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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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명Tomás Gutiérrez Alea
- 다른 이름Tomás G. Alea; 토마스 쿠티에레스 알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28-12-11
- 사망1996-04-17
- 성별남
소개
1928년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10대에 마르크스 사상을 접하고 청년공산그룹에 가담한다. 아바나에서 법을 배웠고, 1952년에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나 영화를 공부했지만 2년 뒤 바티스타 정권의 억압이 횡행하고 있던 쿠바로 다시 돌아와 사파타 광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16밀리 중편영화 <엘 메가노>(1955) 등 쿠바의 억압적인 상황을 파헤치는 중, 단편 영화들을 만들어 정부와 마찰을 빚게 된다. 이후 그는 카스트로의 혁명운동에 동참하면서 첫 장편 영화를 만든다.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지원하는 영화센터인 ICAIC에서 <혁명의 역사>(1961) 3부작을 만들고, <어느 관료의 죽음>(1966)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이 영화는 할리우드 및 세계 걸작 영화를 모조리 패러디하며 혁명 이후에도 잔존하고 있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파헤친 코미디영화였다. 제목만으로도 라틴 아메리카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저개발의 기억>(1968)으로 그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알레아 감독은 쿠바 혁명 정부를 지지했지만 단순하게 혁명찬가를 외친 감독은 아니며, 혁명 이후 쿠바 사회의 잠재된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헤친 영화들을 만들었으며 그 대표작인 바로 <저개발의 기억>이다. 경제난으로 쿠바 전체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시기인 1993년에 그는 병든 노구의 몸으로 외국자본을 유치해 <딸기와 초콜렛> 을 만들어 다시 한번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쿠바의 국부 호세 마르티의 시에 붙인 아름다운 노래의 제목이자 미군에게 강점당한 식민의 땅인 ‘관타나모’의 여인이란 뜻을 갖고 있기도 한 <관타나메라>(1995)를 유작으로 남긴 채 1996년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작 <저개발의 기억> <마지막 만찬> <딸기와 초콜릿>
“<죠스>를 상영하는 지역에서 전투적인 영화로 <죠스>와 겨룰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죠스>와 근본적으로 다른 영화 형태로 대중에게 접근해야 한다.” 쿠바영화의 대부인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는 할리우드영화와 맞서기 위해 서구 예술영화의 난해한 형식주의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생각했다. 알레아는 이를테면 프랑스 누벨바그의 실험적인 양식이 상업영화의 형식을 파괴한다는 의미는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보았다. 전달력이 없다는 것이다. 꼭 무게실린 방법론을 동원하지는 않더라도 관객을 졸지 않게 하는 세련된 형식으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알레아의 영화는 모두 ‘혁명이 있었고 그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다’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있지만 추구하는 형식은 소재와 내용, 시대상에 따라 다양했다.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는 아바나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51년부터 53년까지 로마에서 영화 유학을 했다. 50년대 후반부터 시네 레비스타 뉴스릴 조직이란 단체에서 작업했다. 59년에 쿠바 혁명이 성공하고 쿠바영화예술산업협회(ICAIC: Instituto Cubano del Arte e Industria Cinematograficos)가 들어서자 알레아는 이 단체의 실무자로 일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알레아가 영화를 배웠던 50년대 초의 이탈리아 로마는 네오리얼리즘 사조가 절정에 올라 있을 때였다. 거리에 나가 실업과 가난이라는 현실문제를 기록영화 스타일로 담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알레아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혁명 이야기 Historias de la Revolucion> (1960)는 네오리얼리즘식으로 쿠바 혁명 직후의 현실을 묘사한 알레아의 첫 장편영화였다. 그뒤 알레아는 차츰 형식에 섬세하게 접근하는 고민을 담은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관료의 죽음 La Muerte de un Burocrata>(1966)은 논쟁적이면서 웃음을 거둘 수 없는 풍자영화인데, 관료주의가 쿠바 혁명 정부에 남아 있는 부르주아의 유산임을 주장하면서 기록영화 필름과 애니메이션 장면을 삽입하고 당시 서구영화의 스타일을 모조리 패러디했다.
알레아를 서방에 처음 알린 작품은 <저개발의 기억 Memorias del Subdesarrollo> (1968)이다. 쿠바 혁명 후에 쿠바를 떠나지 않은 한 젊은 지식인의 고뇌를 통해 알레아는 식민화된 부르주아의 정신상태를 비판하면서 쿠바 혁명의 현실과 과제를 끌어낸다. 미사일 공격을 위협하는 당시 케네디 연설과 쿠바 혁명의 당위를 주장하는 카스트로의 연설을 담은 뉴스필름을 나란히 보여주는 장면은 내외적으로 시련에 처한 쿠바 혁명의 상황은 과거에도 오늘에도 변하지 않았음을 일깨운다. <저개발의 기억>은 대안영화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알레아는 오랫동안 할리우드식 이야기에 익숙해진 쿠바 영화관객의 취향을 탈식민화시키고 싶다는 바람을 스타일에 담았다. 포르노그라피를 비판하려고 포르노그라피의 한 장면을 비추기도 하고 매번 똑같은 화면을 반복하는 상업영화의 인습성을 등장인물의 대사로 비꼬기도 한다. 알레아 본인이 직접 등장해 영화를 논평하는 한편 원작자를 출연시켜 쿠바의 저개발 상태와 문학에 관해 토론을 나누게도 한다. 그러나 <저개발의 기억>으로부터 10여년이 지난 70년대 후반에 오면 알레아의 영화 스타일은 자의식적이고 자기 반영적인 기법을 포기하는 대신 사실주의적이고 연대기적인 스타일로 바뀐다.
18세기의 흑인 노예 봉기를 담은 사극 영화장르인 <마지막 만찬 La Ultima Cena>(1978)은 식민지 상황에 대한 쿠바 흑인의 저항운동 전통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사회주의 쿠바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백인 중산층의 보수 이데올로기가 부활하고 있는 쿠바사회의 현실을 비판했다. 후기로 갈수록 알레아의 영화는 친절한 이야기 중심의 형식으로 바뀐다. 그러나 알레아의 창조적 개성은 사실주의영화에서 풍자 희극영화까지 골고루 걸쳐 있으며 계급 갈등, 보수적인 종교 이데올로기, 억압받는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주제도 폭넓다. 알레아는 쿠바영화예술산업협회에서 제작한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각본을 썼고 후배 감독들의 영화도 간간이 제작했다. 말년의 알레아는 젊은 영화작가들의 작업을 후원하면서 가끔 신작을 발표했으며 82년에는 <관객의 변증법>이라는 영화이론 저서를 내기도 했다. 말기의 대표작은 동성애 문제를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에 놓고 고민한 <딸기와 초콜릿 Fresa y Chocolate>(1993)이며 유작은 <관타나메라 Guantanamera>(1994)였다. / 영화감독사전, 1999