 종종 변화하는 인도의 모습, 영국 식민지의 유산으로 남겨진 동양과 서양의 특이하고 매혹적인 혼합양상을 다룬다. 레이는 역시 여성들의 역할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여성과 일 그리고 남성지배적인 가정과 전통적인 역할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태도들을 말하고 있는 <대도시 Manhanagar>(1963)가 그 한 예이다.
샤트야지트 레이는 이미 국제적인 감독이 돼 있었고 그의 작품은 계속 국제영화제에서 환영을 받았다. 1964, 65년에는 <대도시 Maha-nagar> <차루라타 Charulata>로 연속해서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였으며, 1973년에는 <머나먼 천둥소리 Ashani Sanket>로 베를린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작품은 태평양전쟁 당시 500만명의 벵골 주민이 아사한 고통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유장한 스토리전개와 인간을 보는 따듯한 시선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사트야지트 레이는 인도영화를 세계에 알린 대가이면서도 자국의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받았던 인도영화의 아버지였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일본영화의 천황으로 불리면서도 만년에는 국내관객들로부터 외면을 받은 나머지 제작비를 외국으로부터 구해야 했던 것이나,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이 ‘서구영화제 심사위원의 눈에만 맞도록 타협한’ 동양적 엑조티즘의 변주로 자국 관객을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레이는 인도 안과 밖의 지지를 골고루 받았던 것이다. 그는 1984년 <집과 세계 The Home and the World>를 찍던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결국 아들 산딥이 레이의 지휘하에 영화를 완성시켰다. 5년 후 다시 영화계에 돌아온 그는 입센의 희곡을 벵골 지방에 맞추어 각색한 <공공의 적 An Enemy of the People> (1989)을 만든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나무의 가지들 Branches of the Trees>(1990)은 현대 인디아의 변화하는 윤리적 가치들을 우아한 시선으로 포착한 대작이었다. 1992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은 병석에 있는 샤트야지트 레이에게로 돌아갔다. 오드리 헵번과 구로사와 아키라가 동시에 찬사를 보내는 가운데 한달이 채 되기 전 샤트야지트 레이는 영면하였다.
그의 전체 작품을 살펴보면 레이는 결코 ‘인도의 네오리얼리스트’도 아니며 ‘벵골의 플래어티’도 아니었다. 레이는 연출뿐 아니라 음악, 촬영, 미술까지를 자기 손으로 직접하면서 영화는 장인의 예술이라는 신념을 실천한 몇 안 되는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예술적인 관심사들을 추구할 수 있는 위치를 획득한 매우 개인적인 감독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들은 인도의 문화·사회적 전통들과 문제들에 좀더 깊은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덜 보편적이지만 작품들은 훨씬 세련되고 연극적이고 연출방식은 탁월하다. 레이의 관조적인 특질의 어떤 것, 말 한마디 없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그의 표현력, 그리고 리얼리즘, 스토리텔링 방식은 기본적으로 할리우드에서 유래한 것이었지만, 각각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더 큰 맥락의 미묘한 암시 즉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신화적인 것’은 그를 계승하는 아시아 감독들에게 일종의 위대한 본보기로 남아 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